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영화나 소설의 소재로 등장하는 가상현실은 많은 사람들이 경험해보고 싶어하는 첨단기술 중 하나다. 진짜보다 더 ‘진짜’같은 세계를 보여주는 기술. 가상현실은 어떤 학문이며, 기술적 구현 원리는 무엇일까.
인공 두뇌를 가진 컴퓨터(AI)가 지배하는 2199년. 인간들은 태어나자마자 인공자궁 안에 갇혀 AI를 위한 에너지로 사용되고, 뇌세포엔 매트릭스라는 프로그램을 입력당한다. 이 프로그램에 따라 평생 1999년의 가상현실을 살아가는 인간들. 프로그램 안에 있는 동안 인간이 보고 느끼는 것은 항상 AI의 검색엔진에 노출돼 있고, 인간의 기억 또한 AI에 의해 입력되고 삭제된다. 그러나 가상현실 속에서 진정한 현실을 인식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 꿈에서 깨어난 자들, 매트릭스 밖으로 뛰어나가는 자들이 세상을 지배한다….
몇해 전 개봉했던 영화‘매트릭스’는 수많은 사람들의 뇌리에‘가상현실’의 충격을 심은 화제작이다. 이 영화에서는 가상현실에서 깨어난 유일한 인간들이 AI에 맞서 싸우는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들은 광케이블을 통해 매트릭스에 침투하고, 매트릭스 프로그램을 응용해 자신들의 뇌세포에 각종 데이터를 입력한다. 매트릭스는 가상과 현실을 넘나든다는 내용 하나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과 흥미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첨단 과학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가상현실은 과연 어떤 기술일까.
가상현실의 주인공은 ‘사용자’
가상현실은 현실이 아닌 인공적으로 창조된 상상의 세계 속에서 내가 주체적으로 움직이면서 어떤 일을 경험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기술이다. 즉 컴퓨터, 추적 장치, 생체신호 감지기, 운동감 생성기 등 기계적 시스템으로 사람의 감각기관을 안전하게 자극함으로써 가상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마치 실제로 경험하는 것처럼 착각에 빠지도록 조작하는 것이다.
가상현실 시스템 내부의 모든 물체들은 상호작용이 가능하다. 지금까지의 시스템에서는 제작자가 만들어놓은 환경과 의도에 맞춰 사용자의 움직임이 결정됐다면, 가상현실 시스템에서 사용자는 제작자의 의도를 고려하지 않고 원하는대로 행동할 수 있다. 따라서 사용자는 실제의 환경과 비슷하게 만들어진 모델 속에서 이들 정보를 접하기도 하고, 내 뜻대로 변형시키기도 한다.
가상현실이라는 용어는 1980년대 중반에 들어서야 처음 쓰이게 됐지만, 그 근간이 되는 기술에 대한 연구는 그보다 훨씬 이전에 다양한 분야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컴퓨터 그래픽스, 시뮬레이션, 로보틱스, 원격시스템 등이 그것이다.
여기서 잠깐 가상현실 기술의 발판이 됐던 기반 학문에 대해 살펴보자. 예전 화가들은 원근과 입체감이 없는 2차원 캔버스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지 고민했는데,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컴퓨터 그래픽스가 탄생했다. 화면에 3차원의 가상 공간을 마련한 것이다. 가상현실의 뼈대를 이루는 학문인 컴퓨터 그래픽스는 모델링, 렌더링, 애니메이션 등 수많은 영화에서 애용되는 기술을 자랑한다.
시뮬레이션에 대한 연구는 항공기 등에서 조종사의 훈련을 좀더 안전하고 효과적으로 시행하기 위한 일환으로 1930년에 이미 시작됐다. 이후 컴퓨터 기술과 결합하면서 비행뿐만 아니라 군사 훈련과 의료 쪽의 가상현실 기술로 점차 발전하고 있다.
로보틱스에서는 3차원 공간에서의 제어 방법을 주로 다루는데, 이 기술이 가상현실 장비에 응용된다. 예를 들어 원격제어시스템으로 작동되는 로봇을 조작한다고 가정하자. 멀리 떨어진 곳일지라도 원하는 대로 로봇을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시스템 환경에 있는 조작자는 로봇의 옆에 있는 것처럼 생생한 현장감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결국 이러한 기술은 가상현실 연구의 모체가 될 수밖에 없다.
