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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밝혀지는 암 유전자, 그리고 DNA 칩

약물 오용 줄이는 맞춤식 항암치료 가능

20세기 인류 최대의 난적이었던 질병 암. 21세기에는 끔찍한 질병으로 악명을 계속 유지하기는 힘들 듯 하다. 게놈연구를 통해 암을 물리칠 다양한 방법이 모색되고 있기 때문이다. 게놈연구자들이 암을 정복해나갈 전략을 살펴보자.


인간의 몸은 ‘세포’라는 생명의 기본 단위로 이뤄져 있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세포는 약 1백조개에 이르는데, 모양과 기능에 따라 다양한 종류로 나뉜다. 그러나 조직이나 장기를 형성할 때는 이들 세포가 절묘한 질서와 유기적인 조화를 이루기 때문에 전체가 항상성을 유지해 하나의 온전한 생물체로 기능을 한다.

신체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메커니즘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엄격하게 조절되는 것은 세포의 증식과 생사에 관한 일이다. 그런데 이에 이상이 생기면 ‘암’이라는 치명적인 질병이 발생한다. 의학적으로 암은 신체 조직의 일부 세포가 정상적인 역할을 벗어나 무절제하게 증식해 종양을 형성하고, 주위의 정상조직 또는 기관에 번져 이를 파괴시키며, 궁극적으로는 개체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무시무시한 질환이다.

1980년대 초·중반 암 연구에 분자유전학이 접목되면서 암의 발생과 진행이 근본적으로 유전자의 이상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현재는 모든 암을 유전적 원인에 의해 설명할 수 있다고 예측되는 상황이다. 인간게놈프로젝트의 성과가 발표되면서 암 관련 게놈연구가 더욱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이유다.
 

밝혀지는 암 유전자, 그리고 DNA 칩



암게놈프로젝트 경쟁 시작

암은 어떻게 발생하는 것일까. 정상적인 세포는 신체가 필요로 하는 경우에만 증식이 일어나고 성장신호가 사라지면 즉시 멈춘다. 또 게놈에 이상이 생기면, 성장을 멈추고 변이가 일어난 게놈을 교정해 복구한다. 이런 노력에 의해서도 게놈의 이상이 회복되지 않으면, 세포는 스스로 자살신호를 내려서 변이세포가 되는 것을 예방한다.

그러나 흡연, 환경오염, 방사선, 화학물질, 바이러스, 선천적 유전자 이상 등의 발암요인은 주요 유전자의 기능에 이상을 초래해 암세포를 만든다. 성장을 촉진 또는 억제하는 유전자에 이상이 생겨 세포증식이 필요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인 세포증식이 일어난다. 게놈 항상성을 유지하는 유전자에도 이상이 생겨 유전자 변이가 회복되지 않고 계속 축적된다. 이런 세포를 제거하는 세포자살 유전자에도 이상이 일어나 변이세포를 제거하지 못한다.

이외에도 암세포가 더 빨리 증식하고 다른 조직으로 쉽게 퍼지는 악성 암세포로 진화하기까지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는 수많은 유전자들이 관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신체조직의 구조를 파괴할 수 있는 유전자가 무절제하게 발현돼 주변으로 번져나간다. 종양 덩어리에 혈액을 공급하기 위해 혈관의 생성을 유도하는 유전자가 비정상적으로 많이 발현돼 독자적인 물류시스템을 구축한다. 또 면역반응을 조절하는 유전자에 이상이 일어나 인체 면역체계의 감시와 공격을 피해 나간다. DNA 복제를 무한정으로 가능케 하는 유전자나 세포증식에 따르는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유전자도 비정상적으로 많이 발현돼 암세포 성장과 증식을 더욱 촉진한다.

이처럼 다양한 암 관련 유전자에는 변이가 일어난 비정상 유전자뿐만 아니라 이들의 조절을 받는 많은 정상 유전자들도 포함된다. 따라서 암의 발생과 진행에 관여하는 유전자들을 체계적으로 찾아내 이들의 역할과 작용원리를 규명하는 일은 암의 효과적인 예방과 진단·치료를 가능하게 한다. 암을 정복하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인 것이다.

