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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공계 기피 원인 지표 뒤집기

보수와 비전에 대한 오해와 편견

최근 이공계 문제에 대한 언론 보도와 사회 분위기가 오히려 이공계 기피를 더욱 부채질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듯하다. 한 국가의 장래를 결정한다는 과학기술, 그 선봉에 서있는 이공계의 현 좌표는 어디쯤일까. 이공계는 과연 기피해야 할만큼 비전 없는 분야일까.


최근 언론과 인터넷 게시판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이공계 기피 문제’가 미국의 과학 전문지 ‘사이언스’ 의 3월 15일자에 소개됐다. 사이언스는 2002학년도 서울대 공대 박사 과정 미달 사태를 비롯해 국내에서 벌어지는 이공계 기피 경향을 소개하면서 한국에서 과학이 경제 성장의 추진력으로 여겨지던 시대는 지났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우수한 학생들이 이공계를 외면하고 실용 학문에 몰리는 것은 처음 일어난 현상이 아니다. 1990년대를 거치면서 대학을 불문하고 의학 관련 학과가 입시 배치표에서 최상위권을 차지하는 상황은 지난 10여년 간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공계 기피 문제가 최근 정부와 국민의 커다란 관심거리로 등장한 계기는 무엇일까. 가장 큰 이유로 지목되는 것은 최근 제시된 서울대 미등록 사태와 자연계열 비율 감소다.

올해 서울대 정시모집 등록률을 살펴보면 자연대와 공대가 각각 81.9%와 81.7%로 저조했고, 추가등록 최종 마감 결과에서도 미등록 인원이 6%에 달해 지난 2000학년도와 2001학년도 각각 2.1%와 2.0%였던 규모에 비해 급증했다. 특히 농생대 자연계열은 미충원율이 30.5%나 되는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2002학년도 계열별 전체 응시자 중 자연계의 비율은 26.9%, 인문계는 56.4%였다. 7년 전인 1995학년도에 인문계 48.3%, 자연계 42.6%였던 수치와 비교하면 얼마나 큰 변화인지 짐작할 수 있다. 이런 변화에 언론의 보도가 한층 가세함으로써 이공계열에 진학하려는 학생들에게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이공계는 과연 기피해야 할 만큼 매력 없고 비전 없는 분야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결코 그렇지 않다. 최근 언론에서는 낮은 보수와 불안정한 직업 상태 등 이공계 기피의 원인이 된다는 몇가지 지표를 내세웠다. 이 지표들이 정말 객관적이고 맞는 것인지, 진짜 이공계의 위기는 무엇에서 비롯되는 것인지 알아보자.


취업이 어렵고 보수가 낮다?

이공계 학과를 졸업할 경우 취업의 문은 인문사회계 학과에 비해 넓은 편이다. 예를 들어 대기업의 대졸 신입사원 공채의 경우 일반 사무/영업직의 채용 조건에는 전공의 제한을 두지 않는다. 하지만 기술기능/연구직의 경우엔 해당 분야의 전공자를 필요로 한다.

기술기능/연구직은 당연히 이공계 인력을 필요로 하며, 제품 개발과 생산에 반드시 필요한 인력이므로 많은 일자리가 존재한다. 또한 공업 생산품을 잘 관리하고 판매하기 위해서는 과학과 공학에 대해 기본 지식을 갖추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에 사무/영업직에서 이공계 출신을 선호하기도 한다.

금융이나 증권회사에서도 이공계 출신을 뽑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업무가 전산화돼 이공계출신자들의 적응이 빠른데다, 투자와 분석을 위해선 해당 기술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이공계 대학 졸업자들이 직업을 선택할 때 시야만 충분히 넓힌다면, 취업의 문은 다른 어떤 분야보다 넓다고 할 수 있다. 보수에 있어서도 인문사회계 졸업자들에 비해 적을 이유가 없고, 기술기능/연구직의 경우엔 자격증이나 개인의 능력에 따라 남보다 높은 보수도 기대할 수 있다.