가상현실 기술을 공부하고자 하는 학생이라면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 포항공대 컴퓨터공학과 가상현실 연구실의 김정현 교수는“가상현실 기술의 초석이라고 할 수 있는 컴퓨터 그래픽스 학문을 제대로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면서“컴퓨터 그래픽스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효율적인 알고리듬을 작성하기 위해 확률과 통계 등의 분야에 탄탄한 수학적 지식을 갖추고 각종 물리 법칙을 이해하고 있어야 하며, 컴퓨터 프로그래밍 분야에도 재능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가상현실이 구현되기 위해서는 컴퓨터 프로그래밍이라는 소프트웨어적인 요소 외에도 네트워크 통신이 어떻게 이뤄지는지에 대한 통신 시스템을 공부하는 전자공학이나 인간을 위한 인터페이스를 연구하는 산업공학에 대해 흥미를 갖고 있으면 더 좋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가상현실 연구실에는 컴퓨터공학, 전자공학, 산업공학 등에서 학부 과정을 이수했거나, 부전공한 학생들이많다.
나뭇잎 만지는 느낌도 구현
가상현실 시스템의 기술적 원리는 무엇일까. 가상현실은 몰입형 가상현실, 데스크톱 가상현실, 합성형 가상현실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 중 가장 이상적인 형태라고 알려진 몰입형 시스템을 예로 생각해보자.
몰입형 가상현실에 필요한 시스템은 크게 세가지로 나눌 수 있다. 위치 추적 장치, 디스플레이 장치, 영상 발생 장치가 바로 그것이다. 가령 가상현실을 체험하려는 사용자는 머리에 헬멧 모양의 HMD(Head MountedDisplay)를 착용해야 하는데, 여기에는 디스플레이 장치와 함께 위치 추적 장치가 붙어있다. 사용자의 위치와 시선에 대한 3차원 정보를 위치 추적 장치가 수집한 후 미리 연결돼 있는 가상현실 데이터베이스에 보내면, 영상 발생 장치에서는 그 정보에 부합하는 가상 정보를 구성해 디스플레이 장치에 내보낸다. 가령 HMD를 착용한 사용자가 가상미술관에 들어간다고 가정하자. 사용자가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고개를 돌릴 때마다 추적장치가 사용자의 현재 위치 좌표를 인식하고 그 좌표 값에 해당하는 정보를 가상미술관 데이터베이스에 요구한다. 사용자가 오른쪽 벽면 옆 (x, y, z)의 위치를 쳐다보면 밀레의 작품 중 A 부분이 부각돼 보일 것이다. 추적 장치가 탐지하는 사용자 위치 정보가 많을수록, 그리고 이에 대한 오차가 적을수록 영상 발생 장치에선 사용자의 현재 상태에 꼭 맞는 정보를 보내줄 수 있다.
영상 정보에서 좀더 영역을 넓혀 촉각이나 청각, 또는 운동감까지 느끼기 위해서는 몇가지 장비가 더 필요하다. 예를 들어 대형 디스플레이가 펼쳐진 화면 앞에서 HMD를 끼고 등산용 자전거로 하이킹을 하는 가상현실을 경험한다고 가정하자. 등산용 자전거라는 또하나의 시스템에는‘Force-feedback 장치’가 필요하다. 이 장치는 사용자가 바라보는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지형에 부합해 자전거 페달과 브레이크의 강도가 달라지도록 조절해주는 기능을 한다. 오르막길과 비탈길에선 그만큼 힘들게 운전하고, 오솔길에선 여유롭게 운전할 수 있는 등 내가 가는 곳 어디에서든 그 느낌을 그대로 전달받을 수 있기 때문에 스튜디오 환경 내에서 자전거를 타더라도 춘천의 하이킹 도로를 내 마음대로 달리는 것과 똑같은 느낌을 얻을 수 있다.
이밖에 음성인식과 음성합성을 구현할 수 있는 소리 입출력 장치와 손을 움직여 또하나의 정보를 만들어낼 수있는‘데이터 글로브’같은 장치도 있다. 이런 기술을 이용한다면 강변의 새소리와 나뭇잎을 만지는 느낌까지 하나의 정보로 포함시킬 수 있다.
