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와 인간의 싸움으로 지구의 태양은 이미 사라졌고, 인간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기계는 자신만의 시스템 안에서 사람을 지배한다.’
영화 ‘매트릭스’의 배경이다. 영화 속 얘기처럼 과연 기계들은 사람의 도움 없이 자기 스스로 시스템을 만들어 인간을 지배할 수 있을까. 또 기계는 변하는 환경에 스스로 적응할 수 있을까. 아직까지 이런 질문은 먼 미래나 SF 영화 속의 상상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최근의 인공생명 연구를 살펴보면 하드웨어의 진화 가능성에 대해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다. 여기에는 크게 하드웨어 자체가 진화하는 경우와 생명체의 특성을 가진 미니 로봇 연구가 있다.
환경 따라 변하는 논리회로
진화는 기본적으로 유전적인 변화를 수반하는 자기복제 과정이다. 따라서 하드웨어를 진화시키기 위해서는 자신을 복제하고 유전적 변이를 적용할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하다. 바로 ‘재구성이 가능한 하드웨어’(reconfigurable hardware)다.
진화 하드웨어에 대한 생각은 진화 알고리즘으로 소프트웨어(프로그램)를 진화시키는 연구에서 비롯됐다. 프로그램을 변경해 새로운 기능을 갖도록 하는 소프트웨어의 진화처럼 형태나 구조를 스스로 바꿔 새로운 기능을 갖는 하드웨어로 진화시킨다는 생각이다. 1992년 스위스의 톰슨 박사와 일본의 히구찌 박사는 독자적으로 진화 하드웨어에 대한 가능성을 발표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에 대한 관심은 더욱 커졌고, 마침내 1995년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첫번째 국제 워크샵을 계기로 진화 하드웨어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됐다.
재구성 가능한 하드웨어는 환경의 변화나 오차를 이용해 전자회로인 하드웨어가 그 구조를 자율적으로 바꿔, 구조는 물론 기능까지 복잡하고 다양화되는 반도체 집적회로를 말한다. 따라서 복잡한 반도체 제조공정을 거치지 않고도 다양한 구조의 반도체를 직접 만들 수 있다. 특히 이 시스템은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고 결함을 스스로 복구할 수 있는 하드웨어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어 주목받고 있다.
재구성 가능한 하드웨어의 대표적 예는 미국의 자이링스(xilinx)사가 개발한 ‘FPGA’(Field Programmable Gate Array)칩이다. FPGA는 커다란 기판(board) 위에 입력부와 출력부, 그리고 중앙에 위치한 반도체칩 등으로 구성돼 있다. 언뜻 보면 보통의 컴퓨터 기판과 비슷한 모양이지만 아직 아무런 기능을 수행하지 못한다. 각 요소와 중앙연산장치를 연결하는 논리회로가 아직 구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회로는 외부에서 소프트웨어적으로 구성된다. 프로그래머가 논리회로를 구성하는 정보를 입력하면 기판의 메모리칩에서 이를 받아들여 필요한 게이트만 연결한다. 바로 이 점이 진화 하드웨어의 핵심이다.
FPGA는 외부에서 하드웨어를 구성할 수 있도록 각 부분이 셀 단위로 이뤄져 있다. 이런 구조는 그때그때의 환경에 따라 논리적 연결을 바꿀 수 있는 유연성을 제공한다. 외부에서 논리회로의 연결정보만 입력하면 각 구성요소끼리의 연결은 FPGA 내의 메모리칩이 결정한다. 만약 환경이 바뀌어 논리회로를 바꿀 필요가 있다면, 외부에서 이전의 논리회로 정보와는 다른 정보를 입력해 게이트의 연결 구조를 바꾼다. 이를 위해 FPGA에는 각 회로의 연결이 바뀔 수 있도록 여유분의 게이트가 충분히 있다.
이 과정을 통해 각 회로들이 위치를 잡게 되는데, 이 위치가 어디냐에 따라 속도에 현저한 차이가 날 수도 있다. 최근에는 진화 알고리즘을 이용해 각 회로의 최적 위치와 구조를 찾고 있다.
칩 속으로 들어간 진화 프로그램
FPGA칩을 이용한 진화 하드웨어의 구축은 진정한 의미의 인공생명이라 할 수 없다. 하드웨어가 좀더 나은 논리의 흐름을 따라 ‘진화’하기는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도움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드웨어가 스스로 주변 환경을 인식하고 이에 자신을 적응시켜 나가는 진정한 의미의 진화 하드웨어는 ‘GAP’(Genetic Algorithm Processor)다.
GAP는 논리회로를 외부의 프로그래머가 설계하는 것이 아니라 하드웨어에 내장된 진화 알고리즘을 통해 직접 수행할 수 있도록 설계된 칩이다. FPGA칩이 각 구성요소의 최적 연결 루트를 외부의 프로그래머가 입력하는데 반해, GAP는 최적 루트를 칩 내부에서 결정할 수 있도록 진화 알고리즘이 내장돼 있는 것이다. 이는 GAP를 끊임없이 좀더 효율적 구조를 갖는 하드웨어로 진화시킨다.