그러나 암과 관련된 유전자는 예상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미 알려진 암 관련 유전자들도 그 작용원리에 대해 체계적인 연구가 필요한 실정이다. 인간게놈프로젝트 이전에 진행된 소규모적이고 한정된 몇몇 유전자에 초점을 맞춘 연구는 더이상 의미를 지니기 어렵다. 즉 ‘암게놈’을 좀더 체계적으로 연구하기 위해서는 대형 연구개발사업이 필요하다. 이런 사업은 선진국을 중심으로 인간게놈프로젝트가 한창 진행되던 1990년대 중반부터 추진되기 시작했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1996년부터 미국립보건원 산하 국립암연구소가 주도하는 ‘암게놈분석사업’(CGAP)이다. 현재 CGAP에서는 미국인에게 빈발하는 신체 부위의 암 관련 유전자를 발굴하고, 이들의 발현을 분석하는 작업을 대규모로 수행하고 있다. 그 결과는 전세계의 과학자들에게 공개돼 암 연구가 효율적으로 이뤄지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일본은 지난해 밀레니엄 프로젝트라는 국가주도의 연구개발사업을 수립하고, 연간 6백40억엔(약 6천4백억원)을 투입해 본격적인 암게놈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996년 보건복지부가 암정복추진연구개발사업을 수립해 처음으로 암 연구를 전적으로 지원하는 제도가 마련됐다. 인간게놈 염기서열의 초안이 발표되기 직전인 1999년에는 과학기술부가 수립한 ‘21세기 프론티어 사업’ 중 ‘인간유전체기능연구사업’을 통해 한국인에게 발병빈도가 높은 위암과 간암의 게놈연구를 지원하고 있다.


DNA 칩으로 게놈 진단

암은 치명적인 질병이기는 하지만 조기에 발견해 적극적으로 치료하면 매우 높은 완치율을 보인다. 현재 암으로 의심돼 진단에 착수하면 90% 이상 확실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초기에 자각증상이 없어 조기진단의 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현재 암에서 이상 발현되는 유전자들을 체계적으로 파악해 이를 환자의 혈액이나 조직으로부터 고감도로 측정할 수 있는 ‘암게놈에 근거한 분자진단법’의 개발이 한창 진행되고 있다. 분자진단법은 단백질, 핵산, 대사산물과 같은 우리 몸에서 만들어지는 물질의 양적, 질적 변화를 측정해 질병의 발생여부와 정도를 판단하는 방법으로 간편하면서도 정확해 활용도가 높다. 지금까지는 주로 대사산물과 몇몇 단백질 위주로 이뤄졌으나 게놈시대에 접어들면서 DNA나 RNA와 같은 핵산도 중요한 진단지표로 개발하고 있다.

이 중 최근 가장 주목받는 방법이 ‘DNA 칩’이다. DNA 칩은 2.5×7.5cm 크기의 유리판에 수백-수만개의 유전자를 집적해놓은 것으로써, 많은 유전자의 변이나 발현변화를 한꺼번에 고감도로 정확하게 분석할 수 있는 장치다. 암에서 일어나는 유전자 발현변화를 DNA 칩으로 분석하는 과정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먼저 암세포와 정상세포에서 발현된 각각의 유전자 성분을 서로 다른 색깔의 형광물질로 구분해 표지하고 이를 합쳐서 DNA 칩 상에 있는 유전자에 결합시킨다. 이 과정에서 암세포와 정상세포에서 발현된 각각의 유전자 성분들은 서로 경쟁한다. 이들의 상대적인 양의 차이는 레이저를 이용한 자동측정장치에 의해 컴퓨터에 기록되는데, 붉은색, 초록색 또는 노란색 등 육안으로도 확인이 된다. 그리고 DNA에 수록된 모든 유전자에 대해서 암세포와 정상세포에서의 상대적인 성분비가 계산돼 통계적인 방법으로 분석한다. 이 결과를 통해 암세포에서 어떤 유전자들의 발현이 얼마만큼 변화했는지, 어떤 암환자들의 세포가 서로 유사한 유전자 발현패턴을 보이는지, 두가지 이상의 암세포에서 어떤 유전자들이 공통적인 발현패턴을 보이는지 등을 신속·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DNA 칩 기술이 정립된 것은 불과 2-3년 전의 일이지만 이미 다양한 연구성과가 발표되고 있다. 백혈병을 비롯한 혈액암은 주로 현미경으로 암세포의 모양을 구분해 진단하는데, 세포의 모양이 비슷한 경우가 많아서 제대로 진단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DNA 칩을 이용해 유전자들의 발현패턴을 분석함으로써 서로 다른 혈액암을 정확하게 진단할 수 있게 됐다. 또한 지금까지 한종류로 취급됐던 특정 혈액암(diffuse large B-cell lymphoma)이 사실은 각각 다른 치료방법을 적용해야 하는 2가지 이상의 암종으로 구분된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최근 네델란드 암연구소에서 DNA 칩을 이용해 유방암 환자들을 분석한 결과 암 치료 후 재발율이 높은 환자에게서 발현변화가 심한 암 관련 지표유전자들의 존재를 확인했다. 즉 유방암 환자들을 치료한 후 재발방지를 위해 계속적인 투약이 필요한 그룹과 치료를 계속하지 않아도 되는 그룹을 DNA 칩으로 구분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처럼 DNA 칩과 같은 암게놈에 근거한 분자진단법은 유전자 수준에서 정확하고 세분화된 진단을 가능하게 해, 항암제의 종류와 투여량, 투약일정 등 개개의 암 환자에게 적합한 결정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 이와 같은 맞춤식 항암치료가 실현되면 완치나 생명 연장, 괴로운 증세의 호전을 가져올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외에도 DNA 칩은 정상인의 암 발병 가능성 예측을 위한 유전자형 분석, 항암제의 안전성과 독성연구 등에서도 없어서는 안될 효과적인 방법으로써 자리매김해가고 있다. 물론 DNA 칩이 본격적으로 환자의 진단에 본격적으로 적용되기 위해서는 앞으로 수년이 더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이 방법이 상용화되면 일반신체검사와 같은 정기검사를 통해 암의 조기 진단율을 크게 개선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사람 간의 게놈 염기서열 차이에 바탕을 둔 SNP 분석법을 통해 암 관련 게놈에 대한 SNP 정보를 수집하는 연구도 한창 진행되고 있다. 암의 발생과 진행에는 식생활, 음주, 흡연, 유해물질에의 노출과 같은 환경적 요인과 유전적 소인이 있는데, 암은 환경적 요인에 대해 유전적 소인이 어떻게 대응반응을 보이는지에 따라 발생빈도와 진행정도가 크게 좌우되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환경은 변화지만 유전적 소인은 타고나는 것으로서 이미 결정된 상태다.