전공을 살리기 어렵다는 말은 이공계 출신자들이 하기엔 어쩌면 사치와 같은 말일지도 모른다. 인문사회계 출신의 경우 자신의 전공을 살린다는 것은 교사나 대학 교수가 되지 않으면 불가능에 가깝지만 이공계 전공자는 기술직, 연구직 등에 진출함으로써 자신의 전공을 살리는 직장에 취업할 수 있다.
 

금융이나 증권회사에서도‘숫자에 강한’이공계 출 신을 선호하는 추세다.



출세하기 어렵고 쉽게 해고당한다?

고등학교에서 문과 공부를 하고, 대학의 학부에서 경영학 공부를 한 사람이 졸업 후 과학이나 공학을 공부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 실제로 이공계 대학을 졸업한 뒤 국내 경영대학원이나 외국의 MBA 과정에 진학하는 사람의 수는 날로 증가 추세에 있다. 졸업 후 과학기술에 대한 이해와 경영 마인드로 무장한 이들의 몸값은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경영대학원을 졸업하지 않았더라도 기업 내에서 이공계 졸업자들이 뛰어난 업무 능력을 보이면서 많은 이공계 출신자들이 기업의 고위 임원이나 최고경영자의 자리에 오르고 있다. 실제로 LG그룹의 경우 경영에 몸담고 있는 사장급 이상 CEO 42%가 이공계 출신이다. 원천 기술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인 미래엔 이보다 더욱 증가할 전망이다.

최근엔 벤처 창업 붐으로 과학기술자가 자신이 직접 연구 개발한 아이템을 사업으로 연결시키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이공계 출신의 젊은 최고 경영자, 시가총액 수천억원대 회사의 대주주가 급증하고 있다. 휴맥스의 변대규 사장, 엔씨소프트의 김택진 사장 등이 그 대표적인 예다. 이는 우리나라만의 현상이 아니며, 선진국의 경우 이미 오래 전부터 이공계 출신들이 기업의 최고경영자를 비롯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GE(제너럴 일렉트로닉)의 잭 웰치,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와 같은 최고경영자뿐 아니라 장쩌민 국가주석, 주룽지 총리 등 세계 각국의 고위 공직자나 정치인 중에서도 이공계 출신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쉽게 해고당한다는 말은 어려웠던 IMF 시기에 기업과 정부출연 연구소의 연구 인력이 대폭 감축되는 아픔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연구개발은 단시간 내에 큰 이익과 직결되는 분야가 아닌, 꾸준한 투자와 노력에 의해 결실을 맺는 분야다. 연구개발은 어려울 때일수록 독려해야 하는데, 연구개발이야말로 미래의 유일한 희망이기 때문이다. 대기업의 총수가 연구개발 관련 행사를 1순위로 챙기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앞으로는 연구개발에 대한 인력을 더욱 늘리는 분위기가 고조될 것이다. 실제로 LG그룹의 한 관계자에 따르면 올해의 연구개발비가 지난해에 비해 20% 늘었고, 현재 1백2명인 연구개발 전담 임원수도 2005년까지 2백명으로 대폭 확충할 방침이라고 한다.


공부는 따분하고 일은 재미없다?

대학에서 이공계 전공을 공부하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분야에 진출하는 경우에도 이공계 공부 경험은 큰 자양분이 된다. 전자공학 석사 과정을 마친 후 사법고시를 통해 지금은 국내 최대의 법률 법인의 변호사가 된 김모씨는 전자공학을 전공한 덕에 희소성이 매우 높다. 전자회사의 큰 계약을 담당할 수 있고, 기술 관련 국제 분쟁 일도 맡을 수 있기 때문이다. 화학 석사 학위를 받고 연구원이 아닌 세계적인 경영컨설팅 회사의 컨설턴트가 된 최모씨는 석사학위가 아깝지 않느냐는 질문에 “이공계 공부에서 사고력, 논리력, 그리고 균형잡힌 시각을 길렀다. 어려운 이공계 공부를 해내면서 차분한 심성과 인내력, 노력하는 습관이 길러지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공계 공부는 젊은 날을 바쳐서 빠져들어 볼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

