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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동반자의 길을 걷다 퀴리부인

소크라테스는 악처 때문에 철학자가 됐다는 이야기가 있다.그의 아내가 실제로 악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이 이야기는 한사람의 인생에서 배우자의 역할이 얼마나 큰지 말해준다.과학의 미래를 함께 설계한 퀴리 부부는 어떤 생활을 했을까.



완벽한 동반자의 길을 걷다 퀴리부인



서양 과학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작업은 사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이 없었다면 많은 부분이 채워지지 않은 퍼즐로 남아있을 것이다. 그의 시각으로 정리된 고대인들의 업적이 그를 통해 우리에게 고스란히 전달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의문점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잘 닦인 투명한 렌즈여서 고대 세계를 얼룩 없이 그대로 보여주는 것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생의 중반부쯤에서 만나게 되는 배우자는 사실상 또다른 세계를 보여주는 렌즈와 같다. 나는 그를 통해, 또 그는 나를 통해 새로운 세계와 만나고 성장하기 때문에 우리는 좋은 렌즈를 찾으려 한다. 과학의 역사에 이름을 남긴 수많은 과학자들 중에는 부부로 또는 연인으로 함께 과학연구에 몰두하면서 서로에게 근사한 렌즈 역할을 했던 인물들이 많았다. 이들 중 노벨상을 두번이나 수상한 마리 퀴리, 그리고 그의 남편 피에르 퀴리는 어떤 부부였는지 알아보자.


적극적인 마리와 내성적인 피에르

결혼 전 이름이 마리 스클로도프스카였던 마리 퀴리는 1867년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출생했다. 중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아버지로부터 화학과 물리학을 배웠던 마리는 과학에 꽤나 적성을 보였다. 그러나 당시 폴란드는 제정 러시아의 압정 속에 있었고, 학교 교사라는 직업이 정규교육을 받을 수 있는 최하의 계층에 속했던 시절이라 가정 형편이 어려웠다. 이 때문에 마리는 파리의 소르본대를 꿈꾸며 몇년 동안 언니 브로냐의 뒷바라지를 열심히 했다.

마리가 파리에 도착한 것은 그녀의 나이 24세 때였다. 의사가 된 언니는 그녀의 경제적 후원자가 됐고, 소르본대에서 수학과 물리학 강의를 듣기 시작한 그녀는 공부하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학교 근처 다락방에서 자취를 했다. 난방이 되지 않는 추운 겨울밤에는 이불과 모든 옷가지를 겹쳐 입고 지내야 했다. 그녀에게는 교사 자격증을 취득해 조국 폴란드로 돌아가야 한다는 꿈이 있었으며, 적극적인 성격과 강한 의지력은 그러한 꿈이 멀지 않았음을 보장해줬다.

반면 8살이나 많았던 피에르 퀴리는 과학과 학문의 도시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렇지만 그 역시 고급 엘리트 교육은 받지 못했고, 외과의사 아버지로부터 개인적인 교육을 받았을 뿐이었다. 사실 당시에는 외과의사도 자녀를 공부시키기에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았다. 그는 평범하고 매우 조용한 아이로 수줍음이 많아서 형 자크 퀴리 외에는 친구가 거의 없었다. 피에르는 14살 때 소르본대에 입학했고, 4년 후 물리학 이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러나 가정형편 때문에 학업을 계속하지 못하고, 대신 형이 일하던 실험실 조교자리를 겨우 얻게 됐는데, 이때의 연구는 주로 자크가 연구하던 결정학 분야였다. 계단과 복도 사이의 좁은 공간에서도 피에르의 과학에 대한 열정은 그칠 줄 몰랐다.

내성적인 피에르와 적극적인 마리는 1894년 봄 처음 만났다. 평소 피에르를 잘 알고 지내던 폴란드 출신의 물리학자 리프만 교수는 순전히 물리학에 관한 대화를 위해 그를 초대했다가 물리학을 공부하던 폴란드 출신 마리도 함께 자리하게 됐다. 두사람은 마치 누가 더 과학에 대한 열정이 강한가를 내기라도 하듯 서로의 생각을 토로했고, 피에르는 두세번의 만남 후 마리의 자취방을 찾았다. 물론 마리는 갑작스럽기도 하고 또 싱겁기도 한 피에르의 청혼을 거절해버렸고, 방학을 핑계 삼아 폴란드로 되돌아갔다. 마리에게는 아직도 꿈꾸고 싶은 미래가 따로 있었다.

