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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명의 과학자와 결혼한 여성 - 마담 라부아지에

라부아지에의 부인 마담 라부아지에는 19세기 과학계의 풍운아 럼포드 백작과 또 한번의 결혼을 통해 라부아지에와 못다 이룬 과학에 대한 열정을 표현하려 했다. 과학의 역사에서 보기 드물게 동일한 여성과 사랑했던 두명의 과학자, 그리고 한 여성을 만나보자

 

라부아지에 부부의 모습. 마담 라부아지에는 라부아지에의 실험실 조수로서 과학 실험에 참여했으며, 직접 실험노트 를 작성하기도 했다
 


현란한 쫄티를 입은 가수 박진영이 “나에게는 여자가 있는데, 이러면 안되는데…”라는 노래에서 애절하게 호소하듯 사랑하는 남녀에게 최대의 적은 또다른 남자 또는 여자의 출현이다. 이른바 애정의 삼각관계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세사람 모두에게 상처를 주는 경우가 많은데, 과학의 역사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다. 그 주인공은 라부아지에, 마담 럼포드 라부아지에, 그리고 럼포드 백작이다. 물론 이 경우는 한사람이 이미 세상을 떠나고 난 경우라 엄밀히 말해 삼각관계라 보기는 힘들다.

라부아지에(Antone Laurent Lavoisier, 1743-1794)는 ‘근대화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는 파리에서 법률가의 아들로 태어났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얌전히 법학을 공부했지만, 수학과 천문학에 눈을 돌렸고 광물학과 지질학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18세기엔 과학에 전문적으로 종사하고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던 시기였기 때문에 그는 세금 징수원이라는 직업을 계속 갖고 있었다. 혁명 전 프랑스에서 세금 징수원이라는 직업은 그에게 근사한 실험실을 구비하고 값비싸고 정교한 실험기구들을 마련하기에 충분한 수입을 보장해줬다. 같은 시대 영국에서 활동했던 다른 과학자에 비한다면 그는 지나치게 사치스러울 정도로 훌륭한 경제적 여건에 놓여있었던 것이다.

혹자는 라부아지에가 정량화라는 방법을 도입해 화학혁명을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은 화학적 직관이나 실험 능력보다도 그가 누구도 가질 수 없었던 고가의 실험장비와 연구시설을 가진 덕택이었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마치 지구중심설에서 태양중심설로의 전환, 즉 천문학 혁명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던 티코 브라헤(Tycho Brahe)가 당시 가장 정확한 관측 데이터를 가질 수 있었던 이유와 유사하게.

그러나 성공한 과학자로서의 라부아지에를 가능하게 만든 것은 경제적 여건 이상의 무엇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라부아지에는 직장에 출근하기 전 두시간을 과학연구에 몰두하기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났고, 저녁의 세시간을 규칙적으로 과학에 할애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일주일에 하루씩은 온종일 실험실에 파묻혀 친구나 동료와 함께 실험에 관해 논의했다. 그에게는 과학에 몰두하는 그 시간들이 바로 ‘행복의 순간’이었다.


라부아지에가 수행한 과학연 구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산 소의 발견이다.



실험 조수인 어린 아내

라부아지에는 1771년 28세가 되던 해에 결혼했다. 신부는 그보다 14살이나 아래인, 당시 14세였던 소녀 마리 앤(Marie Anne Pierrette, 1758-1836)이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라부아지에가 근무하던 같은 조합의 세금 징수원이었고, 따라서 그녀는 상당히 고급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일찍부터 라틴어와 영어, 그리고 특히 삽화와 동판화 그리기를 익혔던 그녀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소개로 라부아지에를 만났고, 자신이 가진 예술적 재능을 과학에 쏟아 부었다.

마리는 라부아지에의 조력자 역할을 톡톡히 했다. 스스로도 과학에 많은 흥미를 보였던 그녀는 일요일이 되면 병기창에 차려놨던 라부아지에의 실험실로 동행해 온종일 화학실험을 도와줬고 직접 실험노트를 작성하기도 했다. 1788년에 다비드가 그린 유명한 그림은 실험실의 라부아지에와 마리를 모델로 삼고 있다. 그녀는 또 산소이론을 토대로 새로운 화학을 공식화하기 위해 라부아지에가 집필했던 ‘화학의 기초’(Traite elementaire de chimie)에 포함된 13페이지의 동판 삽화를 손수 그려줬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당시 유명한 화학교재인 리차드 커원(Richard Kirwan)의 ‘필로지스톤설’(Essay on Philogiston)을 영어로 번역해 남편을 도와줬고, 남편이 익숙하지 않았던 영어로 라부아지에의 주요 저서를 번역했다.

