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5월 13일 오후 5시경. 강원도 강릉시 구정면 덕현리의 한 주택에 괴한이 침입했다. 괴한은 당시 안방에 혼자 있던 집주인 A씨(여, 70세)의 양팔과 두 다리를 포장용 테이프와 휴대전화 충전기 전선 등으로 묶고 무차별 폭행해 살해했다. 그리고 집에 있던 금반지 등 80만 원 상당의 금품을 훔쳐 달아났다.
얼마 뒤 숨져있는 A씨를 발견한 이웃 주민의 신고로 경찰 수사가 시작됐지만 용의자를 특정할 만한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 유일한 흔적은 A씨를 묶었던 테이프에 묻어 있던 길이 1cm 남짓의 ‘쪽지문(일부분만 남은 조각지문)’ 하나였다. 불완전한 그 지문마저도 테이프에 인쇄된 글씨와 겹쳐져 있어 식별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이 사건은 미제로 남았다.
그런데 사건 발생 12년 만인 지난해 범인이 체포되면서 사건이 극적으로 해결됐다. 흐릿한 쪽지문을 선명하게 복원하는 지문 감식 기술의 발전 덕분이었다.
겹친 지문 감식 어려워
과학수사에서 지문 감식은 수사의 기본 중 하나다. 그간 지문 감식 기술은 계속 진화해왔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부분이 있다. 바로 여러 개 겹쳐진 지문을 하나씩 분리해서 식별하는 기술이다.
장성윤 경찰청 과학수사기법계장은 “실제 수사 현장에서는 지문이 복잡하게 겹쳐 있어 감정이 어렵다고 판단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며 “일차적으로 겹치지 않은 지문부터 찾고, 못 찾을 경우에만 겹친 지문의 감식을 의뢰하는 데 신원 확인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 경우 지문으로는 더 이상 수사에 진도를 내기 어렵다.
현재 겹친 지문을 자동으로 분리해서 식별하는 기술을 보유한 수사기관은 전 세계 어디에도 없다. 그간 경찰청은 지문 분석 담당자가 겹친 지문을 보고 지문을 하나씩 다시 그리는 등 다양한 감식 방법을 사용해 왔지만 시간이 오래 걸리고 완벽하게 지문을 분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2016년 경찰청은 겹친 지문을 자동으로 식별하는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치안과학기술연구개발사업단을 통해 국내 과학자들을 대상으로 연구개발 의뢰 공고를 냈고, 광학 분야 연구에 오랜 경험을 가지고 있는 이병호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교수팀이 과제를 맡았다. 연구팀은 3년째 지문 감식 기술의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지문 식별 기술 1] 사람마다 다른 땀 성분
3월 7일. 서울대 반도체공동연구소 한쪽에 위치한 이 교수팀의 실험실을 찾았다. 광학 장치와 서버, 그리고 현미경처럼 생긴 분광분석장치가 실험실에 빼곡히 들어 서 있었다. 조재범 박사과정 연구원이 분광분석장치로 촬영한 겹친 지문 분석 결과를 모니터에 띄웠다. 조 연구원은 “실험용으로 연구원들의 지문을 겹쳐 찍은 뒤 분광분석장치로 분석한 결과”라며 “각 지문이 빛을 흡수하는 정도에 따라 나타나는 스펙트럼 차이를 지문 식별에 이용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 기술의 원리는 지문에 묻어 있는 땀의 성분을 이용하는 것이다. 빛은 여러 파장으로 이뤄져 있다. 물질에 빛을 쪼이면 구성 성분에 따라 흡수되는 빛의 파장에 차이가 생긴다. 분광분석장치를 이용하면 어떤 파장이 많이 흡수됐는지 분광 스펙트럼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사람의 땀은 99%가 물로 이뤄져 있지만 극소량의 나트륨과 염소, 칼륨, 마그네슘 등이 들어 있고, 이 비율은 사람마다 조금씩 차이가 난다. 이런 차이는 체질과 식습관, 약물 복용 여부, 흡연 등에 의해 생긴다.
연구팀은 지문에서 겹치지 않은 부분과 겹친 부분을 각각 분광분석장치로 촬영한 뒤 분광 스펙트럼의 차이를 이용해 겹친 부분을 분리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우선 두 사람의 지문이 겹치지 않은 부분에서 지름 6μm(마이크로미터·1μm는 100만 분의 1m)인 미세한 점 60개를 찍어서 분광 스펙트럼을 얻고, 그 데이터를 딥러닝 기법으로 학습시켜 지문의 주인을 식별할 수 있게 했다. 그런 뒤 겹친 부분을 똑같은 방식으로 촬영해 분광 스펙트럼을 얻어 학습된 데이터를 토대로 어떤 부분이 누구의 지문인지 가려낸다. 이 교수는 “측정하는 점이 많을수록 좋다”고 말했다.
