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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 보물선을 건져 올려라

인양의 손길 기다리는 해저유물

신안유물이 발굴된 이후 바닷속 보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러일전쟁 당시 울릉도 앞바다에 가라앉은 돈스코이호, 이순신장군의 거북선 등을 찾아내려는 탐사작업이 계속되고 있다.

'바닷속의 보물'하면 공상이 많았던 어린 시절에 꿈꾸었던 동화속 이야기처럼 들린다. 물안경과 오리발을 가지고 바닷속으로 잠수하여 그 곳에 숨어 있는 보물을 찾아 나선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마음이 설렌다. 그러나 믿기지 않겠지만 실제로 바닷속에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많은 보물이 있고, 아직 인양되지 않은 보물선도 무수히 존재한다. 그러나 바다에는 예측못하는 변화가 있고, 해저는 엄청난 수압과 암흑의 세계가 있어 누구나 쉽게 접근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있다. 해저를 향한 도전은 실패를 두려워 않는 불굴의 의지를 가진 자들만의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해저에서는 금화와 도자기 그리고 잃어버린 역사를 가지고 침몰한 먼옛날의 유물들이 자신을 찾아나서는 개척자들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동전만 28t 인양돼
 

한 다이버가 신안 앞바다에서 건진 해저유물들을 자랑하고 있다.
 

지중해는 해저 유물의 보고다. 서양의 역사를 볼 때 고대 유럽 아프리카 중동의 국가들은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수많은 전쟁을 치뤘다. 지중해의 제해권을 장악하는 국가가 곧 세계를 정복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서양 중심의 세계사에서 지중해는 절대적인 의미를 지녔다. 전쟁과 무역을 통해 동서양의 문물이 교류되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고대 유물이 수장됐다. 수장된 과거를 찾으려는 수중탐험가와 학자들의 많은 노력에 의해 해저의 유물들이 속속 발굴되면서 전설이 역사적 사실로 확인되고 있다. 지금도 여러 나라 수중고고학자들에 의해 해저 유물발굴은 계속되고 있다. 발굴된 유물은 사적(史蹟)을 보충해주고, 사적은 연구자료로서 아주 먼 과거의 역사를 밝히는 것이다.

서양과 마찬가지로 동양의 역사도 황해라는 대륙으로 둘러싸인 바다의 주변 국가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수천년 시간의 흐름속에 명멸했던 많은 국가들이 황해를 통해 수많은 교류가 있었으리라는 것은 쉽사리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최소한 조선시대 이전까지 황해의 제해권은 중국과 한반도의 강국들에 의해 주도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학자들간에 논쟁의 여지는 남아 있지만 백제와 고구려 통일신라 발해 고려 등이 강성 했던 시기에는 중국을 압도했을 것이다. 특히 백제는 황해를 통해 중국과 일본에 영향력을 행사했고, 통일신라 때에는 중국과 일본으로 이어지는 해상무역권을 지배하여 그 교역범위를 서양에까지 확대하기도 했다. 일본은 고려 이전까지 우리나라의 도움 없이는 중국과 교역을 할 수 없을 정도였으며, 임진왜란 때까지만 해도 우리보다 조선술이 뒤졌다고 한다.

