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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허준의 행적을 들춰내려 할까

우리 민족의 생로병사 밝혀가는 한국의학사

우리 민족의 의학은 어느 정도였을까. 구한말 서양의학은 어떻게 도입됐을까. 우리 민족의 생로병사는 어땠을까.한국의학사 학자는 이런 질문에 답을 찾아나가면서 현대인과 우리 조상의 간격을 메꿔가고 있다.


“허준이 스승 유의태로부터 의학의 진수를 배운다. 또 병들어 죽을 수밖에 없는 스승의 시신을 해부해 의학의 진전을 이룬다. 과거(의과)에 급제해 어의가 된다. 왕과 왕자를 고친 공로로 정1품에 해당하는 보국숭록대부라는 최고의 벼슬을 얻는다. 매실을 써서 역병에 신음하는 환자를 구한다.”

이런 내용은 ‘소설동의보감’이나 드라마 ‘허준’을 수놓은 훌륭한 소재들이다. 하지만 놀라지 말자. 이 중 어떤 것도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동의보감에 그려진 신형 장부도는 너무 간단해, 인체를 해부하지 않 았다는 증거가 된다.



동의보감의 진정한 의미

어떻게 이를 증명할 수 있을까. 역사학자는 남아있는 각종 문헌과 유물을 통해 과거의 역사적 사건을 재구성한다. 지난 10여년 동안 필자를 포함한 몇몇 과학사·의학사 학자는 허준의 행적과 의학에 관심을 두고 연구했다. 그 결과, 연구자들은 위 사례 중 어떤 것은 완전한 허구이고, 어떤 것은 신빙하기 힘든 자료에 근거하고 있으며, 어떤 것은 사료를 잘못 해석한 것임을 밝혔다.

예를 들어 허준의 시체 해부는 소설 작가가 지어낸 이야기이다. 허준의 스승인 유의태라는 인물은 허준 사후 민간에서 떠돈 야담에서 끄집어낸 인물이다. 허준의 과거 급제는 양천 허씨 족보에 그렇게 적혀있지만, 허준의 실제 활동을 적은 유희춘의 ‘미암일기’란 책에서는 천거로 내의원에 들어간 것으로 암시돼 있다. 즉 후대에 작성된 족보가 잘못 적힌 것이다. 허준이 정1품 보국숭록대부를 받은 것은 ‘선조실록’에 나와 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 벼슬은 취소됐다. 매실이란 소재는 그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으며, 드라마 자문을 맡은 한의학자가 “자신이 임의로 삽입한 것”이라고 밝혔다.

물론 허준에 대한 연구는 이런 잘못을 꼬집기 위한 것이 아니다. 워낙 소설과 드라마의 파급력이 커서 너무나도 많은 사람이 역사적 사실과 허구를 구별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논의가 필요했던 것이다.

진실로 한국의학사를 연구하는 학자가 반드시 물어야 할 내용은 ‘과연 허준과 동의보감이 얼마만큼 역사적 가치가 있는가’라는 점이다. 한의사가 민족의학의 대표저작으로 ‘동의보감’을 꼽고 있고, 수많은 의사가 허준을 모범으로 삼으며, 심지어 지하철 행상까지도 ‘동의보감’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누구도 이 문제에 시원한 답을 내리지 못했다.

필자와 몇몇 한국의학사학자들이 이 문제에 덤벼들었다. 각종 중국의서와 한국의서를 비롯해 허준의 모든 저작, 허준이 살았던 시기의 각종 기록을 읽었다. 그래서 얻은 결론은 다음과 같다. ‘동의보감은 한국 최고의 의서이며, 이후 조선의학계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또한 중국에서도 30여 차례 이상 찍힐 정도로 경쟁력을 갖춘 의서였다. 그 경쟁력은 허준이 그때까지의 의학의 정수를 추려내어 담았기 때문이다. 이런 작업이 가능했던 것은 허준이 병을 중심으로 보던 의학을 인간의 몸을 중심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말해 17세기까지 중국과 조선 의학의 위대한 정리가 ‘동의보감’을 통해 이뤄진 것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병원인 제중원을 세운 미국 기독교 선교사인 알렌(맨 오른쪽) 이다.