사람마다 생김새나 체질이 다르고 음식물이나 약물에 대한 반응이 다른 것은 사람마다 유전적 구성이 약간씩 다르기 때문이며, 이것은 근본적으로 게놈 염기서열 차이, 즉 SNP에 비롯된다. 따라서 암의 발생과 진행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유전자들의 발현과 기능에 영향을 주는 SNP를 측정하면 이로부터 개인의 암 발생 가능성을 미리 예측할 수 있고, 장기적으로는 암의 예방에 큰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된다.

인간게놈프로젝트의 일환으로 2001년까지 이미 수백만개의 SNP 부위가 확인된 바 있다. 이를 암 예측에 이용하기 위해서는 암 관련 유전자들이 체계적으로 규명되고, 이 유전자들의 SNP와 암과의 상관관계가 밝혀져야 한다. 이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많은 시간이 소요되겠지만, 치료보다는 예방이 좀더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그 파급효과는 지대할 것이다.

한편 암의 치료에는 수술, 방사선요법, 항암화학요법 등의 치료법이 널리 사용되고 있다. 수술은 암이 한 부위에 제한돼 있을 때 암을 완전히 제거하기에 적합한 치료법이지만, 암의 종류에 따라 10-80%의 경우에 대해서만 치료 가능하다. 방사선요법도 제한된 부위의 치료를 목적으로 하는데, 암에 따라 방사선치료법이 잘 듣는 경우와 저항이 있는 경우가 있다. 항암화학요법은 전신치료 방법으로 주로 암이 여러 조직으로 퍼지는 현상을 막는데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임상에 사용되는 여러 항암제는 적용범위가 특정 암으로 제한되는 경우가 많으며, 독성이 강하고 심지어 발암제로 작용할 수도 있다.
 

기적의 백혈병 치료제 글리벡(옆은 구조). 암게놈 연구는 글리벡처럼 효과적인 신약 탄생에도 유용 하다.



암 유전자 공격하는 치료제 기대

현재의 암 치료 성적은 예전보다 획기적으로 개선됐지만 더 큰 발전을 위해서는 새로운 치료법 개발이 절실하다. 이를 위해서는 암 관련 유전자를 선택적으로 공격하는 치료제나 치료법을 개발하는 일이 진행되고 있다. 암게놈연구에서는 암 관련 유전자들을 체계적으로 찾아내고 암의 발생과 진행에서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는 유전자들을 확인해 그들의 작용원리를 밝혀준다. 암 치료의 표적이 되는 출발점과 이를 효과적으로 공격하기 위한 전략을 제시하는 셈이다.

암게놈 정보에 바탕을 둔 약물이나 치료법은 부작용이 낮으면서 높은 치료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그래서 세계 굴지의 제약회사를 비롯해 대학, 연구소, 바이오벤처들은 새로운 항암제 개발을 위해 암과 관련된 다양한 유전자들을 발굴하고 있고, 이미 후보약물을 개발해 임상시험에 착수하고 있다. 앞으로 수년-십수년 내에 글리벡과 같이 우수한 약효를 갖는 새로운 항암제들이 여럿 개발될 것으로 기대된다.

암 유전자에 대한 연구는 30여년의 역사를 갖고 있지만 게놈수준의 대단위 사업이 시작된 것은 불과 수년전의 일이다. 그럼에도 이미 많은 암 관련 유전자가 체계적으로 밝혀지고 있고, 정확하고 간편한 진단법의 가능성이 손에 잡히고 있으며, 새로운 항암제나 암치료법 개발의 가능성이 확인됐다. 이런 결과들을 암 정복의 무기로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유전자들의 기능을 빠르고 정밀하게 분석해 그 결과를 응용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는 게놈연구를 위한 인프라와 관련 기술, 인적 자원 확보가 중요하다. 이를 위한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2002년 08월 과학동아 정보

  • 염영일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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