[지문 식별 기술 2] 지문 인식 인공지능(AI)
하지만 이 방법에는 한계가 있다. 지문에 남아 있는 땀의 양이 굉장히 적어서 분석하기가 까다로운데다, 지문이 달라도 우연히 땀의 성분이 비슷해서 구분하기 어려울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분광 측정을 할 때 지문이 찍혀있는 물체의 영향으로 스펙트럼에 차이가 생길 수도 있다. 조 연구원은 “한 가지 방법으로는 겹친 지문을 구별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여러 방법을 동시에 적용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연구팀이 시도 중인 다른 방법은 지문 이미지 자체를 딥러닝 알고리즘으로 분리해내는 기술이다. 분광분석 과정과 별도로 겹친 지문을 촬영한 사진을 입력하면 자동으로 분리해내는 인공지능(AI)을 개발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연구팀은 미국 국립표준기술연구소(NIST)에서 제공하는 지문 정보를 이용해 무작위로 지문을 겹친 뒤 분리해내는 알고리즘을 개발하고 있다. 지문 두 개의 정보를 온전히 알고 있는 상태에서 이 둘을 겹친 뒤 다시 분리해 원래의 지문과 얼마나 일치하는지 확인하면서 알고리즘의 정확도를 계속 높이고 있다. 조 연구원은 “지문 데이터를 대량 학습시킨 뒤 데이터베이스에 없는 사람들의 겹친 지문까지도 분리해내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지문 식별 기술 3] 지문 깊이 차이로 홀로그램 생성
연구팀은 분광 스펙트럼과 AI에 홀로그램 기술까지 더해 세 가지 방식을 통합한 겹친 지문 식별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 최종 목표다. 이 교수팀은 홀로그램 기술에 있어서 세계적인 수준을 인정받고 있다.
홀로그램은 쉽게 말해 영상을 원하는 위치에 구현하는 기술이다. SF 영화에나 등장하는 실현 불가능한 기술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초기 단계의 홀로그램을 구현한 연구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이 교수팀은 기존 홀로그램 기술의 한계였던 낮은 해상도와 좁은 시야각을 대폭 개선한 연구 결과를 국제학술지 ‘나노 스케일’ 2017년 12월 28일자에 발표하는 등 이 분야에서 선도적인 연구를 하고 있다.
연구팀은 홀로그램 기술의 원리를 지문 식별에 도입했다. 홀로그램은 기본적으로 물체의 이미지를 구성하는 빛의 세기와 위상 정보를 저장한 뒤 원하는 곳에 마치 그 물체가 있는 것처럼 재생해 주는 기술이다. 위상은 쉽게 말해 빛의 진행 방향을 추측할 수 있는 정보가 담긴 빛의 특성이다. 따라서 빛의 세기와 위상을 알면 이미지의 형태를 재현할 수 있다. 조 연구원은 “지문에 레이저를 쪼여 산란된 빛의 세기와 위상 정보를 토대로 겹친 지문을 시뮬레이션으로 재현해서 분리하는 방법을 연구 중”이라고 말했다.
연구팀은 물체에 찍힌 지문에도 미세한 굴곡이 있다는 사실에 착안했다. 이 높낮이에 의해 생기는 빛의 위상차를 파악하면 홀로그램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찍힌 지문을 3차원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연구팀은 지문 시료를 50μm 간격으로 미세하게 움직이면서 세 번 촬영한 뒤 측정된 빛의 세기 차이를 이용해서 빛의 위상을 계산하는 방식을 이용하고 있다. 실제로 두 지문을 강하고 약하게 겹쳐 찍은 뒤 홀로그램 정보를 얻어서 각 지문의 입체 이미지를 재현하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이병효 박사과정 연구원은 “깊이의 차이가 크지 않은 지문 이미지를 재현하고 이를 분리하는 데까지 홀로그램 기술을 발전시킬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당초 분광학적인 방식으로 지문을 분리할 계획이었지만, 사람마다 땀 성분의 차이가 크지 않고 이미지 역시 비슷한 부분이 많아서 세 가지 기술을 통합해 지문 식별의 신뢰도를 높일 계획”이라고 말했다.
연구팀은 홀로그램과 분광 기법을 적용한 지문 측정 장치를 수사관들이 휴대할 수 있도록 소형화할 계획이다. 장 과학수사기법계장은 “겹친 지문을 자동으로 분리하는 기술을 개발해서 실제 수사 현장에 적용할 경우 한국이 세계 최초의 사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