서양의학 도입에 대한 신화 두가지

현대 한국에는 서양의학의 도입과 관련된 두개의 신화가 있다. 그 하나가 ‘알렌 신화’이다. 그 신화는 ‘알렌과 미국 기독교 선교사가 조선에 서양의학을 가져다주고 그것이 이후 한국의학의 뿌리가 됐다’는 내용이다. 미국과 기독교의 근대적 은총을 핵심으로 하는 ‘알렌 신화’는 후대 한국의 교회사 연구자들이 알렌의 일기와 자서전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다른 하나는 ‘지석영 신화’이다. 이 신화는 ‘조선인 지석영이 일본의 도움을 받아 조선 최초로 우두법을 익혀 전국에 퍼뜨렸다’는 내용으로 이뤄져있다. ‘지석영 신화’는 1920년대 말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 통치자가 ‘조선 우두법 도입’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냈다. 일본이 조선의 우두법 도입에 결정적인 조력을 한 사실을 부각시켜, 식민지 통치의 정당화를 선전하기 위해서였다.

필자는 한국의학사를 공부하던 중 폭넓게 자료를 접하면서 알렌과 지석영에 대한 평가에 의문을 품게 됐다. 물론 그분들의 훌륭한 행동을 일부로 깎아 내리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분들의 훌륭한 점을 강조하기 위해 다른 역사적 사실이 무시되거나 왜곡된 점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두 신화는 공통적으로 개인의 활동을 지나치게 부각했으며, 그 결과 조선 정부의 활동이 철저히 무시돼 있다. 필자는 여기에 식민사관의 잔재가 깔려 있다고 보았다. 즉 ‘한말 조선 정부는 무력했고 그렇기 때문에 나라가 망할 수밖에 없었다’는 인식이 숨어있는 것이다.

이처럼 한말 조선 정부는 무력하기만 했을까. 실제로 당시의 자료를 살펴보면 알렌의 제중원 설립이나 지석영의 우두법 시행은 조선 정부 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됐음을 알 수 있다. 개항 이후 조선 정부는 서양식 병원 설립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며, 그것이 알렌과 미국 선교회의 도움이라는 형태로 실현됐던 것이다. 지석영은 조선 정부 수신사 수행원으로 포함돼 일본에 가서 우두법을 학습했으며, 조선 정부의 강제적인 종두법 사업의 주도자가 됐다. 알렌이나 지석영의 ‘영웅적인’ 활동이 깜깜한 어둠 속에서 홀로 빛을 발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또 미국이나 일본이 가져다준 것도 아니었다. 비록 조선 정부가 최선의 길을 찾아간 것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근대 서양문물 수입에 관심과 열정을 기울였고, 알렌이나 지석영의 행위가 그 안에 포용돼 나타났던 것이다.

알렌과 지석영의 사례는 한말 ‘서양과학의 수입을 어떻게 볼 것이냐’는 주제와 관련된다. 필자는 이 시기에 서양과학 수입에 성공하지 못했다고 본다. 과학을 연구할 수 있는 대학 설립도 없었고, 변변한 과학자도 길러내지 못했다. 과학 관련 기관도 만들지 못했고, 전문적인 과학 내용에 대한 지식과 정보도 어두웠다.

하지만 이조차도 이전과는 크게 다른 것이었다. 규모가 아주 크지는 않았지만 국가병원인 제중원(1885), 그리고 과학 교육기관인 상공학교(1899)와 의학교(1899)가 설립됐다. 우두법의 경우에는 1885-1890년 사이에 온 국토를 대상으로 해서 모든 어린이를 대상으로 강제접종이 실시되기도 했다. 이런 모든 일이 당시 선진국에 비해 턱도 없이 부족한 것이었고, 크게 체계적이지도 조직적이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서양 과학의 도입과 정착을 위해 조선 정부가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장애가 됐다고 보는 것은 그릇된 것이다.
 

선조들의 일상생활사 속에서 생로병사의 흔적을 찾는 일은 현대인과 옛 조상의 간격을 메우는 작업과 같다.
 


현대인과 조상의 간격 메우는 작업

생물학적 개체인 사람은 생물학적인 생장과정과 생물학적인 질병 과정을 겪는다. 즉 태어나서 자라고 아프고 늙고 죽는 생로병사를 말이다. 의학은 이 모든 것을 학문의 대상으로 삼는다. 아이를 어떻게 낳았는지, 어떤 병을 앓았는지, 병과 늙음과 죽음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병을 고치고 노화를 막기 위해 어떤 방법을 썼는지 등등. 오늘날 우리도 이를 겪고 있지만, 우리의 선조도 이를 겪었다. 하지만 과거와 현재의 생로병사 문화는 사뭇 다르다. 과거의 문화는 우리에게 수수께끼가 돼 버렸다. 지난 1백년 간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그토록 익숙했던 것들이 이국의 문화처럼 낯선 것이 됐다.