진화 하드웨어는 우주선의 생명력을 늘리는데 사용되고 있다. 미 항공우주국(NASA)에서는 진화형 우주시스템을 연구중인데, 이 중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이 진화 하드웨어다. 우주선의 각종 기능을 제어하는 프로세서들은 미지의 우주공간에서 급격한 온도나 습도 등의 환경 변화로 오동작을 일으킬 수 있다. 이때 진화 하드웨어칩을 이용하면 사람이 수리하거나 교체할 필요없이 자체적으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우주시스템을 만들 수 있다. 또한 우주정거장이나 인공위성에 새로운 임무를 부여할 때도 진화 하드웨어칩을 이용하면 번거로운 과정 없이 새로운 기능을 부여할 수 있다.
또한 진화 하드웨어칩은 디지털 이동통신 분야에도 없어서는 안될 핵심 기술이 될 전망이다. 디지털 통신에서 중요한 문제 중 하나는 수신 과정 중 망가진 신호를 복구하는 기술인 ‘채널 균등화’(channel equalization) 문제다. 디지털 통신은 정해진 대역 내에서 신호를 주고 받지만 정보를 보내는 환경이 계속해서 변하기 때문에 일부 신호는 제대로 수신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때 진화 하드웨어 칩을 이용하면 환경에 따라 변하는 디지털 정보도 깨끗이 복구할 수 있다.
전체가 부분의 합보다 크다
인간을 닮으려는 로봇의 노력은 마지막으로 인간의 지능까지 넘보고 있다. 인간의 지능을 모방하려는 로봇 연구는 인공지능 분야에서 시작됐다. 20년 전 인공지능 연구자들은 가까운 미래에 지능을 갖춘 로봇이 출현해 산업현장이나 인간의 생활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스스로 판단하며 결정하고 자신의 상태를 점검할 수 있는 로봇은 개발되지 않았다.
최근 인공생명 연구자들은 ‘하향식’ 인공지능과는 대비되는 방법으로 지능로봇을 연구중이다. 생명체에 내재된 행동원리와 규칙을 모방해 로봇을 제어하려는 생각이다. 자연계의 벌이나 개미와 같은 곤충, 그리고 무리를 지어 다니는 새나 물고기 등의 협조행동을 모방해 기능이 비교적 단순한 소형로봇들의 집단행동을 실현시킨 것이 좋은 예다.
인공생명으로 구현한 로봇은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첫째 적응능력과 학습능력을 갖는다. 지능로봇은 예측하지 못한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사전에 짜여진 완벽한 계획이 없어도 즉각적으로 대처한다. 또한 환경에 좀더 적응한 개체로부터 이 행동을 학습한다. 따라서 설계자는 완벽한 사전계획보다는 로봇 스스로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 주는 것이 필요하다.
둘째 창발적 행동을 보인다. 창발적 행동이란 ‘전체가 부분의 합보다 크다’라는 말로도 표현되는데, 생명체가 가진 여러 특성 중 하나다. 로봇개체 간 또는 환경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새로운 행동을 보인다는 말이다. 즉 단순한 행동을 하는 여러 개체가 주위의 환경과 상호작용함으로써 각 개체에 존재하지 않는 새롭고 복잡한 행동을 보이는 것이다.
뭉치면 못할 것 없다
영화 ‘스몰 솔저’를 보면 자그마한 장난감들이 무리를 지어 정보를 수집하거나 건물 내로 침입해 서로 간의 협조로 가공할 전투력을 보이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 속에서나 가능한 상상이 조만간 현실로 실현될 가능성이 크다. ‘자율분산 로봇시스템’(distributed autonomous robotic system)이 개발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대의 로봇이 서로 협조해 혼자서는 해결하기 어려운 일을 수행하며, 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운 곳에서의 작업도 훌륭히 해내는 형태다.
자율분산 로봇시스템을 구성하는 개개의 로봇은 자율적으로 주위 환경이나 다른 로봇의 행동을 인식한다. 또한 다른 개체와 협조가 이뤄지도록 자신의 행동을 자율적으로 결정한다. 그럼으로써 시스템 전체의 목적을 달성하는 지능시스템이다.
여러대의 로봇에 의해 나타날 수 있는 행동범위는 너무 넓고 예측이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로봇축구와 같은 분야에서 사용되고 있는 중앙장치를 통한 제어방식은 문제해결에 바람직하지 않다. 하나의 중앙제어장치보다는 각 개체마다 분산된 제어장치를 통해 시스템 전체를 통합하는 편이 훨씬 유리하다.
자율분산 로봇은 크게 세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통신부와 이동부, 그리고 중앙처리부다. 로봇은 중앙시스템으로부터 통제받는 것이 아니라 주변 상황과 가까이 있는 로봇의 정보만 인식해 행동한다. 여러대의 자율이동로봇으로 협조작업을 수행할 경우, 로봇 간의 통신이 반드시 필요하다. 만약 통신을 사용하지 않고 높은 수준의 협조행동을 실현하려면 상대의 행동을 미리 예측하는 추론기능이 필요하다. 이는 개체의 복잡성을 한층 더 가중시키며 유용한 정보를 다른 로봇에게 전달하지 못해 작업효율을 떨어뜨린다. 정보교환 방법에는 적외선 무선통신이 많이 이용된다.
