지난 9월 6일 우리나라 과학영재학교의 첫 신입생이 될 1백44명의 합격자 발표가 있었다. 과학영재학교는 6월부터 3개월 간 진행된 국내 최고의 과학영재 선발과정을 끝냈다. 어떤 과정으로 학생들을 선발했는지 집중 분석했다.
8월 20일 오전 9시 대전 한국과학기술원에 마련된 고사장에는 앳되지만 초롱 초롱한 눈망울을 지닌 중학생 2백16명이 연필과 영어사전만 동그라니 놓여있는 책상에 앉아있다. 이들은 우리나라 최초의 과학영재학교 진학을 꿈꾸며 마지막 관문인 3단계 선발과정을 치르는 중이다.
이날 학생들은 수리과학 영역의 시험을 본 전날에 이어 화학, 생물, 지구과학을 내용으로 하는 복합과학 영역 시험을 치렀다. 시험은 전날과 마찬가지로 아침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장장 9시간 동안 진행됐다. 학생들은 어떤 문제가 자신들의 과학적 영재성을 시험할지 궁금히 여기면서 흥분과 기대가 섞인 표정으로 시험지와 두꺼운 자료집을 받았다.
어릴 적 경험에서 문제 찾아
복합과학 영역의 시험주제는 물. 첫번째 문제는 물과 관련된 각자의 경험을 기술하라는 것이었다. 학생들은 어릴 적 물과 관련된 체험들, 예를 들어 물로켓을 만들어본 것,얼음판에서 스케이트를 타본 것 등을 떠올린다.
다음으로는 현재 또는 미래의 물과 관련된 문제가 무엇인지를 가능한 많이 나열하라는 문제였다. 비행기 이착륙에 지장을 주는 공항 주변의 안개 문제나 최근 들어 세계적으로 빈번하게 발생하는 집중폭우, 앞으로 우리나라가 겪을 물부족 등이 얘기된다.
이어지는 문제는 앞서 나열한 물과 관련된 문제들 중에서 관심있는 한가지를 선택하고,그 이유를 기술하라는 것이었다. 한 학생은 산업화지역에 내리는 집중폭우를 선택한다. 그는 우리나라가 얼마 전 갑작스러운 폭우로 막대한 인명과 재산 피해를 입은 일을 떠올렸다. 이와 함께 유럽을 비롯해 전세계 곳곳에서 올 여름 집중폭우가 발생했음에 주목한다. 생명의 모태인 물이 재앙의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집중폭우에 대해 탐구해볼 만하다고 적는다.
지금까지는 이 문제들이 과학적 영재를 평가하기에 싱거워보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것들은 학생들이 각자 풀어야 할 문제를 찾아나가는 과정이 문제로 제시된것이다. 과학영재는 문제도 스스로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맥락에서다.
2백50쪽 분량 자료집 제시
본격적인 문제풀이는 이제부터 시작됐다. 자신이 선택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필요한 원리나 근거를 자료집에서 찾아 정리하고, 사고실험을 통해 문제의 해결방법을 기술하라고 시험은 요구했다.
학생들은 2백50-3백쪽에 달하는 두꺼운 자료집에 어떤 내용이 들어있는지를 살펴본다. 자료집은 물의 물리화학적 특징, 물이 생물에 미치는 영향, 지구과학과 물, 그리고생명과학과 물이라는 소제목으로 나눠져있다. 자세히 살펴보니 교과서, 논문, 영문 자료, 정보검색을 통한자료, 참고 기사와그림, 한자로 된 천기도 등 다양한 물의 자료가 포함 돼있었다. 누군가가 물에 대한자료를 두서 없이 마구 수집 해놓은 듯하다. 학생들은 자신의 문제해결을 위한 나름의 가설을 세운다. 예를 들어 산업화지역에 내리는 집중폭우의 근본적인 원인이 도시에서 대기로 방출되는 열 때문이라고 가정한다. 그리고 도시에 방출되는 열을 차단하는 방법을 고안하기 위해 필요한 자료가 무엇인지를 생각한다. 온도와 높이에 따라 달라지는 포화 수증기압 그래프, 구름의 생성과정 등이 이문제를 해결하는데 필요한 자료라고 생각하고 자료집에서 이에 대한 내용을 자세히 살펴본다. 그리고 시험에서 요구하는 대로 내용을 잘 정리한다.
