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의 역사를 읽다보면 제대로 저항 한번 못하고 처참하게 무너지는 육군의 무기력함에 심한 분노와 좌절감을 느낀다. 그래도 우리의 자존심을 조금이라도 살려준 싸움은 이순신 장군이 이끈 해군의 승리일 것이다. 승전보의 한가운데는 이순신 장군의뛰어난 전술이 있었지만 거북선을 비롯한 우리 전투함의‘박치기’실력도 한몫을 했다.
임진왜란으로 온 나라가 들끓던 선조 29년(1596) 11월7일, 왜적의 침입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임금이 말씀하시길 “거북선은 사면을 판옥으로 꾸미고 형상은 거북 같으며 쇠못을 옆과 양머리에 꽂았는데, 부딪치는 왜선은 모두 부서진다”고 했다. 박치기 한방으로 상대를 메트 위에 시원하게 눕히는 프로레슬러 김일 선수의 모습이다. 조금은 무지막지한 수법 같지만 당시로서는 가장 효과적이고 속시원한 공격이었다.
박살난 일본 배에서 아우성쳤을 일본병사를 생각하면 땅위에서 당한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반쯤이라도 풀리는 듯하다.
단단하고 질긴 조선의 나무
박치기에 이기는 데는 우선 들이받는 배의 강인한 구조와 함께 단단한 뱃몸이 필요하다. 우리 배가 강한 이유는 무엇보다 배의 겉판이나 밑판을 만든 나무의 강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리 배는 다른 나라의 배와는 달리 등뼈라고 할 수 있는 용골이 없고, 밑이 편평한 사각통 모양의 평저선 형태다. 구조가 이렇다보니 배의 강도가 약할 것은 당연하다. 이런 단점을 보강하기 위해서는 두꺼운 판자를 쓸 수밖에 없다.
조선시대 싸움배에 관한 기록과 당시 숲의 구성을 볼 때 거북선의 뱃몸은 대부분 소나무로 만들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소나무는 여름에 만들어진 단단한 세포가 나이테 속에 많이 포함돼 있어, 배의 겉판을 만드는 나무 종류 중에는 다른 어떤 나무보다 단단하다.
배 자체만으로도 튼튼한데, 박치기에 알맞도록 주요 부위는 더 강한 나무로 보강했다. 주로 참나무, 가시나무, 녹나무와 같은 나무를 썼다. 실제로 조선시대 싸움배의 앞부분은 진목, 즉 참나무로 만들었다. 참나무는 1${cm}^{3}$에 5백kg의 압축강도를 견딜 만큼 단단하고 질기다. 또한 이보다 더 단단한, 참나무의 다른 종류인 가시나무도 적극 이용됐다. 정종 18년(1794) 호남 위유사 서용보는 임금께 올린 글에서 ‘가서목은 강하고 질긴 좋은 재목으로서 군용으로 수요가 크다’고 했다. 가서목은 오늘날의 가시나무를 말하며 나무의 특성상 배를 만드는데 요긴하게 쓰였다.
일본 배는 어떤가. 일본의 산에는 우리처럼 소나무가 흔하지 않다. 대신 삼나무나 편백나무가 주로 자란다. 곧고 빨리 자라는 이점은 있으나 무르고 약하다. 이런 나무로 만든 배는 우리의 소나무 배와 부딪쳤을 때 당해낼 재간이 없다. 그래서 처음부터 싸움 전략이 우리와 다르다. 우리 배에 살짝 갖다 붙이고 건너와서 칼로 제압하는 전술이다. 속도가 빠르고 움직임을 쉽게 하도록 배를 만들어야 하니 뱃몸 판자의 두께도 얇고 배의 전체 크기도 작은 것이 유리하다.
