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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군함 비글호에 박물학자로 승선해서 항해하는 동안 남아메리카의 생물 분포, 그리고 과거 이 대륙에 서식했던 생물과 현존하는 생물 사이의 지질학적 관계에 대한 여러 사실들을 알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로 시작하는 ‘종의 기원’은, 1859년 11월 ‘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 or the Preservation of Favoured Races in the Struggle for Life’라는 긴 제목으로 런던의 존 머레이사를 통해 세상에 소개됐다.
 

다윈 종의 기원



요약서 형태로 출판된 불멸의 책

종의 기원은 초판 출간 당시 총 14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장 사육재배에서의 변이, 2장 자연에서의 변이, 3장 생존경쟁, 4장 자연선택, 5장 변이의 법칙, 6장 학설의 난점, 7장 본능, 8장 잡종, 9장 지질학적 기록의 불완전에 대해, 10장 생물의 지질학적 천이에 대해, 11-12장 지리적 분포, 13장 생물의 상호 유연·형태학·발생학·흔적기관, 14장 요약 및 결론이다. 1872년 6판이 발간되면서, 초판 이후 제기됐던 문제를 담은 별도의 한장이 첨가됐다.

다윈은 먼저 가축 사육이나 농작물 재배, 그리고 자연 상태 속에서 종의 변이에 대해 개관하고, 자신의 이론의 핵심인 생물군 내에서의 생존경쟁과 이에 따른 자연선택 및 적자생존의 개념을 설명했다. 이어지는 부분에서는 생물의 발달과 진화에 관련된 다양한 생물학적 법칙에 대해 서술하고, 이후의 장들에서는 지질학적 측면에서 자신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논의들을 전개했다.

종의 기원은 초판 1천2백50부가 단 하루만에 다 판매될 정도로 주목을 받았다. 또 엄청난 분량과 전문적인 내용에도 불구하고, 1872년까지 6판이나 인쇄됐던 것으로 볼 때 절찬리에 판매됐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설에 의하면 독실한 기독교인들이 진화론에 대한 내용을 일반 독자들이 읽지 못하게 하기 위해 대부분의 초판본을 구입했다고도 한다.

다윈은 1831년 케임브리지대를 마친 후 영국 해군 측량선 비글호에 박물학자 자격으로 동승해서, 이후 5년에 걸쳐 남아메리카와 남태평양의 여러 섬과 호주 연안 등에 대한 지질과 동식물 연구를 수행했다. 다윈은 당시의 자료를 정리해서, 1839년 ‘비글호 항해기’를 출판하기도 했다.

1842년 건강이 좋지 않았던 다윈은 잉글랜드 남부 켄트주에 정착해서 진화에 대한 생물학적·지질학적 자료수집에 몰두했으며, 1856년 종의 기원에 대한 집필에 착수했다. 그런데 1858년 6월 말레이 군도에서 표본수집가로 활약하던 월러스(A.Wallace)가 다윈에게 자신의 논문 검토를 요청해왔다. 월러스의 논문은 다윈이 오래 전부터 생각해오던 자연선택 및 적자생존과 거의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자칫하면 대발견의 명예가 월러스에게 고스란히 넘어가게 될 상황이었다.

다윈은 이미 1844년 친구였던 지질학자 라이엘(C.Lyell)과 식물학자 후커(J.O.Hooker)에게 자신의 이론에 대해 설명한 적이 있었다. 결국 다윈과 월러스는 공동저자로 논문을 린네학회에 제출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다윈은 많은 시간이 필요한 대저작을 집필하는 대신 그 내용을 요약·정리하는 일에 착수했고, 그 결과가 바로 종의 기원으로 나타났다. 즉 종의 기원은 과학적 발견의 우선권 논쟁이라는 배경 하에서 서둘러 집필된 일종의 요약서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인종차별의 논리적 근거로도 활용

종의 기원이 미친 영향은 생명진화론에 국한되는 것만은 아니었다. 생물학은 물론 철학, 사회학, 정치학, 경제학 등 거의 모든 학문영역과 인간의 사회상이 책의 광범위한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됐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19세기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종의 기원이 출간된 사실을 들고 있다. 지금도 세계 각국의 대형서점에 진열돼 있는 과학서적들 중 가장 많은 부분은 다윈과 그의 진화론에 관한 것이다.