과거의 주요 교역항과 항로는 황해와 남해의 서부에 집중돼 있었으며 따라서 황해와 주변해역의 해저에는 유물을 실은 채 침몰된 수많은 선박들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신안과 완도유물선이 발견된 이후 해저유물로 신고된 1백80여건 가운데 그 대부분이 황해와 남해의 서부에 위치하고 있음이 이를 증거한다. 특히 1976년 신안에서 발견된 원(元)대 유물선은 엄청난 양의 유물을 가진 보물선이었다. 1322년에 중국에서 일본으로 가다가 난파된 것으로 알려진 이 선박은 발굴 결과 2천6백4점의 송(宋)원대 도자기류와 7백29점의 금속유물, 43점의 석제유물, 중국 동전 28t, 남방산 자단목 1천17본, 그리고 기타 유물 1천3백46점을 싣고 있었으니 전세계 수중고고학계를 놀라게 할만 했다. 28t의 동전은 2백34종류에 8백만개나 됐는데, 이 동전만으로도 1백억원 어치가 넘어 인양에 든 경비의 약 17배나 되었다 한다. 신안유물선은 현재까지 발견된 동양 최대, 최고의 유물선으로 1984년까지 수천 회의 잠수작업을 통해 선박과 함께 거의 완벽한 인양을 하게 됐다. 유물과 함께 오른 선체는 목포소재 문화재연구소 신안유물처리소에서 옛모습을 찾기 위한 복원과정을 밟고 있다. 분리되어 보전 처리되고 있는 수침(水沈) 목재가 조립되어 완전한 모습을 되찾기에는 앞으로도 상당한 시일이 소요돼, 아마 1990년대 중반 이후가 되어야 그 모습이 세상에 공개될 것 같다.

황해는 침몰된 선박이 쉽게 파묻힐 수 있는 퇴적환경과 저층에 상존하는 차가운 수층이 있어 목재 선박들이 큰 훼손없이 보존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다른 바다와 비교해 수심이 얕아 탐사가 용이할 수도 있다. 지중해가 개척자들의 끝없는 노력에 의해 서양 고고학의 보고가 된 것처럼, 황해에서도 역사가 우리의 바다에 남기고 간 유물들을 찾아 나서야 할 때다.
 

신안보물선^1322년 중국에서 일본으로 가다 난파된 이 선박에는 2천여점의 도자기, 7백여점의 금속유물, 28t의 동전이 실려있었다. 사진은 잔해들을 모아 실제 선박의 5분의 1 규모로 재현한 것.
 

울릉도 보물선 돈스코이 호

다이버들이나 바다에 많이 나다닌 사람들은 누구나 한번쯤 울릉도 보물선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바 있을 것이다. 이 보물선은 엄청난 양의 백금괴를 안고 침몰한 러시아 순양함으로 수중계에 종사하는 모든 이들에게 '언젠가는 울릉도 보물선을 찾아 나설거야'하는 꿈을 간직하게 해주는 전설이 되어 있다.

국력이 약하고 역사적으로 불행했던 시기에 우리나라의 바다는 주변 열강의 싸움터였다. 러일전쟁도 그 가운데 하나다. 북만주에서 일본에게 참패했던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는 당시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발틱함대에 일본본토 점령을 명령했다. 34척의 전투함과 보급선 병원선 등 38척으로 구성된 발틱함대는 1904년 10월 발틱해의 리바우항을 출발, 대서양에서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 동지나해를 거쳐 8개월이라는 긴시간이 걸려 대한해협에 도착 했다. 오랜 항해에 지친 발틱함대는 대한해협에서 길목을 지키고 있던 일본 연합함대에 공격당해 전투 한번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피해만 다니다가 블라디보스토크로 귀환한 3척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침몰당하고 말았다. 접전은 대마도 부근에서 시작하여 울산 앞바다, 독도와 울릉도 인근 해역 등 남해에서 동해로 옮겨가며 10여 차례 있었다. 1905년 5월 27일에서 29일 사이의 일이다.

발틱함대에 소속된 함선 중에는 일본 정벌을 위한 군자금 1백50조원 어치의 백금괴가 회계함인 순양함 나히모프호에 실려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나히모프호가 대마도 인근에서 침몰되면서 상당수의 백금괴를 6천t급 순양함 돈스코이호에 옮겨 실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능성은 1980년 초 일본인에 의해 대마도 부근 해저에서 인양된 나히모프호에 엄청난 백금괴(당시 시가로 24조원 상당)가 있었던 사실과 일본의 러일전쟁 해전사 기록에 대마도 부근 해역에서의 첫 해전 이후, 유독 돈스코이호는 싸울 생각을 하지 않고 피해다녔다는 점으로 어느 정도 입증되고 있다.