실험실 조수로서 과학 실험에 직접 참여했으며, 과학서를 영어와 불어로 번역함으로써 프랑스와 영미권 독자에게 과학을 소개하는데 크게 기여했던 마담 라부아지에.그녀에게 남편의 비극적인 죽음은 엄청나게 당혹스러웠다. 혼자 남은 마담 라부아지에는 그가 생전에 행한 과학적 명성을 찾아주기 위해 실험노트를 꼼꼼히 정리하고, 이를 회고 글과 함께 출간했다.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과학자

라부아지에가 수행한 과학연구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산소의 발견이다. 당시 유행하던 이론인 필로지스톤설에서는 물체가 타는 현상인 연소를 물체로부터 필로지스톤이라는 물질이 방출되는 것으로 설명했다. 하지만 연소 이전과 연소 이후에 물체의 총 무게를 정량적으로 측정한 라부아지에는 연소 후의 무게가 더 증가한다는 사실을 밝혀냈고, 그것은 바로 물체가 공기중의 산소와 결합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1775년 라부아지에는 화약의 성능을 개선하기 위해 병기창의 주임으로 임명됐고 정치에 말려들게 됐다. 특히 프랑스에서 과학자들은 정부의 일에 관여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영예로운 프랑스 과학아카데미가 국가기금으로 운영되고 소수 선별된 회원들에게 월급을 줬기 때문이었다. 라부아지에는 그런 과학자들 중 대표적인 인물로, 지구의 자오선을 측정해 정한 1m의 표준 길이에 토대한 미터법 개혁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1790년대 프랑스는 혁명의 소용돌이에 휩싸였고, 배고픈 국민들은 빵을 달라고 외치며 격노했다. 새로 정권을 잡은 급진파 공화당원에게 세금 징수원은 국민 착취의 주요 대상이었다. 특히 재판관이었던 마라는 한때 과학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될 뻔하다가 라부아지에의 반대로 무산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라부아지에에게 나쁜 감정을 갖고 있었다. 그런 마라에게 세금 징수원으로 벌어들인 돈을 모두 과학 실험에 조달했다는 라부아지에의 설명은 한낱 변명으로 들릴 뿐이었다. 결국 과학아카데미는 그의 생을 단축시키고 말았다.

1794년 5월 라부아지에는 장인과 함께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져갔다. 그의 제자 라플라스는 “라부아지에의 목을 치는 데는 1분밖에 걸리지 않지만 그와 같이 위대한 과학자를 얻기 위해 프랑스는 앞으로 1백년을 더 기다려야 할 것”이라며 깊은 한탄 속에 빠졌다. 혁명 정부가 과학을 이해하기에는 아직 시기적으로 너무나 일렀던 것이다.


과학계의 풍운아 럼포드 백작

미국 태생 과학자인 벤자민 톰슨(Benjamin Thomp son, 1753-1814)의 경력은 매우 이채롭다. 웨스트 포인트에 있는 미국육군사관학교의 설립을 제안했던 정치가이자 전략가였다. 군인이기도 하고 반역자이기도 했다. 귀족이 된 다음에는 사회 개혁을 추진했다.

게다가 그는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지를 돌아다니며 사방에서 과학의 여러 분야에서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친 과학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국제적 평판을 얻은 과학자 가운데에서 톰슨, 그 만한 악당을 찾기는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톰슨은 원래 유산이 많은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할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유산을 한푼도 받지 못한 거지 신세가 됐다. 새로 들어온 계부는 그를 의류상의 심부름꾼으로 보냈는데, 호기심이 많던 소년은 화약놀이를 하다 불을 내고 부상을 입었다. 다시 계부의 손에 이끌려 이번에는 의사의 심부름꾼으로 일하게 된 톰슨은 짬짬이 의사의 책들을 훔쳐보면서 과학에 대한 열정을 키워갔다.