의학의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은 인생의 생물학적 생활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진다. 이런 학자 중에는 허준이나 지석영과 같은 몇몇 영웅의 삶보다 풀뿌리 보통사람의 삶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더 많다.

필자도 관심을 기울이는 연구 주제 중 하나가 바로 조상의 생로병사에 관한 내용이다. 현재까지 공부한 주제로는 선조의 평생 문화, 태산(아이를 낳는 것) 문화, 양생(건강을 지키는 것) 문화, 질병과 치병 문화 등이 있다. 조상이 어떻게 태어났고 어떤 병을 앓았는지에 관한 연구 성과를 읽으면서 문득 자신의 삶을 생각하게 된다. ‘음, 나는 어떤 병원에서 태어났지, 내가 어렸을 때에 어떤 병을 앓았지, 나는 지금 어떻게 건강관리를 어떻게 하고 있지, 우리 부모님이 몇살 때 어떤 병으로 돌아가셨지….’ 더 나아가 내가 현재 살고 있는 삶도 후대의 역사가에게 좋은 관심거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역사적 존재로서 ‘나’를 다시금 돌아볼 수 있다.

조상의 평생 문화에는 평균수명, 노화에 대한 인식, 좋은 일생에 대한 관념, 일생을 지배한 운명론 등이 포함된다. 조선말 조선인의 평균수명이 20세 남짓에 불과했다는 사실은 연구자로서 필자도 놀랐던 사실이다. 영·유아사망률이 끔찍하게 높았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또한 삶의 조건이 좋지 않다보니, 체념과 운명론이 한 개인을 감싸고 있었다.

태산 문화에 관한 것으로는 조선 여인의 임신, 출산, 태교, 피임, 그리고 낙태를 연구했다. 특히 20세기 초반 일본인 민속학자가 찍은 한장의 사진이 필자를 충격에 빠뜨렸다. 어렸을 때 하던 말타기 놀이와 비슷한 자세로 아이를 낳는 장면이었다. 이렇듯 누워 낳지 않고 쪼그려 낳는 것이 조선여인의 일반적인 자세라는 설명이 덧붙어 있었다. 생각해보니, 이 자세가 누워 낳기보다 한결 쉽게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 임신 중 여아를 남아로 바꾸는 ‘전녀위남법’(轉女爲男法)도 필자의 관심을 끌었다. 이 전통이 무려 2천년 전 중국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조선 전기에는 이와 반대인 남아를 여아로 바꾸는 전남위녀법이 소개돼 있었지만, 17세기 이후에 사라진 사실을 확인했다. 이때쯤 우리의 남아선호사상이 완전히 굳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양생문화는 건강관리법이다. 오늘날의 우리 못지 않게 우리 조상도 건강관리에 신경을 썼다. 이퇴계는 매일같이 도인체조법을 시행했고, 홍의장군 곽재우는 밥을 안먹고 솔잎을 먹는 벽곡법을 실천했다. 정약용은 자신의 건강 비결로 일종의 안마법과 냉천욕을 추천했고, 정렴이란 분은 단전호흡법을 많은 사람이 알기 쉽게 풀이했다. 이밖에도 조선의 선비는 건강관리술로 방중술에 관심이 높았는데, 쾌락보다는 엄격한 절제를 강조했다.

질병과 치병 문화는 의학사 연구의 핵심 주제다. 조상이 어떤 병을 가장 많이 앓고, 어떤 병으로 가장 많이 죽었는지, 병에 대해 어떻게 대응했는지가 그 내용이다. 조선시대 전체를 통해 가장 심각했던 질병은 천연두(마마 또는 두창)였다. 아이가 일생에 반드시 한번은 걸린다하여 백세창(百世瘡)이라고 부른 이 병은 발병률도 높았고, 발병자의 30% 내외가 죽었다. 종두법이 수입되기 전까지 이 병에 대한 효과적인 의학이 없었기 때문에 무속적인 방법이 주류를 이뤘다. 손님이니 마마니 하는 명칭도 두창신(痘瘡神)을 달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못지 않게 중요한 병은 각종 전염병들이 혼재된 이른바 역병이었다. 조선말에 처음 유행한 콜레라의 예를 들면, 한해 유행에 수십만명이 이 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이런 역병과 함께 조선 사람은 많은 질병을 몸에 달고 살았다. 누구나 기생충을 몸 안에 가지고 있을 정도였으며, 학질이나 안질 또는 매독 같은 성병도 흔했다.