또 다른 설로는 돈스코이호가 바로 회계함이었으며, 월남의 캄란만에 기항시 프랑스로 부터 인수한 금괴를 싣고다녔다는 것이다. 첫 해전에서 패한 후 돈스코이호는 울릉도 근해까지 도주했으나 일본 함대의 추격으로 침몰지경에 이르게 되자, 함장 이하 3백77명의 선원이 울릉도로 상륙하면서 자침(自沈) 했다. 1905년 5월 29일 이른 아침에 일어났던 일이다.

1980년까지 울릉도 주민 중에는 당시 상황을 목격했던 사람이 생존해 있었다. 목격자들에 의하면 침몰장면 뿐 아니라 침몰 당시 울릉도에 상륙했던 러시아 해군들이 손짓 발짓으로 자신들이 타고왔던 배에 금괴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다이버인 곽경배씨가 1981년 해양연구소에 의뢰해 1차 조사작업을 벌였고 1982년에도 또 한차례 수색작업을 했으나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1982년의 수색작업에는 2백m급 일본 유인잠수정까지 동원됐으나 열악한 조사 장비와 경비 부족으로 지속적인 탐사가 이루어지지 못 했다. 울릉도 주변 해역의 해저 저층은 급경사를 이루고 있어 연안 가까운 곳에서 침몰 했다 하더라도 해류나 다른 자연환경에 의해 깊은 곳으로 내려앉았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천해(淺海)용인 2백m급 잠수정으로는 수색이 애초에 불가능했는지도 모른다.
 

돈스코이호^러일전쟁 당시 울릉도 앞바다에서 침몰한 러시아 순양함. 엄청난 양의 백금괴를 실은 것으로 전해진다.
 

4천m 해저에서 건진 타이타닉호

잠수기술을 비롯한 해중기술(underwater technology) 분야에 있어 선두 국가 중의 하나인 미국은 1912년에 침몰한 호화여객선 타이타닉(Titanic)호와 2차대전 중에 영국 해군에 의해 격침된 역사상 최대의 전함인 독일의 비스마르크(Bismark)호를 최근에 최첨단 해저탐사기술을 이용해 발견한 바 있다. 타이타닉호는 영국 사우샘턴항을 출발하여 미국의 뉴욕으로 가는 처녀 항해에서 침몰한 4만 6천t급 영국의 초대형 여객선. 그 거대한 크기로 인해 불침선임을 자랑하다가 북대서양에서 유빙과 충돌, 좌초하여 4천m에 가까운 심해에 가라앉게 되었다. 타이타닉호의 인양은 이것을 15년 이상 탐사한 발라드라는 한 해양학자의 집념이 이루어낸 결과다. 이와 함께 미국 우즈홀(Woods Hole)해양연구소 소속의 유명한 4천m급 유인잠수정 앨빈(Alvin)호와 6천m급 무인탐사잠수정 아르고(Argo)호 등 첨단 장비들이 동원돼 침몰 후 74년 만에 해저에서 선체를 발견하는데 성공했다. 첨단 장비와 해중기술의 역할이 절대적이었지만 끈질긴 집념과 탐사가 이루어 낸 개가이기도 했다. 미국의 타이타닉호 탐사에는 첨단탐사장비를 실험하고 그 성능을 입증하는데에도 목적이 있었다.

최근 몇년간 적지 않은 수의 첨단탐사 장비가 국내 해양계에 도입되고 있으므로, 장비성능실험을 겸해 울릉도 보물선에 대한 새로운 도전을 기대해볼 만하다.

거북선은 어디에 있나?