빨간 머리에 잘 생기고 훤칠한 -사실 그는 지나치게 큰 매부리코로도 유명했다 - 그는 19세 때 11살이나 연상인 돈 많은 과부를 만나면서 일생의 대전환점을 맞이했다. 젊은 유지가 된 그는 뉴햄프셔 군대의 소령이 됐는데, 영국인 스파이 노릇을 했다는 이유로 재판에 회부됐다. 그러자 톰슨은 “그 여자가 나와 결혼했던 것이지 내가 그 여자와 결혼했던 것은 아니다”라며 부인과 딸을 버리고 영국으로 도주해버렸다.

런던에 도착한 톰슨은 모래 자루를 천장에 매달아 총을 쏘면서 자루가 흔들린 정도로 화력을 측정한 실험 논문으로 27세 때 왕립학회의 회원이 됐다. 하지만 다방면에 걸친 관심과 명예욕은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그는 독일로 건너가 정치계에 뛰어들었고, 곧 백작의 작위를 부여받았다. 이때부터 그는 스스로를 럼포드 백작으로 부르기 시작했는데, 럼포드는 그가 어릴 적 살던 뉴햄프셔의 한 마을 이름이었다.

1799년 그는 과학의 역사에서 길이 빛날 중요한 일을 시작했다. 런던 왕립연구소의 창설이 그것이다. 왕립연구소는 패러디, 틴들, 헉슬리 같은 대표 과학자들이 수준 높은 대중을 상대로 과학강연을 활발하게 수행하던 곳으로,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크리스마스 강연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또한 영국왕립학회와 미국과학재단에 기금을 후원해 뛰어난 과학자들에게 매년 럼포드 메달을 수여하게 했고, 하버드대에 기금교수 자리를 신설했다. 이들 모두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과학계의 풍운아 럼포드 백작



살롱에서 맺어진 인연

1805년 그는 독일로 가는 길에 나폴레옹의 초청을 받고 잠시 프랑스에 머물렀다. 여기에서 그는 당시 파리의 살롱을 중심 무대로 과학에 대한 생각을 활발히 토론하던 마담 라부아지에를 만났다. 과학에 관한 대화가 통했던 두사람은 곧 서로에게 이끌렸고, 럼포드가 이룩한 업적에 깊은 감명을 받았던 5살 연상의 마담 라부아지에는 그에게 청혼했다. 럼포드는 독일행을 포기하고서 곧 마담 라부아지에와 결혼했고, 이들의 신혼은 파리에서 시작됐다.

이때부터 마담 라부아지에는 스스로를 마담 럼포드 라부아지에로 불렀다. 두사람의 결혼 생활은 4년 동안 지속됐다. 하지만 이들은 서로의 강한 성격 때문에 이혼에 합의했다. 라부아지에와 함께 했던 과학에 대한 열정을 럼포드 백작을 통해 다시 표출하려 했던 마담 라부아지에의 선택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던 것이다. 럼포드는 이혼 후 “라부아지에가 단두대에서 사라진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을 것”이라는 심한 말을 남겼다고 한다. 분명 럼포드보다 20년이나 더 오래 살았던 마담 라부아지에는 그 말에 응대했을 것이나 그녀의 말은 없다. 아니 그녀가 했던 말이 기록에 남겨지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라부아지에와 마담 라부아지에 부부, 마담 럼포드 라부아지에와 럼포드 백작 부부는 동일한 시대를 살다간 과학자 부부들이다. 이 부부들의 공통점은 과학에 대한 대단한 열정을 품고 있었다는 것이며, 시대적으로 어려운 상황과 맞서면서도 과학을 실행하려고 많은 애를 썼다는 것이다.

라부아지에와 럼포드는 과학자로서 정치에 참여했다가 정치 때문에 과학자로서의 생을 마감하거나 도주해야 했던 경우로, 바야흐로 과학과 정치의 밀약시대가 도래함을 예고했다. 그 사이에서 라부아지에의 아내였다가 럼포드 백작의 부인이 된 마담 럼포드 라부아지에는 여성 과학자가 걸었던 하나의 길을 보여줬다. 하지만 오늘날 마담 라부아지에 럼포드가 되지 않아도 과학을 할 수 있다는 사실로 만족하는 사람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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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02월 과학동아 정보

  • 조숙경 박사후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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