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에는 또 한번의 새해 첫날을 맞이하게 된다. 바로 우리 민족 고유의 명절인 설날이 있기 때문이다. 서양에서 전파된 발달된 과학기술 속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흔히 서양적인 것이 과학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음력은 미신적인 것이며, 양력이 과학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음력은 달의 운동을 기준으로 날짜를 계산한 지극히 과학적인 방법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사용됐다. 음력과 양력에서 볼 수 있는 이러한 오해는 과학의 다른 부분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우리가 한국의 과학사에 대해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과학사는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 등 과학의 제분야뿐만 아니라, 수많은 과학적 사건과 과학자들의 삶을 포괄하고 있기 때문에, 과학의 넓이와 깊이를 동시에 다루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과학사를 통해 새로운 발견과 만나고 위대한 발명을 목격하면서, 과학의 발전이 구체적인 삶이 숨쉬는 일상생활 속에서 일어난 것임을 실감할 수 있다.
이번 달에는 한국 과학사를 다룬 3권의 대표적인 책인 ‘우리 과학 100년’과 ‘한국과학사’, ‘한국사에도 과학이 있는가’를 소개한다.
우리 과학 100년
우리나라에 서양의 과학기술이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은 19세기 후반이었다. 17세기에 과학혁명을 이루고 그것을 바탕으로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발달을 이룬 서양의 과학기술은 개항과 함께 물밀듯이 조선에 들어왔다.
개항 이전에도 과학을 연구해 훌륭한 성과를 거둔 실학자들이 있었지만 그들의 연구는 조선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개항 이후 들어온 서양의 과학은 급격한 사회의 변화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발전하면서 사람들의 생활양식을 바꿔갔다.
‘우리 과학 100년’은 근현대 한국 과학사를 정리한 책이다. 개항을 전후한 시기에 활약했던 실학자들을 비롯해 한국 과학 발전의 산실이라고 할 수 있는 카이스트와 포항공대까지, 한사람 한사람의 인물과 그 인물을 포함한 시대에 초점을 맞춰 우리나라 근현대 과학의 역사를 쓰고 있다.
이 책에는 과학기술의 발전상뿐만 아니라, 과학계의 분위기와 주요 담론 등이 함께 소개돼 있어, 오늘날 한국 과학사가 어디에 서있는지 가늠할 수 있는 좋은 잣대가 돼준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가 이 책에서 얻을 수 있는 멋진 만남은 4장 ‘한국 근현대사와 함께 한 과학자의 삶’에 실려있는 과학자들에 대한 생생한 증언일 것이다.
이 장에는 나비 박사로 유명한 생물학자 석주명, 씨 없는 수박으로 유명한 유전학자 우장춘, ‘비날론’을 개발한 북한의 화공학자 리승기, 한국이 낳은 세계적 원자핵 물리학자 이휘소 등이 대표적으로 수록돼 있다. 하나같이 어렵고 힘든 조건 속에서 한국 과학을 이끈 이들의 삶을 통해, 과학자를 넘어서 인간으로서 나아갈 길을 볼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큰 보람은 없을 것 같다.
한국과학사
저자 전상운 교수는 이 책을 “내가 그저 좋기만 해서 평생 찾아다니고 쫓아다닌 우리의 과학문화재, 그 유물과 유적에 얽힌 한국 과학의 역사”라고 소개한다. 하지만 책의 목차를 보고 책을 한장한장 넘기다 보면, 누구든 금방 저자의 겸손과는 달리 이 책이 우리나라 과학사를 한곳에 담은 흔치 않은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를 거쳐 우리나라의 전통과학이 어떻게 형성되고, 또 어떤 과정을 거쳐 창조적 과학으로 발달돼갔는지 마치 역사책을 쓰듯이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놓은 책머리를 읽고 난 후, 하늘과 땅의 과학에 다가서보자.