그러나 어느날 마리에게 도착한 피에르의 편지는 두 사람의 인생을 확 바꿔버렸다. 피에르는 정열적인 필치로 “우리가 서로의 곁에서 우리의 꿈에 취해 삶을 보낼 수 있다면 이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소! 당신의 애국자로서의 꿈, 우리의 인도주의자로서의 꿈, 그리고 우리의 과학적 꿈에 취해서 말이오!” 라고 썼고, 마리는 곧 폴란드를 떠났다.

1895년 두사람은 서로의 과학적 꿈에 취하기를 꿈꾸며 파리의 한 교회에서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친지들이 마련해준 결혼축의금으로 자전거를 구입한 두사람은 신혼여행을 떠났고, 이후 자전거는 공부와 연구로 지속되던 단조로운 이들의 생활에 활력을 주곤 했다.


헛간 실험실에서의 고된 시간

마리의 적극적인 권유로 1895년 피에르는 뒤늦게 박사학위 논문을 제출했다. 그의 논문은 온도에 따라 물질 자성의 정도가 달라진다는 내용으로, 오늘날 ‘퀴리의 법칙’으로 불린다. 이때부터 피에르는 프랑스와 여러 나라의 과학 학회에서 활발하게 논문을 발표하면서 점점 국제적 명성을 얻어갔다. 영국의 켈빈 경은 큰 명성과 노년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프랑스의 젊은 과학자를 만나러왔고, 콘덴서의 제조와 용도에 관해 토론하는 것을 즐거워했다.

1896년 마리는 교사 시험에 합격했고 이듬해 첫딸 이렌느를 출산했다. 피에르는 이제 마리가 일할 수 있고 또한 대학 실험실에 일할 수 있는 자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물리학 학장을 찾아가 마리의 자리를 부탁했고, 마리는 실험을 시작하면서 박사학위 논문 주제를 찾을 수 있었다. 1896년 앙리 베퀴렐이 발견한 ‘우라늄 광’은 그야말로 그녀의 과학적 열정을 사로잡기에 충분할 만큼 신기했다.

곧 마리는 토륨 역시 우라늄과 같은 광선을 방출한다는 것을 알아냈고, 우연히 우라늄원석인 피치블렌드가 우라늄보다 훨씬 강한 방사능을 보임을 관찰했다. 그녀는 피치블렌드에 미지의 방사능 성분이 들어있을 것이라고 추측했고, 피에르는 그러한 그녀의 생각을 확인해볼 수 있도록 친절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이번에도 역시 학장을 찾았고, 다행히 창고와 기계실로 사용되던 작업장 하나를 얻을 수 있었다. 또한 그는 마리와의 공동연구를 결심했고, 오랫동안 자크와 함께 해오던 결정에 관한 연구를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우라늄에서 방사성 원소를 분리하는 작업은 무척이나 힘든 것이었다. 목재로 대충 지어진 실험실은 비가 새고 추웠으며, 검정 칠판과 낡은 책상이 설비의 전부였다. 환기가 제대로 되지 않은 실험실에는 커다란 솥이 걸려있었고, 솥에서 끓고 있는 액체를 한번에 20kg씩 분석해내야 했다. 액체들을 그릇에 옮겨 부으며, 철로 된 막대를 사용해 몇시간 동안 냄비를 휘젓는 노동의 시간은 2년이나 계속됐고, 폴로늄(폴란드 이름으로부터 기인)과 라듐은 그러한 힘들었던 과정에 대한 보상이었다.

마리는 당시의 상황을 “우리는 마치 한 덩어리처럼 이론연구, 실험, 수업, 시험 등 모든 일에 대해 공동 관심사를 나누며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그녀는 “연구조건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매우 행복했다. 우리는 실험실에서 하루하루를 보냈고 학생들처럼 매우 간단한 식사를 했다. 그토록 가난한 우리의 창고는 매우 고요했다. 우리는 현재와 미래의 연구에 관해 이야기했으며, 적막감을 달래기 위해 실내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난로 옆에서 마시는 뜨거운 차 한잔은 우리에게 커다란 위로가 됐다. 우리는 오로지 하나에만 전념하면서 살았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두번의 노벨상 수상과 피에르의 죽음

1903년 마리와 피에르는 앙리 베퀴렐과 공동으로 노벨 물리학상에 지명됐다. 하지만 마리의 건강으로 인해 이들이 스톡홀름에 도착한 것은 1905년 6월이 되어서였다. 스위스 아카데미 회장은 노벨상 수여식에서 ‘둘이 합하면 힘이 강해진다’(union gives strength) 라는 말을 인용했고 “남자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어 여자로 하여금 남자를 돕게 하라”는 성경말씀을 인용하기도 했다.

