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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청동」은 합금성분으로 아연이 들어 있고 형식에 있어서도 독특한 옛시대의 수출품이었다.

●- 1만3천3백개의 선으로 구성된 거울

숭실대학교 부설 한국기독교박물관에는 B. C. 4세기∼B. C. 1세기 때의 청동기시대에 만든 잔무늬 청동거울이 소장되어 있다. 흔히 다뉴세문경(多鈕細文鏡)으로 잘 알려진, 직경 21.2cm의 청동거울이다.

1960년대에 충청남도 지역에서 발견된 것으로 전해지는 이 청동거울은 그 기하학적 무늬의 기발함과 섬세함, 그리고 정교한 주조기술이 우리를 놀라게 했다. 한마디로 이것은 청동기 주조기술의 극치다. 이런 청동 주조물은 그 시기의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자세히 보면 볼수록 점점 더 불가사의한 제도(製図) 솜씨가 나에게 지금까지도 쉽게 풀어지지 않는 수수께끼만 남아 있다. 아마도 숙련된 기능을 가진 현대의 제도사가 좋은 제도기를 가지고 트레이싱 페이퍼에 그린다 할지라도 20일 이상은 작업해야 완성할 것으로 보인다.

20cm가 채 안되는 원의 공간에 1만3천개의 원과 직선을 확대경 없이 그려낸다고 상상해 보라. B. C. 4세기이 사람이 그 일을 어껗게 해냈으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을까? 우리의 상식으로는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이 기막히다고 찬탄을 했지만, 실제로 그러한 주조물이 어떻게 만들어졌을지는 구체적으로 검토되지 않았다. 최근에 우리는 실험적인 방법으로 이 청동거울의 무늬를 재현해 보았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놀라운 사실들이 속속 드러났다.

그 중에서 몇가지만 적어보자. 거울의 무늬는 중심에서부터 3등분한 동심원의 공간에 그려졌다. 먼저 굵은 선의 동심원 5개가 안쪽 공간을 구성했다. 그 직사각형과 그 대각선, 그리고 수많은 평행선과 사선 등 모두 3천3백40개의 선으로 메웠다. 중간 부분은 10개의 가는 선으로 0.5mm 간격의 동심원을 새겼다. 그리고 3겹에서 5겹의 가는 줄과 굵은 줄을 적절하게 배치, 약 1cm 간격의 동심원을 그려 넣었다. 또 그 공간을 48등분하고 그래서 생긴 직사각형에 가까운 도형에 대각선을 새겼다. 그리고 0.35mm 간격으로 모두 4천3백30개 가량의 선을 그려서 공간을 채웠다.

맨 바깥 부분은 원반에 내접하는 정사각형의 꼭지점에 30여개의 동심원으로 구성된 도형 8개를 배치하였다. 그리고 그밖의 공간을 5천7백30개 가량의 평행선과 사선으로 엇갈아 그어서 장식했다.

그러니까 이 잔무늬 청동거울에 그어진 선은 모두 1만3천3백개 쯤 되는 셈이다. 0.3mm 간격까지 그은 이 가는 선들을 제도기로 종이 위에 그리기도 쉽지 않은데, 어디에다 어떻게 도안을 그려서 거푸집을 만들었는지 신비하기조차 하다. 또 어쩌면 그다지도 기막히게 깨끗이 청동을 부여 떠 냈는지, 도저히 우리의 상식으로 이해하기가 어렵다.

이것은 분명히 한국 청동기시대의 불가사의다. 이 청동거울을 만든 장인은 캠퍼스와 정밀한 자(尺)가 없던 시기에 스스로 그런 기구를 만들어서 작업을 했을 것이다. 그 작업은 최고의 기술자가 평생을 이 일에만 몰두해야 해낼 수 있는 일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런 잔무늬 청동거울이 남한지역에서만도 여러 개가 발견되고 있다. 이 사실은 그 당시 한국의 청동기술이 최고의 수준에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들 청동거울이 돌거푸집(stone mold)으로 만든 것인지, 진흙거푸집(clay mold)으로 만든 것인지, 아니면 밀랍거푸집(wax mold)으로 만든 것인지, 아직 잘 모른다. 한 실험고고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진흙거푸집으로 했을 때 가장 훌륭하게 재현해 낼 수 있었다고 한다. 그의 실험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아무튼 잔무늬 청동거울은, 전혀 새로운 디자인, 최고의 섬세한 도안, 완벽하고 정밀한 주조기술, 그리고 뛰어난 미(美)적 감각을 지닌 한국 청동거울 제조기술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된다.
 