자율로봇의 통신부에서는 자신의 상황과 주변 로봇의 정보를 끊임없이 주고받는다. 이같은 지역 통신방법은 불필요한 정보의 범람을 막을 수 있고, 간섭현상도 생기지 않으므로 대규모의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안성맞춤이다. 통신 정보는 중앙처리부로 들어가 로봇의 다음 행동을 결정한다. 중앙처리부는 자율분산 로봇의 제어방식이 입력되는 부분으로 인공생명 로봇의 핵심이다. 여기에 입력되는 제어방식은 크게 진화 알고리즘(Genetic Algorithm)과 강화학습(Reinforcement Learning), 그리고 인공면역계(Immune Networks)가 있다.
새로운 진화 개념 면역시스템
진화 알고리즘을 이용한 자율분산 로봇으로는 스위스에서 개발된 ‘케페라’(Khepera) 시스템을 들 수 있다. 케페라는 기능이 비교적 단순하지만 센서를 통해 주변의 정보를 인식하고 다른 개체와 협조행동을 할 수 있는 자율이동 로봇시스템이다. 케페라 로봇은 목적지를 향해 각자 이동하지만 곧 주변 로봇과의 통신을 통해 결과적으로 무리 전체의 통일된 행동을 보여준다(그림). 중앙제어장치에 진화 알고리즘이 쓰였기 때문이다.
어떤 한 로봇이 목적지를 향하는 가장 빠른 루트를 찾았다면 이 정보는 이웃 로봇에 전해진다. 이웃 로봇은 행동을 규정하던 이전의 명령과 새로운 정보를 비교해 좀더 나은 정보를 ‘선택’한다. 이렇게 ‘진화’된 새로운 명령은 시스템 내에 살아남아 또다른 로봇으로 전파된다. 비록 케페라의 외적인 모양은 인간과 거리가 있지만, 인간 두뇌의 정보처리 기능을 이용해 지적인 행동시스템을 구현한 것이다.
진화 알고리즘에 강화학습을 도입하면 시스템은 한층 더 ‘똑똑’해진다. 제어장치 내에 로봇의 행동결과에 따라 ‘보상’이나 ‘벌칙’을 가하는 규칙을 심어놓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로봇은 보상을 많이 받는 쪽으로 자신의 행동규칙을 갱신해 나간다. 또한 시스템 내에서 자신보다 학습이 잘된 로봇을 만났을 경우, 통신을 통해 서로의 정보를 교환해 보상을 많이 받는 쪽으로 진화한다.
최근에는 생물체의 면역 시스템을 모방해 로봇의 자율행동을 구현하려는 인공면역계 연구가 진행중이다. 생체의 방어체계인 면역 시스템은 박테리아나 병원균, 바이러스 등 외부 침입자(항원)의 공격에 대해 생체를 방어하는 매우 정교하고 복잡한 시스템이다. 면역계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는 B 세포와 T 세포로서, B 세포는 항체를 분비하는 체액성 반응을, T 세포는 면역에 관련된 세포를 자극하거나 억제해 감염된 세포를 죽이는 세포성 반응을 주로 담당한다. 이들 B 세포와 T 세포는 약 ${10}^{16}$ 정도의 외부 분자를 구별할 수 있다. 이는 인간의 유전자가 ${10}^{5}$종류의 항체를 암호화하고 있다는 사실로 미뤄볼 때 매우 놀라운 점이다. 즉 항체는 특정 항원에 대해 정해진 구조를 갖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항원에 따라 자신의 구조를 바꾼다는 의미다. 또한 면역계가 중앙의 제어기관 없이 온몸에 걸쳐 분산돼 있다는 사실(자율분산 시스템)도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자율분산 로봇의 주변 환경을 항원, 로봇을 B세포, 행동 전략을 항체로 대응시키면 자율분산 시스템을 좀더 효율적으로 설계할 수 있다. 미지의 환경(항원)에 끊임없이 자극(공격)을 받는 로봇(B세포)은 이에 적당한 행동 전략(항체)을 개발한다. 최종적으로 가장 자극을 많이 받은 로봇의 행동 전략이 시스템 전체의 전략으로 결정된다. 이 방법은 아직 구체적으로 개발된 것이 아니라 개념 수준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그 응용가능성 만큼은 무궁무진해 보인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인공생명 로봇은 아직 그 구체적 성과물이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인공지능의 한계를 극복하고 생물체에게 좀더 가까이 다가서려는 인공생명 로봇은 인간의 위치와 역할을재검토할 것을 강력히 요구한다. 복제양 돌리에 이은 복제인간의 가능성, 외계에 지능을 가진 생명체가 존재한다는 일부 과학자들의 주장과 함께 인공생명은 다음과 같이되묻고 있다. 생명이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