이처럼 크기도 클 뿐더러 참나무를 비롯한 단단한 나무로 주요부위를 보강한 우리 배로, 일본 배를 향해 ‘돌진 앞으로!’를 감행하면 다음 상황은 볼 것도 없다. 꼭 정면 박치기가 아니라 옆면으로 부딪쳐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우리 배를 만들 때 배의 너비 방향을 고정하고 튼튼히 할 목적으로 장쇠라는 가로 버팀목을 쓰는데, 이 역시 참나무나 가시나무다. 기본적으로 조선재료의 우수성 때문에 임진왜란의 해전에는 일본 배가 맥을 추지 못했다.
정확한 생김새 알지 못해
임진왜란 때 거북선의 활약은 대단했다. 수백척의 일본 전함 속을 종횡무진 휘젓고 다니면서 닥치는 대로 부수고 태워버린다. 도망가는 배는 천자총통이나 황자총통을 비롯한 대포로 망가트리고, 가까이 어른거리는 배는 용머리로 화염을 내뿜어 태워버린다.
하지만 거북선의 진짜 모양을 알 수 있는 자료가 너무 부족해 조상의 위대한 발명품을 명확히 재현하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어떻게 만들었고 크기는 어느 정도이며 생김새는 어땠는지. 무엇하나 우리의 궁금증을 속시원하게 풀어주지 못한다.
거북선의 생김새에 관한 비교적 상세한 기록은 선조 25년(1592) 5월 1일자 실록에 실려있다. ‘이순신은 전투 장비를 크게 정비하면서 자의로 거북선을 만들었다. 이 제도는 배 위에 판목을 깔아 거북 등처럼 만들고 그 위에는 우리 군사가 겨우 통행할 수 있을 만큼 십자로 좁은 길을 내고 나머지는 모두 칼·송곳 같은 것을 줄지어 꽂았다. 그리고 앞은 용의 머리를 만들어 입은 대포 구멍으로 활용했으며 뒤에는 거북의 꼬리를 만들어 꼬리 밑에 총 구멍을 설치했다. 좌우에도 총 구멍이 각각 여섯개가 있었으며, 군사는 모두 그 밑에 숨어 있도록 했다. 싸울 때는 거적이나 풀로 덮어 송곳과 칼날이 드러나지 않게 했는데, 적이 뛰어오르면 송곳과 칼에 찔리게 된다’는 내용이다. 한마디로 고슴도치 지혜를 빌린 것이다. 주요부분만 겨우 가리는 야만적인 ‘훈도시’ 차림으로 칼 들고 함부로 뛰어들었다간 크게 경을 칠 일이다.
그러나 이런 기록만으로 확실한 거북선의 모양을 재현할 수 없어서 논란이 많다. 거북선의 실제 모양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잠재우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혹시 남해안 어디엔가 가라앉아 있을지 모르는 실물 거북선을 인양하는 방법이다. 1989년 노태우 대통령 시절, 해군사관학교에 ‘충무공해전유물발굴단’이 발족했다. 1996년까지 7년에 걸쳐 기초조사를 하고 자리를 잡아갈 즈음, 발굴단 자체의 불미스런 일로 잠시 해체되었다가 1998년부터 다시 업무를 시작했다. 남해안의 임진왜란 격전지를 중심으로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인양 작업이 어려운 이유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은 과연 우리가 바라는 대로 그 웅장한 모습을 나타낼 수 있을까. 실망스럽게도 거북선 자체를 인양할 가능성은 그렇게 많지 않다.
우선 기록으로 봐서 임진왜란 때 만들어진 거북선은 3척에 불과하다. 전라좌수영에서 건조된 영귀선, 방답진에서 만들어진 방답귀선, 순천부의 순천귀선이 전부다. 김재근 전 서울대 교수의 추정에 따르면, 임란이 끝난 후 숙종 때까지는 5척 정도 있었으며 정조 때에는 40여 척으로 늘어났다가 순조 8년(1808)에는 30척으로 차츰 줄어들었다고 한다.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임란 때의 3척 중에서 1척을 인양하는 것이고, 아쉬운 대로 임진왜란이 끝난 후 만들어진 수십척 중 1척이라도 건져 올린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 배와 싸움을 벌린 주체는 3척밖에 없는 거북선만이 아니고, 사실은 판옥선이라 불리는 일반 전투함이다. 거북선과 거의 같으나 거북 등 모양으로 덮여진 지붕이 없고 병사들이 갑판에 바로 노출돼 있는 구조다. 기록으로 알려진 것만 수백척에 이르니 판옥선이라도 인양할 수 있다면 거북선 복원은 가능할 것이다.