비파형 청동검^B.C.10~B.C. 7세기, 40.8×7.5cm, 경북 금릉 출토,숭실대박물관,한국청동의 형식상 특징이 나타난다.
 

●- 신라동은 종의 소재로

'동국여지승람'(東國与地勝覧)은 1481년에 편찬되고 1530년에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増東國与地勝覧)으로 증보·완성된 우리나라의 훌륭한 지리지(地理誌)이다.

여기에 이런 글이 있다.

"다섯가지 금속(금 은 구리 철 납) 중에서 구리(銅)가 제일 많이 산출되는데(우리나라에서), 이 땅에서 만들어지는 구리(여기에서의 구리 Cu가 아니고 청동을 말한다.)가 가장 굳고 붉은 색이 난다. 식기나 수저 등은 모두 이것으로 만드는데, 이것이 곧 중국에서 말하는 고려동(高麗銅)이다".

또 16세기 명나라 사람 이시진(李時珍)이 쓴 '본초강목'(本草綱目)이라는 책이 있다. 본초학 책이라고는 하지만 오히려 박물학 책에 더 가깝다.

이것은 아주 방대한 책으로 그 당시 박물관을 집대성한, 세계적인 명저로 꼽히는 과학의 고전이다. 그 책의 금속부분에 이런 글이 있다.

"페르시아동(波斯銅)은 거울 만드는 데 좋고, 신라동(新羅銅)은 종을 만드는 데 좋다."

그 당시 세계에서 가장 질이 좋은 동합금(銅合金)들을 소개한 셈인데, 페르시아의 황금빛 나는 황동과 신라에서 만든 아연-청동이 최고라는 것이다. 이는 저자인 이시진의 평가이다. 그래서 이 글의 첫머리에 '이시진이 말하기를'이라고 자신의 견해를 객관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1488년(성종 19년)에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왔다 가서 조선의 풍토(風土)를 읊어 쓴 명나라 사람 동월(董越)의 '조선부'(朝鮮賦)에도 '고려동'은 질이 우수하다는 글이 있다. 또 '고려사'에는 중국에서 고려의 구리쇠를 사간 기록들이 여러 번 나온다. 중국이 구리가 모자라 고려구리를 수입한 것이 아니라 고려의 청동이 질이 좋기 때문에 특별히 고려에서 만든 청동합금을 사간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에서 우수한 동합금으로 널리 알려진 '신라동'과 '고려동'이란 무엇일까? 중국은 기원전 15세기에 이미 세계 최상급의 청동기를 부어 만들어냈다. 그만큼 훌륭한 청동기기술을 가진 나라이다. 오랜 기술적 전통을 가진 중국에서 세계 최고의 품질로 꼽는 청동이 '신라동 '고려동'이라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신라와 고려의 청동기기술자들은 어떤 동합금을 만들어냈기에 가장 좋은 종, 가장 훌륭한 그릇을 제조했을까? 그 전통은 말할나위 없이 청동기시대의 기술에서 이어진 것이다. 이렇게 한국에서 만든, 오래 전통을 가진 청동합금을 필자는 한국청동이라 이름지었다. 그러나 내가 처음 쓴 용어는 아니다. 이상백(李相伯)이 그의 논문에서 조선시대 금속활자를 만든 청동을 한국청동(Korean bronze)이라고 쓴 일이 있다. 그러니까 내가 말하는 한국청동이란, 한국에서 만든 청동이라는 뜻의 보통명사가 아니고 학술용어로서의 고유명사를 의미한다.

이 한국청동을 조선시대에 흔히 '놋' 또는 '놋쇠'라고 부르던 청동합금의 총칭과 같은 개념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생각을 나는 늘 가지고 있다. 아직은 가설이지만.

한국청동의 역사는 매우 길다. 신라사람들이 신라동을 개발하기 훨씬 이전, 기원전 10세기 경의 청동기시대부터 그 기술은 시작된다.

그 때, 이 땅에 살던 무문토기인들은 어디서 누구에게 배워 어떻게 개발했는지, 특이한 청동합금을 만들어냈다. 문명의 선진지역이던 이웃 중국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합금이었다. 아마 그 청동합금기술은 오랜 세월에 걸쳐 축적된 이 땅의 청동기기술에 의해서 개발된 한국인의 창조적 산물일 가능성이 짙다. 물론 중국이나 북방계 기술의 영향을 배제할 필요는 없다. 교류는 자연스러운 것이고 마땅히 있어야 하므로.