학생은 머리 속으로 달군 금속판에 물을 뿌릴 경우 물이 증발하면서 주변온도가 떨어지는 현상을 실험한다. 즉 사고실험을 한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달군 금속판 밑에 수로를 만들어 온도가 떨어지는 현상도 사고실험을 한다.
학생은 사고실험을 바탕으로 산업화된 도시의 지면 밑에 강으로부터 유인되는 찬물 수로를 설치할 것을 제안한다. 찬물 수로가 지표의 온도를 낮춰 도시에서 대기로 방출되는 열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수로를 지면으로 간간이 드러나게 해서 수증기를 증발시키면 이로 인해 대기의 온도가 낮아져 대기습도의 평형상태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덧붙인다. 결국 이 방법으로 도심의 집중폭우를 막을 수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최종적으로 학생은 자신이 선택한 문제에 대한 해결과정을 5장 이상의 보고서와 1장의 요약서로 정리해 제출한다.
과학자들의 연구과정 그대로 본따
다음날 학생들은 아침 9시부터 30명이 넘는 교수와 교사로 구성된 면접관 앞에서 이틀 동안 연구한 내용에 대해 심층면접을 치렀다. 면접시간은 30분 정도로, 학생은 먼저자신의 연구내용을 5-10분 동안 발표하고, 남은 시간에는 면접관들의 질문에 답변했다. 학생의 연구내용을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 면접관들은 전날 밤 학생들의 결과보고서를 살펴봤다.
이렇게 해서 과학영재학교 3단계 선발은 끝났다. 학생들은 첫날 대전 과학기술원에 도착해 이틀간 각각 9시간 동안 과제풀이를 수행했고, 마지막 날에 이에 대한 심층면접을치렀다. 3박4일의 긴 여정을 마친 학생들은 새로운 경험에 가슴이 뿌듯해진다.
3단계 선발을 지휘한 한국과학기술원 물리학과의 김수용 교수는 “이 선발과정은 과학자들의 연구과정을 본딴 것”이라고 말했다. 과학자들은 일반인들이 쉽게 지나치기 쉬운 일상의 경험 속에서 문제를 발견한다. 3단계에서 학생들이 자신의 경험 속에서 물에 관련된 문제를 발견한 것처럼 말이다. 또한 발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과학자들은 가설을 세우고, 수많은 자료를 모아 이론적인 토대를 닦아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낸다. 그리고 이 내용을 보고서로 작성해서 최종적으로 학회 같은 곳에 발표한다.
이 과정에서 과학자들에게는 문제를 꼭 해결해야 겠다는 집요함과 도전정신, 해결과정에 필요한 창의적 사고력과 고차원적인 문제 해결력이 필요하다. 미래의 과학도를 키울 과학 영재학교는 신입생이이 같은 과학 자의 소양을 갖췄는지를 평가하고자 했던 것이다. 학생들이 과학지식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느냐가 평가내용이 아니다. 이는 지식 위주로 평가받는 지금까지의 다른 시험과 분명히 차별되는 점이다.
학년·석차 따지지 않는 지원자격
과학영재학교의 첫 선발은 지난 6월 7일-20일 원서접수로 시작했다.
과학영재학교의 지원자격은 뭘까. 과학고의 경우에는 경시대회 입상이나 학교석차가 몇% 이내이어야 한다는 식으로 지원자격이 명확히 규정돼 있다. 그러나 과학영재학교는 이같은 획일적인 지원요건이 없다. 명시된 요건은 다음과 같다.