이공계 전공을 자신의 평생 직업으로 삼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무언가를 창조하는 직업은 큰 보람과 자부심을 갖게 해준다. 자신이 발견한 법칙이나 만들어낸 물건이 세상 사람들의 삶을 편하고 효율적으로 만들어줄 때 느끼는 기쁨은 다른 어떤 직업에서도 느낄 수 없는 것이다. 부귀영화를 마다하고 연구실에 틀어박혀 연구에 매진하는 과학자들이 인생의 가치와 의미를 연구의 즐거움에서 찾는 이유다.


최근엔 벤처 창업 붐으로 자신 의 아이템을 사업으로 연결시킨 이공계 출신의 젊은 경영자가 늘어나고 있다. 엔씨소프트의 김택진 사장 (사진)이 대표적인 사례다.



교차지원과 입시제도가 기피의 주범이다?

이공계 기피현상이 생겨난 원인으로 지적되는 것 중 하나가 교차지원이다. 교차지원은 문과 학생이 이과계열 학과를, 이과 학생이 문과계열 학과를 자유롭게 지원할 수 있다는 의미다. 1997학년도부터 2002학년도 계열별 지원자 현황을 보면 인문계열의 경우 각각 47.8%, 48.3%, 49.1%, 52.1%, 55.2%, 56.4%의 순으로 꾸준히 늘어나고 있지만, 자연계열의 경우 43.2%, 42.4%, 39.9%, 34.6%, 29.4%, 26.9%로 감소하는 추세다. 언론에서는 이 지표를 내세워 교차지원 때문에 이공계 기피 현상이 일어났다고 보도하고 있다. 하지만 그게 전부일까.

최근의 한 설문조사에서 과학기술자들은 이공계 기피의 원인을 교차지원이라는 입시제도 문제라기보다 과학기술인의 낮은 처우 때문으로 본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공계 대학원생과 현직 과학기술자 중심으로 결성된 커뮤니티인 한국과학기술연합(www.scieng.net)은 지난 3월 2일부터 9일까지 회원 6백69명을 대상으로 자체 설문 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응답자의 87%는 이공계 기피 원인을 과학기술인의 낮은 처우와 불투명한 미래 문제로 꼽았다. 반면 교육과정과 교차지원 등의 입시제도, 산업사회 발전 단계에 따른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응답한 사람은 각각 3% 정도였다. 또한 이공계 기피 현상을 개선하는 방법으로 효과적인 것을 묻는 설문 역시 응답자의 87%가 과학기술인의 사회적 처우와 인식 개선을 선택했고, 교차지원을 축소하거나 폐지해야 한다고 응답한 인원은 4%에 불과했다. 교차지원이 이공계 기피 현상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손꼽힐 수는 없다는 말이다.

교차지원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이를 ‘이용’해 이공계나 의학 계열에 진학한 문과 출신 학생들이 이과 과목에 대한 기본이 부족해 대학 교육의 부실화를 가져온다는 점이다. 어려운 수학2와 과학 과목을 피하고, 비교적 공부가 수월한 문과를 선택해서 문과 지원으로 수능을 친 뒤 그 점수로 의대나 치대 등 의학 계열의 대학에 진학하려는 ‘좋지 않은 용도’로 쓰임으로써 학생들의 자질이 떨어지는 것이다.

최근엔 의대 선호 현상이 더욱 두드러지고 있는데, 적성과 흥미를 고려하지 않은 선택이라면 문제가 심각하다. 성균관대 의대 정진상 교수는 “의사라는 직업이 일반인에게 비춰지듯 그렇게 화려하거나 항상 보람된 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의과대에 진학하려는 학생들은 누구보다 많은 고뇌를 겪어야 하며, 투철한 소명감과 노력 없이 경제적인 성공과 사회적인 명예를 위해 의학 계열의 진로를 결정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말했다.

