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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디스크는 오늘 무엇을 기억하는가

기억하는 주체로서의 컴퓨터는 자신의 존재 의미를 스스로 확인하고 주인에게 확인시킨다. 주인의 눈과 손을 통해서 일지언정 하나 하나 기억해 나가는 힘은 컴퓨터를 다른 전자제품이 범접할 수 없는 존재로 승격시킨다.


● ● 컴퓨터개론 가라사대 하드디스크는 보조기억장치라 칭한다하거늘, 왜 이 기계 부속이 ‘기록’이 아닌 ‘기억’이라는 단어를 갖게 됐는지는 뚜렷하지 않다. CPU가 지닌 치명적인 휘발성에 대한 오직 하나의 방어기재인 이 보조물이 CPU의 의식이 잠들기 전, 즉 전원이 차단되기 전의 상태를 대신 기억해 주지 못한다면, 우리는 매일 OS를 새로이 인스톨하면서 컴퓨터에게 지난날의 기억을 상기시켜야 할 터이다. 이 겪고 싶지 않은 상황의 암시는 영화 ‘메멘토’에서 읽을 수 있는 기억과 기록의 딜레마에 흡사하다.


● ● 새로운 기억을 더 이상 만들 수 없게 된 탓에, 자신 밖 세계가 영속적으로 존재한다는 믿음마저 잃어 가는 메멘토의 주인공은 메모와 폴라로이드, 그리고 문신으로 자신의 직관을 기록해 나간다.


● ● 그러나 기억은 간절한 기록으로도 수복될 수 없다는 깨달음 속에서 허우적거릴 뿐이다. 기억이란 오늘을 어제와 다르게 만드는, 오늘을 밟고 내일로 이를 수 있게 하는 절대절명의 통로인 것이다. 기억은 우리 머리 속에서 과거의 일과 상호연계성을 갖고 지속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바로 단편적인 기록과의 차이점이다. 메멘토의 주인공은 하염없이 자신의 몸과 메모지에 현재의 일을 기록했지만, 상호연계성으로 엮을 수 있는 기억이 아니기에 고통스러워한다. 기억하지 못한다면 지금 이 순간의 행위와 경험이 지속적인 의미를 지닐 수 있다고 감히 믿을 수 있을까.


● ● 시간의 틀을 넘어 지속적으로 의식할 수 있다면 의식은 지향성을 지닌다. 지향적인 의식, 즉 기억을 통해 세계와 자신은 서로에게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니, 기억하는 주체로서의 컴퓨터는 이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스스로 확인하고 주인에게 확인시킨다. 주인의 눈과 손을 통해서일지언정 하나 하나 세계를 기억해 나가는 힘이야말로 컴퓨터를 다른 전자제품이 범접할 수 없는 존재로 승격시켜 버린다.


● ● 이 보조기억의 메커니즘이 CPU의 보조가 아니라 인간, 그리고 나아가 사회의 보조기억으로 확산될 때 컴퓨터의 숨겨진 가능성이 개화한다. 흥미로운 것은 여기서 보조란 뜻이 이미 기억하고 있는 것에 대한 보조가 아니라, 기억될 또는 기억 가능한 모든 상황에 대한 보조자의 역할을 암시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 ● 연간 2억대씩 쏟아져 내리는 하드디스크들은 내일을 향해 무엇을 기억하려 하는가. 마이크로소프트의 게임기 ‘X-Box’는 거실용 게임기로서는 이례적으로 하드디스크를 내장하고 있다. 사전에 규정된 최면에 따르면 그만이었던 전자적 유희가 기억의 희열을 맛보게 된 것. 어제까지 이 유락 시설에는 존재조차 하지 않았던 처음 만나는 새로운 캐릭터, 미지의 레벨을 오늘 기억하고 또 내일로 이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게임기를 켰다 끄면 사라졌던 과거의 게임에서 한단계 진보해 나의 캐릭터를 기억하고 성장시킬 수 있는 ‘기억할 수 있는’게임기가 탄생한 것이다.


● ● 미국과 일본에 퍼지기 시작한 가전 신제품 AV 하드디스크 레코더는 기억이란 집착과 무관하게 망각되는 것이라는 기억의 본질을 파고든다. 기억이란 기록이라는 편린으로 잠시 내보내는 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무궁한 영역임을 알아차린 것일까. 하드디스크 레코더는 지정한 만큼 기록하는 녹화기의 틀을 벗어나 하드디스크의 본능에 따라 기억을 감행한다. 백그라운드에서 시청자가 보고 있는 영상을 기억하고 있다가 주요 장면을 되돌려 보여주는 기억력이나,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수신해 사용자의 취향과 선택에 의해 볼만하다 생각되는 프로 전부를 대신 기억해 주는 눈썰미 등 이제 한낱 가전조차도 단편적인 기록의 보조자에서 포괄적인 기억 주체로 탈바꿈한다. 책장을 메우던 녹화된 테이프들은 결국 찰나적인 기록에 불과한 것임을, 기억이란 어차피 백업 불가능한 것임을 기록 아닌 기억을 하는 기계 AV 하드레코더는 가르쳐 주고 있다.


● ● 카 네비게이션 또한 기억의 길에 접어든다. 길눈이 밝다 어둡다라는 말은 결국 무엇인가. 공간지각을 통한 기억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던가. 신형 카 네비게이션 시스템은 수십GB의 기억공간을 활용, 새로운 정보를 기억해 길눈을 밝혀준다. 사용자를 통한 보조기억 이외에도 PC나 핸드폰 등이 눈과 귀가 돼 인터넷이라는 세계에 대해 기억의 촉수를 뱉는다. 새로 개업한 주유소나 편의점을 기억하는 일을 운전자 대신 카 네비게이션 시스템이 해주는 것이다. 기억은 이처럼 그 한계점을 네트워크 너머로 밀어낸다. 무한 팽창하는 하드디스크와 이를 다스릴 신경세포인 컴퓨팅 파워의 창궐은 더욱 많은 분야에 기억의 복음을 파급한다. 어느새 뇌세포처럼 퍼져 얽히고 얽혀 21세기사회 전체에게 방대한 기억이라는 지향적 의식을 심어 버린 이 공산품은 분해되면 메탈 플래터 몇장을 장식품으로 남긴다. 하드디스크가 담았던 고민의 기억도 추억도 결국은 파티션 장식에나 어울릴 살풍경한 철판 몇장으로 분해될 뿐이니 이 역시 삶이라는 기억이 다다를 곳과 흡사하지 않은가.

2002년 07월 과학동아 정보

  • 김국현 e-칼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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