다음은 가라앉은 거북선이 바다 속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남아 있을까 하는 문제다. 침몰한 나무배에는 제일 먼저 목선천공충(shipworm)과 바다나무좀 (limnoria)이라는 바다벌레들이 덤벼든다. 목선천공충은 머리에 작은 조개껍질을 뒤집어쓰고 있는데, 목재 표면 여기저기에 구멍을 뚫어 아늑한 살림집을 마련한다. 또한 주위를 배회하던 바다나무좀은 목재 표면을 조금씩 헐어 나무질 자체를 양분으로 먹어버린다.
옛사람들은 배를 처음 바다에 띄우기 전이나 사용중에도 가끔씩 끌어 올려 표면을 불로 그슬러 얇은 탄화층을 만들어 이 녀석들을 몰아냈다.
따라서 가라앉은 배가 오랫동안 남아있기 위한 조건은 이들의 침입을 막아줄 갯벌(개흙)이나 모래가 얼마나 빨리 얼마나 두껍게 침몰선을 덮어 버리느냐에 달려있다. 바다벌레는 이렇게 덮인 두꺼운 이불을 뚫고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안전한 것은 아니다. 이번에는 나무의 뼈대가 되는 셀룰로오스 성분만 분해하는 연부후균(soft rot)이 기다렸다는 듯이 덤비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세균의 분해 속도는 너무 늦어 두꺼운 나무를 먹어치우는 데는 수백년이 걸리니, 임진왜란 때의 배 정도는 아직 남아있을 수 있다.
한때 나무배는 바닷물보다 비중이 작으므로 가라앉을 수 없어 인양작업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의견도 있었다. 비중이란 무게를 부피로 나눈 값인데, 거북선을 만든 소나무의 비중이 0.5이고 바닷물 비중이 1.03이므로 이론적으로 나머지 무게가 보태지지 않으면 그대로 떠있다는 논리다. 과연 그럴까. 나무의 횡단면을 잘라 전자현미경으로 관찰해보면 마치 벌집을 연상시킨다. 육각형 모양이 진짜 나무부분(세포벽)이고 나머지는 빈 공간이다. 나무가 물 속에 들어가면 우선 세포벽이 물로 포화되고 이어서 공간 속으로 물이 스며든다. 그런데 빈 공간을 제외한 세포벽 자체 비중은 1.5정도이고, 빈 공간에 물이 차 오르면 전체의 평균비중은 바닷물의 비중을 넘어서게 돼 가라앉을 수밖에 없다.
임진왜란 때의 거북선이나 판옥선을 비롯한 전투함이 어디에 침몰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기록에 나와 있는 몇개의 격전지 중 뻘이 발달하고 조수의 흐름이 빨라 쉽게 묻힐 수 있는 지역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80년대 초에 인양한 신안 앞 바다의 송·원나라 무역선과 완도 어두리 앞 바다의 고려 초기 화물운반선이 가라앉아 있던 장소는 모두 이런 조건을 갖추고 있다. 남해안에는 기록으로나 지형으로 보아 묻혀 있음직한 장소가 여럿 있다. 그러나 이런 곳의 대부분이 현재는 양식장으로 활용되고 있어서 조사를 위한 탐사선이 함부로 활동할 수 없는 것이 가장 큰 제약이다. 이순신 장군의 영광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자랑스런 해군과 함께, 거북선과 판옥선이 우리 앞에 모습을 나타내주기를 끈기 있게 기다려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