연세대 의대 이무상 교수에 따르면 의대생의 34.9%가 적성에 안맞는다고 하며, 30.6%는 전과를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대학 진학에서 적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단적으로 증명해주는 수치다.


계열별 자연계열 지원자가 감소하고 있다는 이유로 언 론에서는 교차지원이 이공계 기피에 근본적인 원인이 라고 보도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일까.



진짜 문제는 무엇일까

인류 문명의 발전은 과학기술자들이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공계열의 공부가 자신의 적성에 맞는다면, 그리고 이공계열에서 자신의 열정을 충분히 발휘할 각오가 돼 있다면 오히려 지금 이런 시기에 이공 계열에 진학함으로써 희소 가치를 더욱 빛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겐 해결해야 할 과제가 있다. 연구개발을 평생의 업으로 삼는 고급 연구 인력의 현 실태에 대한 문제다. 자신의 적성에 맞춰 이공계열 대학에 진학한 후 취업을 원하는 학생이라면 이공계는 기피해야 할 대상이 결코 아니다. 대학을 졸업한 후 석·박사 과정에 진학하지 않고 자신의 능력을 살려 일찍 사회에 진출하거나, 경영 등의 다른 분야를 공부함으로써 얼마든지 미래를 개척할 수 있고, 이공계 출신이라는 것이 강점으로 작용할 것이다.

하지만 이공계 연구중심 대학이나 소위 명문대에 진학해 서른이 넘을 때까지 공부를 계속해 박사 학위를 받는 경우라면 사정이 다르다. 이들은 대학이나 연구소 등에서 교수나 연구원으로 자리를 잡아야 하지만, 타 직종에 비해 능력에 합당한 경제적 처우를 받지 못한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1990년대 이후 ‘가난하지만 가치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과학 기술인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가난한데도 바보같이 연구원의 길을 택한 사람’으로 바뀌고 있어 연구원들의 가슴을 멍들게 한다. 국가의 운명을 장기적인 안목으로 볼 때 고급 연구 인력은 반드시 필요하다. 세계적 경제 흐름을 살펴보면 고도의 기술이 집약된 제품이다 하더라도 2-3년을 버티기 힘들고, 기술 집약도도 갈수록 첨단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꾸준히 육성된 고급 인력이 앞날을 대비한 기술 분야에 지속적으로 투입되지 않으면 국가의 장래는 매우 불투명하다. 이공계 기피 현상이 심화돼 국내의 대학원 교육이 붕괴된다면 결국 과학기술인을 외국으로부터 수입해야 하는 일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과학기술인을 우대하고 존경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이어져오지 않은 탓에 외국에 비해 사회적 지위도 높지 않고, 정치적으로도 존중받지 못해 과학기술인을 위해 고민하는 정치인이나 고위 공직자는 찾아보기 어렵다.

소국형 개발 모델이 낳은 선택과 집중 전략으로 일부 돈되는 분야에 고급 연구 인력의 공급이 집중되면서 학문 발전과 연구 개발에 불균형이 생겼고, 공부를 마치고도 일자리가 없어 연구소마다 비정규직 연구원이 넘쳐나는 실정이다.

선진국에선 쉽게 볼 수 있는 백발의 연구원과 엔지니어를 우리나라 연구소에선 찾아보기 어렵다. 우수한 학생/대학원생들은 외국 유학을 떠난 뒤 국내와 차이나는 그 곳의 연구 환경과 사회적 처우에 끌려 귀국을 포기하고 정착하고 있다.

애써 길러낸 인재를 외국의 과학기술 발전과 외국 기업의 돈벌이에 제공하는 셈이다. 문제해결에 대한 과학기술인의 수동적인 태도와 낮은 사회 참여도 문제다. 이 모든 것이 누적돼 나타난 현상이 바로 이공계 기피 현상인 것이다.

지금의 고등학생들이 공부를 마치고 사회에 진출할 미래에는 지금의 문제점이 해결돼스스로 설계한 꿈과 열정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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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04월 과학동아 정보

  • 장미경 기자
  • 박상욱 대표운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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