우리의 해양사에서 내세울만한 자랑거리가 있다면 장보고의 해상 제패와 이순신 장군의 막강 함대를 꼽을 수 있다. 한 시대를 주름잡던 이들 두 인물에 대한 유물을 바닷 속에서 찾아낼 수만 있다면, 과거의 빛나는 역사를 밝혀낸다는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하고 해양에 대한 관심을 집중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무척 큰 의미를 가질 것이다. 외국에서도 해저에 침몰해 있는 역사적으로 이름난 자국의 배를 인양함으로써 국민들에게 벅찬 감격을 준 바 있다. 스웨덴의 바사호, 영국의 메리로즈호, 미국의 모니터호, 일본의 가이요마루(開陽丸) 등이 이들로 수장된지 1백년~4백년만에 다시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이다.

장보고에 대한 유적은 청해진 터 외에는 전해진 것이 거의 없고 그와 관련된 구체적인 해양 유적에 대한 사료도 많지 않을 뿐아니라 약 1천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지난 통일신라시대의 것임을 감안할 때 해저에서 그 시대 것으로 확인할만한 유적을 발견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하겠다.

그러나 4백여년전 임진왜란의 유적이라면, 7백여년전에 침몰된 신안유물선의 인양으로 보아 장보고의 유물보다는 상대적으로 찾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의 해저유물을 찾는다면, 우선 막강 함대를 지휘하여 민족의 자긍심을 높여 주었던 이순신 장군과 관계가 있는 유적일 것이다. 특히 그 가운데 거북선은 현재 실체가 남아 있는 것이 없고, 국민들의 높은 관심도에 비추어 인양의 주대상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 이순신 장군은 백병전 타입의 중세 해전 방식을 현대전과 유사한 함포전 양상으로 바꾸어 전투마다 승리로 이끌었다. 장군의 함대는 그 당시 세계의 어느 나라 해군과 견주어 보아도 결코 뒤떨어지는 것이 아니었으며, 함포전술도 그후 세계해전사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임란 당시 조선 해군의 주력선은 판옥선(板屋船)이다. 거북선은 학자들에 따라 해전에 참전했던 척수를 3척에서 10척까지 다양하게 추정하고 있으나 전체 판옥선에 비하면 매우 적은 숫자다. 그리고 거북선도 판옥선을 변형한 모습이므로 조선 해군의 전투선은 모두가 판옥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치 사각형의 상자 모양으로 날렵한 모양은 아니나 사용된 목재가 두껍고 강고하며 기동력이 뛰어난 판옥선에, 거북등 모양의 덮개를 덮고 철갑을 한 후 등에는 못이나 칼을 꽂고, 용머리와 그 아래에 도깨비 모양의 충돌용 돌기를 갖추게 한 것이 거북선이라고 한다. 전투에서 거북선의 역할은 선봉 돌격대로서 일본 해군의 조총 공격과 백병전을 사전에 예방하고 상대적으로 선박 목재가 훨씬 약한 전선을 함포 공격을 하면서 충돌함으로써 상대방의 예봉을 일시에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침몰을 부정하는 견해도 있어

거북선에 대한 탐사는 문화재관리국 해군해양연구소 등에 의해 1973년부터 지금까지 아홉차례에 걸쳐 이루어졌지만 아직도 인양에 대한 실마리를 풀지 못하고 있다. 이순신 장군이 함대 지휘를 하지 못했던 시기에 여러 거북선이 침몰했으므로 패전 해역을 중심으로 고성 충무 거제도 여수 인근의 옛 격전지를 조사했으나 대상해역이 매우 넓어 탐색에 어려움이 많았다. 성공적인 인양이 이루어진 외국의 실례를 보더라도 침몰 지점을 분명히 파악해도 실제 발견에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돼 실망할 단계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침몰을 입증할만한, 그리고 침몰위치를 나타내는 뚜렷한 사료가 없고, 침몰 가능성 자체에도 학계에 많은 논란이 있어 해저에서의 거북선 발견이 반드시 희망적인 것만은 아니다. 침몰 자체를 부정하는 쪽의 견해는 거북선은 기동력을 요구하는 전투선이고 배의 체적이나 목재로 보아 큰 부력을 가지고 있어 1백40여명의 인력과 적재된 많은 철제 대포에도 불구하고 적에게 격파가 되어 떠다닐지언정 절대 가라앉지 않는다는 것이다. "설령 가라앉았다 하더라도 상대적으로 훨씬 숫자가 많았던 판옥선이나 일본의 전투함이 한척도 발견되지 않았던 것이 이를 반증하지 않는가"하여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 주장을 펴고 있다. 또한 해당 해역이 해저의 생물 지질학적 여건으로 보아 4백년 이상 목선을 보존할 수 있는 환경인가 하는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

