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탐사는 화려한 화성탐사에 가려있었다. 미국은 쓰다 남은 탐사선을 보냈고 카메라조차 실지 않기도 했다. 반면 옛소련은 숱하게 지옥같은 표면에 착륙까지 시도했고 끝내 성공했다. 탐사선들이 벗겨나간 금성의 참모습을 2회에 걸쳐 살펴보자.
우리가 뜨거운 금성의 모습을 받아들인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40년 전만 해도 고온과 고압의 금성은 상상할 수도 없는 모습이었다. 1609년 갈릴레오가 처음으로 망원경을 이용해 관측한 이래 두꺼운 구름에 가린 금성의 참모습을 본 사람은 없었다. 어떤 이는 구름 사이에 빈틈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찾아봤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금성의 구름은 관측의 한계인 동시에 상상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이 구름을 거대한 수증기 구름으로 주장한 사람은 금성에서 소철나무가 무성하고 왕잠자리가 나는 거대한 늪지의 모습을 떠올렸다. 잃어버린 쥐라기공원 같은 즐거운(?) 상상은 1920년 금성의 스펙트럼 조사로 약간 변경됐다. 구름은 물기 하나 없는 이산화탄소가 주성분이었기 때문에 늪지는 석유나 탄산수의 바다로 바뀌어야 했던 것이다.
1959년 레이더 관측장비가 동원되자 혼란스러운 정보가 금성으로부터 왔다. 구름을 뚫고 나온 전파의 잡음은 금성 표면이 매우 뜨겁다는 사실을 얘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표면이 아니라 대기가 뜨겁다는 식으로 관측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물론 당시 미국 시카고대의 젊은 박사인 칼 세이건은 이산화탄소에 의한 온실효과를 이론으로 제시하며 뜨거운 금성의 모습을 주장했으나, 이런 주장은 SF소설 정도로 여겨졌다.
두꺼운 대기가 빚어낸 낯선 모습
금성에 대한 최초의 우주탐사는 1961년 옛소련로부터 시작됐지만, 탐사선의 성능이 변변치 못했던 탓에 1965년까지 14회의 시도가 무위로 돌아갔다. 이 틈에 어부지리로 미국이 금성탐사에 최초로 성공했다. 1962년 마리너 2호가 발사 4개월 후, 무사히 금성에 근접해 간접적으로 금성의 온도를 측정했던 것이다. 결과는 놀랍게도 4백℃ 이상.
하지만 옛소련 과학자들은 이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옛소련은 자체 관측으로 금성의 온도가 60-80℃ 정도이며 기압은 지구보다 5배 이상 넘지 않을 것으로 가정했다. 심지어 석유의 바다로 덮여있을 것에 대비해 가라앉지 않는 착륙선을 설계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제작된 베네라 4호는 1967년 금성 표면에 착륙을 시도하며 신호를 보내왔다. 측정한 최고 온도는 2백70℃.
미국 또한 같은 시기에 금성으로 다시 한번 탐사선을 파견했다. 화성에 주력하던 미국은 경비를 절감하기 위해 화성탐사선 마리너 4호의 백업용(지상시험용)으로 제작된 탐사선을 긴급 개조, 금성탐사선 마리너 5호로 변신시켰다. 이전 탐사선과 큰 차이는 열방어 기능을 보완했고 전파관측을 위한 카메라를 탑재하지 않았던 점이다. 카메라의 중요성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두꺼운 구름으로 찍을 것이 별반 없을 것 같은 금성탐사에서 카메라가 차지하는 무게와 전력은 사치에 불과했다. 베네라 4호보다 이틀 늦게 도착한 마리너 5호는 금성의 온도와 기압을 추정했다. 탐사선의 조그마한 안테나와 지구의 거대한 심우주 전파안테나를 활용한 실험 결과, 금성표면의 온도가 적어도 4백30℃이며 기압은 지구의 75-1백배임이 나타났다. 베네라 4호와는 차이가 많이 나는 결과였다.
미국은 마리너 5호 탐사로 생명체의 존재가능성에 관한 ‘라이프 리스트’에서 확실히 금성을 제외시켰고 유인 달탐사나 화성탐사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하지만 옛소련은 달랐다. 유인 달탐사와 화성탐사에서 참패를 당하던 옛소련은 금성에서 희망을 찾고자 했다.
옛소련은 1969년 베네라 5·6호를 다시 금성의 대기 속으로 밀어넣었다. 모두 진입과정에서 파괴됐지만 3백20℃까지 측정했다. 마리너 5호의 관측결과와 비슷하게 고온을 나타내는 값이었다. 옛소련 행성과학자들은 비로소 금성이 고온고압의 지옥과 같은 행성이라는 이미지를 받아들였다. 따라서 착륙선을 절대적으로 보강해야만 했다. 1970년 발사 예정인 베네라 7호는 뜨거운 대기와의 마찰시간을 줄이기 위해 낙하산의 크기를 대폭 축소해 신속히 표면에 도달하도록 했다. 그리고 착륙선을 이산화탄소로 가득한 밀폐실에서 1백20기압과 6백℃의 가혹한 환경으로 단련시켰다. 이제야 진정한 금성 착륙선의 조건이 갖춰진 것이다.
그러나 실제상황에서 베네라 7호는 착륙 후 신호가 갑자기 끊어져 실망을 안겨주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탐사선이 최후까지 보내온 신호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매우 약한 신호가 발견됐다. 이를 단서로 추정된 온도는 무려 4백75℃. 옛소련이 19번의 시도 끝에 달성한 업적이었다.
1972년에는 옛소련의 베네라 8호가 다시 착륙했다. 이에 자극을 받은 미국은 마리너 10호로 수성으로 가는 도중에 금성을 방문하도록 해 체면을 살리고자 했다. 마리너 10호는 처음으로 광학적인 금성의 모습을 4천여장 찍어 기상변화를 연구하는 자료를 제공했다. 반면 옛소련은 더욱 야심찬 계획을 수립했다. 온도계만 가져갈 것이 아니라 카메라를 사용해 한번도 보지 못했던 금성 표면을 찍어보자는 것. 수정렌즈로 된 특수카메라와 희미한 햇빛을 고려해 조명기가 착륙선에 부착됐다.
1975년 마침내 베네라 9·10호가 역사적 임무를 띠고 금성에 무사히 착륙해 흑백사진을 찍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1982년에는 베네라 13·14호가 착륙 장소 선정에 미국의 파이어니어 비너스호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착륙한 후 금성표면에서 컬러사진을 찍어 보내왔다. 행성으로부터 온 사진들은 궁금증을 해결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더욱 많은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금성 표면 사진도 그랬다. 두꺼운 대기에도 불구하고 사진 속의 표면 광경은 지구의 다소 흐린 날 정도에 불과했다. 전체적으로 오렌지색 풍경이었는데, 이는 두꺼운 대기가 푸른색을 모두 흡수했기 때문이다. 표면은 석유 대신 돌로 덮여있었다. 베네라의 컬러사진 모퉁이에는 하늘도 살짝 보였다. 두꺼운 대기의 굴절현상으로 왜곡돼 신기루처럼 굉장히 가까이 보이는 오렌지색 하늘이었다. 금성탐사가 시작되고 22년만에 지옥의 행성 금성에서 인류는 오렌지색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