‘중학교 재학생, 졸업생 및 이에 상응하는 자격을 갖추고 수학 또는 과학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과 잠재력이 있다고 인정되는 자로서학교, 지도교사 또는 교육감이 인정하는 영재교육기관의 추천을 받은 자(단, 검정고시합격자는 시 도교육감의 추천을 받은 자). ’수학, 과학에 뛰어난 재능과 잠재력을 갖추 기만 하면 된다는 의미다. 지원 학생들은 이번 선발 과정에서 자신의 과학적 영재성을 평가 받을 수 있었다. 또한 중학교 3학년만이 진학할 수 있었던 과학고와 같은 학년 제한도 없었다.
첫번째 신입생을 꿈꾸며 지원한 학생은 총1천1백94명. 1백44명의 최종합격자를 가려내는 이번 선발의 경쟁률은 8.29대1이었다. 중학교1학년61명, 2학년2백47명, 그리고3 학년 8백71명이 지원했고, 검정고시 등 기타 응시자가 15명이었다.
1단계 선발은 서류전형이었다. 원서를 접수할 때 학생들은 학교성적, 자기소개서, 추천서, 그리고 수상실적을 포함한 각종 실적물을 자료로 제출했다.
1단계에서 평가위원들이 중점적으로 본 것은 실적물. 각종 경시대회 수상뿐 아니라 자신의 과학적 영재성을 드러내는 것이면 모두 실적물이 된다. 그래서 학생들이 제출한 실적물은 상당했다.
책·낙서장·악보 실적물로 제출
그러나 1단계 전형을 담당한 경남대 교육학과 최호성 교수는 “생각했던 것보다 학생들의 실적물이 다양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학생들이 제출한 실적물로는 경시대회 수상기록이 주류를 차지했다. 이 외에 일기장, 공책, 과제장, 그리고 프로그램 CD 등이 일부 보였을 뿐이다. 이는 아직 실적물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자신을 드러내는 수단이 획일적임을 말해준다.
물론 아주 독특한 경우도 있었다. 한 학생은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동식물 관찰과 다양한 실험 활동에 대한 일기를 써왔다. 그리고 이 내용이 출판된 책을 실적물로 제출했다. 이 외에도 이 학생은 여러 기하학적 모양이나 미로형의 그림을 그린 낙서장, 비행기에 관심이 많아 찍어왔던 사진, 그리고 자신이 직접 작곡한 악보도 덧붙였다. 최호성 교수는 “이들은 이 학생이 과학에 상당한 호기심과 흥미를 갖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실적물이라 눈에 띄었다”고 말했다.
3단계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은 학생들은 이 학생처럼 주로 어린 시절부터 자연현상과 우주에 대한 호기심을 가졌고, 뛰어난 관찰력을 키워온 경우가 많다고 한다. 3단계 최우수자로 합격한 서울 가락중 2학년 김종우 학생도“어릴 적부터 거미, 지렁이, 개미를 키우면서 과학에 대한 흥미와 자신만의 연구세계를 만들어갔다”고 말했다.
이번 1단계 실적물 평가는 실질적으로 시험의 당락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 지원자 모두 1단계를 통과 했기 때문이다. 지원자가 선발 위원회의 예상보다 적었던 탓이다. 1천5백명이 넘게 지원 할 경우 1단계에서 실적물을 중심으로 이 인원을 가려내려고 했던 것이다.
해저 매장된 메탄 수화물 채굴법
2단계 전형은 7월 14일에 있었다. 1천2백여명의 응시자 중에서 정원의 1.5배인 2백16명을 선발했다. 따라서 2단계가 많은 학생들의 당락에 결정적이었던 셈이다.
2단계는 창의적 문제해결력을 검사하는 지필고사였다. 시험은 수학과 과학(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으로 나눠 치러졌다. 수학은 6개 문제가 제시됐고 시험시간은 2시간. 과학은 과목별로 5-6개 문항이 제시됐고 시간은 2시간 30분이었다.
3단계와 마찬가지로 2단계 문제도 답이 정해지지 않은 개방형이었다. 물론 수학의 경우는 예외적이었다. 그러나 과학의 경우 모든 문제에 정해진 답이 없었다. 심지어현재과학자들이 연구중인 주제도 출제됐다. 대표적인 예가 화학문제였다.