노벨상은 이들 부부에게 새롭고 전혀 다른 삶의 가능성을 열어줬다. 주요 신문에서는 그들 부부의 일거수일투족을 알고 싶어했고, 초청강연이 쇄도했으며 그녀를 만나러오는 손님들로 실험실은 내내 북적거렸다. 물론 피에르는 소르본느대 이학부 교수가, 마리는 실험실 주임이 됐지만, 그들이 추구하던 조용한 생활은 한순간에 사라져버렸다. 마리는 이때쯤 둘째딸 애브 드니즈를 출산했고, 피에르의 뜻에 따라 다시금 이전과 같이 단순하고 조용한 과학도로서의 삶을 찾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인생에는 기쁨과 슬픔이 공존하는 법! 1906년 4월 학회모임에 나간 피에르는 퐁네프 근처에서 마차에 치여 그만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11년을 함께 살면서 한번도 떨어져본 적이 없던 피에르를 떠나보낸 38세의 마리는 깊은 슬픔에 젖었다. 그녀는 일기장에 “당신 없는 삶은 잔인하고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번민이자 바닥없는 고뇌이며, 끝없는 비탄입니다”라고 썼다.

하지만 그녀는 계속 슬퍼할 수만 없었다. 과학연구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아직 타오르고 있었으며, 돌보아야 할 9살, 2살의 어린 두딸이 있었다. 그녀는 곧 본연의 강인함을 되찾고, 소르본대의 강단에 섰으며 1908년 소르본대 최초의 여성교수가 됐다. 1911년 그녀는 두번째로 노벨상을 단독 수상했다. 노벨 화학상의 수상 이유는 라듐과 폴로늄의 발견과 각 원소의 성질에 관한 연구로 화학 분야 진보에의 공헌이었다. 그녀는 또한 같은 해 세계 물리학자들의 전체회의인 제1차 솔베이 회의에 아인슈타인, 푸앙카레, 플랑크 등과 나란히 초대돼 세계적 과학자의 대열에 당당히 서게 됐다.


성공의 절반은 남편 덕?

마리의 실험실은 곧 라듐 연구의 세계적 메카가 됐다. 파리대와 파스퇴르 연구소가 공동으로 설립한 라듐 연구소 소장으로서 그녀는 큰딸을 비롯해 유수한 제자들을 키워냈다. 그녀의 딸 이렌느는 물리학을 공부했을 뿐만 아니라 연구소 실험조수이던 프레데릭 졸리오와 결혼했고, 이들 부부 역시 1935년 노벨상을 수상함으로써 2대 부부 수상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그렇지만 마리는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한 채 1934년 7월 4일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마리는 노벨상을 수상한 최초의 여성 과학자이자 소르본대 최초의 여성교수였지만 프랑스 왕립과학아카데미의 회원은 되지 못했다. 그것은 여러가지 이유 때문이었는데, 많은 사람들은 그녀의 연구가 사실상 피에르의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녀에 대한 시기와 반목의 목소리가 있었고 염문설까지 퍼져 나왔다. 아직 여성이 발을 들여놓지 않은 과학 분야에서 두드러진 연구성과를 내놨지만, 그녀는 여전히 폴란드라는 약소국 출신이었고 게다가 유태인이었다.

마리 퀴리가 과학자로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어디에 있었을까. 그녀에게는 누구보다도 강한 과학에의 열정이 있었으며,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용기와 결단력이 있었고 또한 감정을 자제할 줄 아는 힘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할까. 사실 당시 왕립아카데미가 마리에게 보여줬던 폐쇄성은 그 시대가 여성들에게 가하던 폐쇄성의 한 축소판일 뿐이었으며, 어쩌면 마리는 그러한 폐쇄성에 가로막혀 과학자로서의 삶을 접었어야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녀에게는 피에르라는 존재가 있었다. 상대방의 능력을 인정해주고 그것이 제대로 실현될 수 있도록 도와준 민주화된 제도 혹은 열린사회로서의 남편 피에르가 그녀에게는 존재했던 것이다.

피에르와 같은 남편들이 모이고 또 아내들이 모인다면 상대방의 부족함은 채워주고 능력은 격려해주는 하나의 제도가 세워질 것이고, 또 꿈꾸던 사회가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마리에게의 피에르, 피에르에게의 마리처럼 누군가의 피에르와 마리가 되고 싶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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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03월 과학동아 정보

  • 조숙경 박사후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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