데스크톱 가상현실 시스템은 컴퓨터의 그래픽 화면에 나타나는 영상을 이용하는 방법이다. 즉 컴퓨터 화면에 출력된 3차원 영상을 보면서 입체 안경, 마우스, 조이스틱, 데이터 글로브 등의 도구로 가상현실을 느낀다는 개념이다. 몰입형 가상현실 시스템에 비해 생생한 현실감이 떨어지지만, 건축 등의 산업용 설계와 가상 전시회, 또는 게임 등의 분야에서 활발하게 사용되는 등 가상현실을 대중화시키는데 중대한 역할을 했다. 합성형 가상현실 시스템은 말 그대로 카메라로 촬영되고 있는 자신의영상을 가상세계의 영상에 합성해 가상현실을 체험할 수있는 기술이다. 예를 들어 좁은 스튜디오 내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오케스트라 악단과 피아노 협주를 할 수 있으며, 실감나는 유럽 여행을 즐길 수 있다.
가장 주목받을 분야는 오락
가상현실 기술은 어떤 분야에 응용될 수 있을까. 가상 현실이 가장 각광받을 수 있는 영역은 단연 오락 분야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게임이나 교육 시스템이 체험형 가상현실 인터페이스로 업그레이드된다면 교육과 오락의 경계가 불분명해져 진정한‘에듀테인먼트’가 구현될 것으로 기대된다. 예를 들어 가상현실 속에 테마 파크를 조성한다면 영화에서처럼 공룡을 직접 만져볼 수 있고, 공룡의 생태에 대한 현장 학습도 가능하다.
건축 설계 분야에서도 유용하다. 거대 산업용 공장이나 대규모 아파트 단지, 또는 고속도로 등을 준공하기 전가상현실 시스템에서 미리 만들어본다면 가장 효율적인 건물을 가장 저렴한 비용으로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집안 인테리어 설계도 자유롭다. 가상의 집안으로 들어가 마음에 드는 벽지나 바닥 장식재를 수십개씩 번갈아 깔아볼 수 있으며, 가구 배치와 가전제품 색깔도 집안 분위기에 맞춰 원하는 만큼 바꿔볼 수 있다. 물론 전문가는 필요 없다. 모든 일은 내가 직접 할 수 있다. 가상현실이어서 가능한 일이다.
의료의 경우 발휘하는 위력은 더욱 크다. 결코 연습이 있을 수 없는 소중한 생명을 다룸에 앞서 가상수술이나 의료 훈련을 미리 실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상현실 기술을 통해 수술의 성공률을 높이고, 새로운 수술 방법을 개발할 수 있다면 질병에 대한 인간의 고통은 줄어들고 평균 수명도 놀랄 만큼 연장시킬 수 있을 것이다. 가상 현실을 이용해 고소공포증이나 폐쇄공포증 등 정신질환을 치료하는 방법도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그렇다고 가상현실 기술이 과학이나 의학 등의 기술 분야에만 치우쳐 있는 것은 아니다. 최근에는 우리의 문화재를 가상현실 공간 안에서 체험할 수 있도록 하는 디지털 복원 분야도 빛을 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가상현실 기술은 문화, 예술 등 더욱 다양한 영역에 발을 뻗을 것으로 예상된다.
체험적 인터페이스에 집중 연구
포항공대 컴퓨터공학과의 가상현실 연구실에서는 주로 현실 체험감에 대한 이론과 이를 교육 훈련 콘텐츠에 접목시키는 연구를 하고 있다. 가상현실을 통해 쿵푸나 댄스 같은 동작 훈련을 한다든지, 볼링, 테니스, 피아노등을 체험적인 인터페이스를 통해 즐기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또한 저작도구에 대한 연구도 진행하고 있다. 현실감을 강조해야 하는 여러가지 요소들, 가령 얼마나 디스플레이가 넓어야 할까, 그림자는 어느 정도로 정확하게 그려야 할까 등에 대한 실험과 간단한 마우스 조작을 통해 쉬운 게임이나 콘텐츠를 제작할 수 있는 도구를 개발하고 있다.
가상현실에 대한 연구 초창기에는 실제와 같은 영상, 즉 시각 정보의 충실한 재현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지만, 요즘은 시각뿐만 아니라 청각, 촉각 등 다른 감각 기관의 자극에 대해서도 충실하기 위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가상현실의 현실감을 높이기 위해서는 수많은 데이터 자원이 필요한데, 데스크톱 가상현실 시스템처럼 자원이 한정된 경우라도 최대의 효과를 발휘할 수 있도록‘자원 최적화 방법’도 활발하게 연구되는 추세다.
상상에 그쳐야 했던, 그래서 마음 한 구석에 늘 아쉬움으로 남겨둬야 했던 우리의 꿈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가상 현실의 세계. 이 분야에 대한 연구가 중요한 이유는 인간이 꿈꾸는 영역의 한계를 무한대로 넓힐 수 있다는데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