과학의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진화론의 뿌리도 고대 그리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엠페도클레스 같은 자연철학자는 땅, 물, 바람, 불 4원소의 결합과 분리로 자연세계의 변화와 생멸을 설명했다. 아낙사고라스는 인간은 물고기 모양의 조상으로부터 유래했다고 설명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양한 생물들에 대한 분류체계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고등동물과 하등동물로 구분해서 그 관계를 설명하는 근대 이후의 진화사상과 이어진다.

이후 생명 진화와 관련된 철학적·과학적 발전은 꾸준히 이뤄졌다. 1753년과 1758년에는 스웨덴의 린네(C.von Linne가 식물과 동물의 종을 명명하고 분류하는 체계를 각각 발표했다. 한편 19세기로 접어들면서 동물의 진화에 대한 좀더 구체적인 학설이 제기됐다. 그 대표적인 예가 1809년 라마르크(J.B.Larmark)가 발표한 ‘동물학’과, 이후 소위 용불용설로 불리는 획득형질의 유전에 대한 그의 이론이다.

다윈의 진화론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가장 중요한 사상 중 하나는 맬서스(T.R.Malthus)의 ‘인구론’이다. 다윈은 이 책을 통해 진화의 메커니즘으로 ‘생존경쟁과 자연선택’이라는 아이디어를 얻었다. 또 비글호 항해기간 동안 읽었던 라이엘(C.Lyell)의 ‘지질학의 원리’도 그의 생각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종의 기원이 발표되자마자 종교계의 반발이 거세게 일어났다. 하지만 이전 시대에 비해 다윈의 진화론은 종교계의 반발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 배경에는 산업혁명기를 통해서 과학기술에 대한 신뢰가 높아졌던 사람들의 인식과, 자유경쟁을 통한 식민지 쟁탈이라는 ‘강자의 법칙’에 대한 유럽제국의 사회적 사고가 자리잡고 있었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진화론은 발표 이후 곧바로 스펜서(H.Spencer) 등에 의해 사회다윈주의(Social Darwinism)의 확산과, 당시 유행하던 강대국에 의한 식민지 쟁탈 경쟁 현상과 연결됐다. 그리고 왜곡의 정도가 심해지면서 인종차별과 사회우생학 등 사회적 병리현상도 나타났다. 생명현상에 대한 과학적 발견이 사회적으로 잘못 해석될 때 일어날 수 있는 심각한 위험성을 보여줬다는 의미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이 크다.


자연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과 애정의 소유자
 

다윈(C.R.Darwin, 1809-1882)


다윈(C.R.Darwin, 1809-1882)은 1809년 2월 12일 영국 서북부 쉴즈버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에라스무스 다윈은 진화론의 선구자 중 한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어린 시절 다윈은 자연세계에 많은 관심을 갖고 사냥과 채집에 열중했다. 1825년 에든버러대 의학부에 입학했으나 박물학에 열중하는 바람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1828년에는 케임브리지대에 입학해서 신학을 공부했으나 여전히 동식물학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케임브리지대 시절 지질학자 세지윅과 식물학자 헨슬로를 만나 큰 학문적 영향을 받았다. 이들의 추천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비글호 탐사에 합류하면서, 진화론의 토대가 되는 광범위한 관찰경험과 자료수집을 이룰 수 있었다. 1842년 런던 근교에 정착해서 1882년 4월 19일 사망할 때까지 특별한 직업을 갖지 않고 계속 은둔생활을 했다. 그의 동료이자‘다윈의 불독’이라는 별명을 가진 헉슬리는 다윈을 대신해‘종의 기원’출간 이후 벌어진 신학자들과의 각종 논쟁에 참여해서 진화론을 알렸다. 다윈은 종의 기원 이외에도, ‘비글호 항해기’(1839), ‘화산도의 지질 연구’(1845), ‘식물의 교배에 관한 연구’(1876)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2002년 07월 과학동아 정보

  • 송진웅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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