2단계 화학문제의 주제는 메탄 수화물이었다. 메탄 수화물은 21세기의 신에너지로 부상하고 있는 자원으로, 빙하기 이후 해저나 동토의 0℃ 이하의 저온과 30기압 이상의 고압에서 형성됐다. 또한 메탄 수화물은 1cc가 표준상태의 메탄 1백60cc에 해당되는, 농축천연가스다. 해저에는 지구상의 석탄, 석유, 가스의 2배에 가까운 메탄 수화물이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메탄 수화물의 안전한 채굴방법은 현재까지 개발돼 있지 않다. 메탄 수화물은심해에서 벗어나 온도가 높아지거나 압력이 낮아지기만 하면 물과 메탄으로 분해된다. 문제는 메탄가스가 지구온난화를 유발하는 물질이어서 연소되지 않은 상태로 그냥 방출 되면 환경에 약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시험지에는 이같은 맥락의 내용과 함께 메탄 수화물의 상평형 그래프와 같은 기본 자료가 제시됐다. 그리고 응시자에게 각자 메탄 수화물을 안전하게 채굴할 방법을 고안하라고 요구했다. 학생들은 메탄 수화물의 안전한 채굴방법을 단지 추측만으로 제시해서는 안된다. 메탄 수화의 까다로운 보관방법을 모두 만족시켜야 한다.
2단계 전형의 팀장을 맡은 인천대 물리학과 박인호 교수는“정해진 답이 없는 문제를 통해 학생의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을 중점적으로 평가했다”고 말했다.
한 과목만 잘해도 뽑힌다
이처럼 이번 과학영재학교 선발은 지금까지의 선발시험들과는 다른 특징들을 보여줬다. 특히 과외나 학원을 통해 자신보다 높은학년의 지식을 미리 학습함으로써 좋은 성적을 얻는 평가는 철저히 배제하려고 했다. 문제는 중학교 수준의 과학적 개념만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실제로 합격자의 학년에서 이 점을 확인할 수 있다. 합격자의 학년을 살펴보면 중학교1학년 3명, 2학년 20명, 3학년 1백21명이었다. 1-2학년의 합격자 비율이 16%로 연령이 나 선수학습보다 창의성과 과학적 잠재력이 선발과정에서 좀더 중시됐다고 관계자들은 평가를 내렸다.
과학영재학교의 또다른 새로운 점은 한 과목을 잘해도 합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각 단계 선발에서 미리 정해놓은 인원의 과목별 우수자를 먼저 뽑고, 남은 인원은 총점을 기준으로 가렸다. 그래서 2단계의 과학시험에서 학생들에게 잘하는 과목을 중심으로 먼저 해결하라고 말해줬다.
한편 합격자들은 과학적 소양만 뛰어난 것이 아니었다. 리더십, 작문능력, 자기주도적학습능력, 예체능 분야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여줬다. 물론 이런 재능은 평가대상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중에는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얻도록 유리하게 작용한 면도 있었다. 바로 작문능력이 그렇다. 3단계에서는 각 학생들이 자신의 연구내용을 보고서로 제출하도록했다. 이때 학생이 아는 것이 많고 창의적으로 생각하지만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면 높은 점수를 받기 어렵다. 3단계 복합과학 최우수자인 경기도장중 3학년 김지윤 학생은 어릴 때부터 많은 책을 읽어 글쓰기 실력이 높았다.
향후 과학 영재학교에 진학 하려는 학생은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 정해진 몇권의 교재로 단기간에 반복학습하거나 획일적인 표준 풀이법을 숙달해 문제를 푸는 방식으로 준비해선 절대 안된다고 심사위원들과 응시자들은 말한다. 이보다는 어릴 적부터 자연과 친숙하 면서자연현상에호기심과상상력을갖고, 풍부한 독서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사고력을 통해 자기 주도적인 학습 능력을 신장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이번 심사의 위원장인 서울대 물리학과 소광섭 교수는“이전까지 학생들이 보지 못했던 새로운 내용으로 지식이 아니라 미래 과학도가 갖춰야할 종합적 소양을 측정하는 새로운 스타일의 선발방식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 과학영재학교 선발이 일선 과학교육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를 기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