침몰 여부 외에도 거북선이 철갑선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 건조 척수, 이순신 장군의 전술 등 아직도 학술적으로 정리되지 않은 채 거북선에 대한 논쟁이 진행되고 있다. 최근에 발간된 거북선 연구서인 정광수의 '삼가 적을 무찌른 일로 아뢰나이다'에는 도깨비 머리모양의 충돌형 돌기, 철갑에 대한 새로운 주장, 이순신 장군이 구사했던 혁신적인 해전술, 조선시대에 건조된 6백여척의 거북선 등, 알려지지 않았던 거북선의 모습과 색다른 견해들이 피력되어 있다. 세계 해전사와 조선사에 획기적인 유물이 될 것이 확실한 거북선이 인양된다면 국내 뿐아니라 전 세계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킬 것이 틀림없다. 논리적인 논쟁을 차치하더라도 남해의 어느 해저에 자신을 찾아줄 발굴자를 기다리며 남아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부각되는 해중기술

바다에는 유적이나 선박과 함께 있는 보물이 아닌 많은 또다른 보물이 있다. 해양자원은 생물자원과 비생물자원으로 나눌 수 있다. 생물자원은 활용하기에 따라 재생산이 가능하다는 점이 비생물자원과 다른점이다. 생물자원은 인간의 식량자원으로써 각광을 받고 있다. 또한 해양 동식물에서 생리 활성물질 등을 추출하여 유용한 새로운 천연화학 물질을 창출하는 등 그 개발의 여지가 무궁무진하다. 따라서 깊고 엄청나게 넓은 바다에 어떠한 생물이 사는지 알아 내는 것도 중요하다. 특히 바닷속 가장 깊은 곳에서 특수한 생활 방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생물이나 미생물을 활용하는 방법도 제시되고 있다. 비생물자원으로는 석유 천연가스 금 구리 망간 등에서부터 모래 자갈 등 골재에 이르기까지 해저에 부존되어 있는 자원과 중수소 붕소 우라늄 몰리브덴 등 해수중에 용존되어 있는 자원을 들 수 있다. 육상의 자원이 고갈되어감에 따라 해양의 자원에 대한 관심도가 날로 높아지고 있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종류의 유물과 자원이 있는 바다는 하나의 커다란 보물창고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유물을 탐사하고 자원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 해수중이나 해저에서 많은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아주 얄은 바다를 제외한 모든 바닷속은 높은 수압 그리고 짙은 어둠 등으로 육상과는 전혀 다른 환경을 구성하고 있어 인간의 접근을 한층 더 어렵게 하고 있다. 선진 각국은 바닷속 세계를 정복하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바닷속을 탐사하고 개발하려는 기술을 통칭하여 해중기술이라 한다. 잠수기술을 포함한 해중기술분야에서 가장 선진국이라 할 수 있는 프랑스도 불과 20여년 전부터 본격적인 개발을 시작했다. 한 개의 해저유전도 가지고 있지 않은 프랑스가 유전 개발에 기술만 제공함으로써 안정적으로 원유를 공급 받을 수 있다는 점만을 보아도 해중기술의 가치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제 막 걸음마 단계라 할 수 있는 우리나라 해중기술의 발전을 기대하며, 해양의 무한한 자원과 보물에 접근해 꿈을 실현할 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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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08월 과학동아 정보

  • 제종길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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