사실 ‘우리’라는 말은 비단 지금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만을 지칭하는 개념이 아니다. 비록 얼굴을 맞대고 살아가지는 않더라도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삶을 일궈왔던 옛 사람들까지도 포함하는 넓은 개념의 말이다. 따라서 ‘우리’의 정체성은 옛 사람들과 지금 사람들의 이해와 공감에 기초해 이뤄지는 것이며, 생로병사 문화는 우리가 공유해야 할 가장 원초적인 부분이다. 한국의학사 연구는 이 부분에서 현대인과 옛 조상의 간격을 메우는 작업을 주요 목표로 하고 있다.


의약분업 논쟁 이해의 밑거름

지금까지 한국의학사 연구의 몇가지 사례를 들었다. 그러나 이것이 한국의학사의 전부가 아니다. 하지만 이를 통해 한국의학사의 중요한 세가지 측면인 의학, 의료제도, 의료문화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허준 연구는 한국 전통의학의 확립과 성취를 이해하는 실마리다. 한국의 의학 전통은 고조선 때로 거슬러 올라가며, 그것은 허준의 의학을 거쳐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허준에 대한 좀더 심도 깊은 연구는 물론이거니와 그 이전과 이후 의학에 대한 상세한 연구가 필요하다. 이를테면, 한국의학의 기원, 중국의학의 수입과 정착, 독자적인 의학의 발전, 서민을 향한 의학의 확산, 한국의학의 동아시아 의학에 대한 기여 등이 포함된다.

알렌과 지석영 사례는 한국 근현대의학사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개화기 때부터 서양의학을 도입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조선 정부와 조선인에 의해서 이뤄졌다. 일본이나 미국 같은 열강의 관계 속에서 말이다. 일제시대에는 비록 선진적인 병원이 세워지고, 일본인 의사가 대거 활동하기는 했지만, 조선인의 의학교육과 연구인력 양성은 철저히 억제됐다. 해방 이후에는 전염병 관리, 의료기관의 확산, 의학교육의 활성화 등이 이뤄졌으며, 이는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최근의 한약분쟁, 의약분업 논쟁에서 볼 수 있듯이 적지 않은 의료문제가 존재하고 있다. 이는 역사적 산물이기도 하다. 지난 1백년 간을 통해 우리의 의학과 보건의료가 어떻게 변천해왔는가를 연구하는 것은 최근의 문제를 올바르게 이해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다.

최근 역사학계에서는 일상생활사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몇몇 영웅의 역사가 아닌, 몇몇 기관과 제도의 변천이 아닌, 보통사람들의 생활방식에 대한 역사가 진정한 역사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다.

의학의 역사 연구는 이런 일상생활사적 관심에 가장 부합되는 분야다. 왜냐하면 의학사가 바로 생로병사를 다루고 있으며, 생로병사가 바로 가장 중요한 일상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여러 사례를 들었지만 그것은 수많은 일상생활 가운데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출산과 육아, 건강과 질병, 역병과 치병, 의학과 의료, 늙음과 죽음, 사후세계와 운명론 등에 대한 더 많은 내용을 담아내야 할 것이며, 그것을 체계적으로 정리해야 할 것이다.

세계적인 차원에서 의학사 연구의 흐름을 보면, 세가지 변화 단계가 있었다.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세계 의학사의 주요 연구는 훌륭한 의학자와 그들의 의학적 성취에 관한 내용이었다. 히포크라테스, 갈렌, 베살리우스, 하비, 비샤, 비르효, 파스퇴르, 코흐 등 인물 연구가 주를 이뤘다. 한국의학사의 경우 허준에 관한 연구가 여기에 해당한다.

20세기 중반 이후에는 의학과 사회에 대한 관심이 새로 부각됐다. 여러 기관과 제도에 대한 연구가 잇달았다. 또한 사회 속에서 의료의 역할이 어떠했는가를 물었다. 한말 조선에 서양의학이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가 여기에 속한다.

최근에는 일상생활사적 관점이 추가됐다. 역사 속에서 보통사람들이 병고와 의료 생활에 어떠했는가를 묻는 것이다. 즉 의학이 의학자와 의사라는 직업의 전유물이 아니라, 앓고 있는 환자와 시민이 중심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명제가 비로소 회복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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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06월 과학동아 정보

  • 신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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