그렇다고 해서 그 기술이 흘러 들어왔다거나, 한국인은 단지 그것을 받아들였다는 기술수용 쪽으로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중국에서 기원전 15세기 경에 돌연히 높은 수준의 청동기기술이 나타났다고는 인정하면서, 기원전 10세기 경에 한국청동기술이 한국인에 의해서 개발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될 이유가 없다. 다만 한가지 고고학적인 여러가지 사실을 미루어 볼 때, 한국의 아연-청동기술이 북방계 및 그밖의 문화와 관련시킬 수도 있다는 문제가 남는다.

고고화학(考古化学)이라는 학문의 한 분야가 있다. 고고학과 화학의 트기라 할 수 있다. 현재 고고학은 화학뿐만 아니라 과학·기술·산업의 모든 분야와 결합, 산업고고학·기술고고학으로 범위가 확대되어가고 있다. 아무튼 고고학은 이제 과학·기술적 실험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서는 해나갈 수 없는 학문이 되었다.

●- 고고화학에 의해 밝혀진 사실

중국이나 일본의 자료에 비하면 너무나 빈약하지만, 우리나라에도 이제는 유물의 실험적 자료가 조금씩 쌓여가고 있다. 그 중 몇 가지를 해석해 보자.

한 분석보고서에 의하면 나전(羅津) 초도(草島)의 초기 청동기시대 유적에서 발굴된 '달아매는 치레거리'(장신구)가 구리 53.93%, 주석 22.30%, 납 5.11%, 아연 13.70%, 철 1.29%, 기타 3.69%의 합금성분으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1969년 여름, 하버드대학 옌징연구소에서 나는 북한에서 나온 이 분석보고서를 읽고 깜짝 놀랐다.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번도의 기원전 10세기 경 유적에서 아연-청동합금이 나왓다는 보고는 쉽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같은 보고서는, 황해도 봉산군(鳳山郡), 송산리(松山里) 유적에서 나온 잔줄무늬 거울의 합금성분이 구리 42.19%, 주석 26.70%, 납 5.56%, 아연 7.36%, 철 1.05%이고, '주머니 도끼'(의식용 청동도끼)는 구리 40.55%, 주석 18.30%, 납 7.50%, 아연 24.50%, 철 1.05%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아연이 7.36% 24.50%씩이나 포함된 아연-청동합금이 만들어졌다는 말이 된다. 이 유물들이 발견된 유적들은 우리 고고학계에도 잘 알려진 곳이었다. 또 그 화학분석 결과를 믿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따라서 분석자료가 몇 개 밖에 안되는 것이긴 하지만, 우리나라 기술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발견이라고 여겨졌다.

그러나 이것은 청동기시대에 한국에서 만들어진 청동기 중의 특색있는 한 종류라는 뜻이지. 한국의 모든 청동기가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물론 여기서 한국이라고 말하는 지역도 오늘의 한반도의 영역보다 훨씬 넓은, 즉 옛 고구려 영토였던 중국 동북지방을 포함하는 땅이다.
 

녹그릇^경주국립박물관 소장
 

●- 중국과는 다른 뿌리

그리고 또 하나 분명한 것은 이 청동기기술이 중국의 청동기기술과는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가령 흘러 들어왔다고 하더라도 중국 이외의 다른 곳에서 온것이 거의 확실하다. 그 합금성분으로 볼 때 '한국청동'이 '중국청동'과 같은 기술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한국의 청동기가 중국의 청동기와 같지 않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청동은 구리와 주석의 합금이다. 동아시아 지역의 청동기에는 흔히 여기에 납이 더 포함된다. 한국의 청동기도 구리·주석·납으로 된 것이 많이있다. 그런데 우리가 '한국청동'이라고 부르는 구리 ·주석·납에 아연이 더 포함된 동합금은 중국에서는 한(漢)나라 이전에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송(宋)나라 때 까지도 드물게 나타날 뿐이다.

한국의 청동기가 중국의 청동기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몇가지 형식상의 특징이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비파형(琵琶形) 청동검이나 한국식 세형(細形) 청동검, 거친무늬거울(다뉴조문경, 多鈕細文鏡)이나 잔무늬 거울과 같은 청동거울은 그 대표적 예로 꼽힌다. 아무튼 아연이 함유된 것과 형식에서의 특징은 '한국청동'이 중국의 청동기와 다른 계통의 기술에서 생겨났다는 생각을 짙게 해준다. 한국 청동기에 대한 고고화학적 연구는 아직 시작단계에 들어섰다고도 할 수 없는 상태이다. 중국이나 일본은 이미 1910년대부터 청동기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이 사실은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생각하게 해준다.
 

한국식 청동검^B.C.3~B.C.1세기,세형(細形) 청동검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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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2월 과학동아 정보

  • 전상운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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