천문과 우주에 관련된 과학을 다룬 ‘하늘의 과학’, 청동기와 토기에 담긴 과학을 다룬 ‘흙과 불의 과학’, 지리지와 지도에 그려진 과학을 다룬 ‘땅의 과학’ 등의 흥미로운 분류를 따라 책을 읽다보면 어느새 청동기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한국 과학사를 모두 탐색할 수 있다. 그밖에도 우리나라의 인쇄기술, 고대 일본과 한국의 과학, 조선시대 과학자와 그들의 업적 등 한국 과학사의 모든 분야를 총망라한 이 책은 한국의 과학과 역사, 문화에 관한 총체적인 보고서라고 할만하다.
사실 저자의 고백처럼 이 책에는 아직까지 본격적으로 연구가 진행되지 않아 엄밀한 학문적 시각으로 본다면 비판받을 내용도 없지 않다. 그러나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이 한국 과학사에 관심을 가지고, 그 속에서 빛나는 영감을 얻어 “우리 전통과학의 참모습을 제대로 쓰고 싶다”고 했던 저자의 바람을 함께 이룰 수 있다면 큰 수확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저자의 ‘한국과학사’가 과학사 연구를 시작한 1세대가 아직은 빈약한 연구성과를 모아 얼기설기 엮은 그물이라면, 한국 과학사의 구체적인 실상이 잡힌 언젠가 후학들에 의해 다시 한번 쓰여질 ‘한국과학사’는 촘촘히 짜여진 옷감 같은 책이어야 할 것이다.
한국사에도 과학이 있는가
다소 도발적인 제목의 이 책은 한국 과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거두 박성래 교수가 누구나 과학사를 쉽게 접할 수 있도록 쓴 책이다. 그런데 심상치 않은 제목처럼 그 내용도 ‘왜 지금 한국 과학사를 생각하게 되는가’로 시작된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수없이 민족 문화의 과학적 우수성과 창의성에 대해 듣고 배운다. 하지만 과학 문화유산에 대해 과연 얼마만큼의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있고, 또 얼마나 제대로 그 가치와 의미를 알고 있을까.
한국 과학사를 다루려면 근대까지는 중국과 일본과의 관계와 그 영향을 함께 놓고 파악해야 하고, 근대 이후에는 서양제국 등 다양한 환경요소를 고려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는 그런 비교 없이 단순히 우리의 과학성을 자랑하는데 그친 측면이 많았다. 그래서 인류 전체의 역사와 전세계를 대상으로 한 과학사에서 한국의 과학과 과학자의 위상을 제대로 자리매김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 책은 모든 발칙한(?) 의문과 상상으로부터 시작된 과학사를 다루고 있다. 첨성대는 제단이었는지, 풍수지리도 과학인지, 세종시대에 번성했던 과학이 그 후에는 왜 쇠퇴했는지, 19세기 우리나라와 일본의 과학에는 어떤 수준의 차이가 있었는지. 다른 사람들은 피하고 넘어가려는 질문을 애써 붙들어 조목조목 따져보며 명쾌하게 답을 내려준다. 그럼으로써 왜 우리가 진정 한국 과학사에 자부심을 가져도 좋은지 생각할 수 있게 해준다.
한국 과학사가 가야할 길
선구적인 업적을 남긴 연구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 한국 과학사는 가야할 길이 먼 것 같다. 연구자들과 일반대중 사이의 벽을 넘어서려는 시도가 여러 분야에서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지만, 한국 과학사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책을 접하기가 어려운 것이 그것을 말해준다.
더구나 한국 과학사를 연구한 책들을 보면 대부분 비슷한 주제를 많이 다루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첨성대, 측우기, 거북선 등은 어린이 책에서 전문 연구자들을 대상으로 한 책까지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소재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과학사는 매우 한정돼 있다.
이에 대해 한 과학사 연구자는 우리나라 과학사 연구가 세계적으로 자랑할만한 과학 문화유산에 치우쳐 있어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지적했다. 즉 고대에서 현대까지 역사 속에 나타난 다양한 과학의 발전에 주목하고, 그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를 통해 과학사의 전체적인 흐름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하는데 아직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또 우리나라 과학사를 발전시킨 인물에 대한 연구가 미흡한 것도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갈릴레이나 뉴턴, 아인슈타인을 비롯해 우리가 기억하는 위대한 과학자들의 이름과 나란히 우리나라 과학자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과학사를 다룬 책이 더 다양해지고, 또 좀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