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이 학문의 한분야로 정착되지 못했던 시절, 과학연구와 과학교육의 정착을 위해 대를 이어 봉사해온 과학자 가문이 있다. 바로 케임브리지대의 캐번디시 물리학 연구소를 설립한 캐번디시 가문이다.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보자.
향토음식을 자랑하는 행락지에서 사람의 마음을 끄는 식당의 간판에는 늘상 ‘원조’니 ‘몇대를 이었다’느니 등의 수식어가 붙어있다. 무언가 다를 것 같고 음식의 맛을 보장받는 듯한 느낌은 손님들을 식당으로 유인하고, 그 식당의 성공을 보장한다.
사실 대를 이어 어떤 분야에 종사한다는 것은 많은 유혹을 감수해야 하는 어려운 일이다. 물론 사회적으로 돈과 명예가 따르는 분야라면 문제되지 않겠지만, 아직 인정받지 못한 새로운 분야이거나 경제적으로도 보잘 것 없는 분야라면 더욱 그러하다. 17세기 영국에서는 과학이 아직 정착된 학문분야가 아니었다. 게다가 과학은 사회적 유용성을 실현해 보여주지도 못하던 전혀 새로운 분야였다. 케임브리지대의 캐번디시 연구소를 설립한 캐번디시 가문은 바로 이러한 때, 과학연구와 교육을 앞장서 실천하고 후원해온 과학사랑 가문이었다.
망명생활을 과학으로 극복
부유한 토지귀족의 딸로 태어나 한순간에 가족과 재산을 모두 잃고 고아가 된 마가렛(Margaret Lucas Cavendish, 1623-1673)은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사실 뉴턴과 같은 시대를 살다간 여성과학자다. 어렸을 적 가정교사에게서 ‘낡아빠진 아리스토텔레스식 과학’을 약간 습득한 적이 있던 그녀는 찰스 1세가 처형되는 영국 역사상 가장 혼란스런 때를 넘기면서 전혀 예상치 못한 삶을 살았다.
1643년 마가렛은 크롬웰에게 쫓기는 왕비를 모시고 프랑스 파리로의 긴 망명길에 올랐다. 불안과 무기력으로 가득 찼던 그녀의 삶은 당시 53세이던 뉴카슬 공작, 윌리엄 캐번디시를 만나면서 활기를 띠게 됐고, 20세의 그녀는 완전히 새로운 지적 세계로 들어갈 수 있었다(윌리엄과 마가렛 사이의 장남인 윌리엄 캐번디시는 제1대 데본셔 공작이 된다. 데본셔는 영국의 지명이다).
당시 파리는 학문과 문화의 중심지로, 데카르트를 비롯해 홉스, 가상디 등이 파리 교외에서 정규적으로 모이면서 새로운 자연철학의 가능성을 꿈꾸고 있었다. 이들 기계적 철학자들은, 정교한 시계를 제작한 시계 기술자가 당연히 존재하듯 우주라는 정교한 기계를 창조한 신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우주를 그 구성 입자와 입자의 운동으로 설명해내는 새로운 과학철학은 2천년을 버텨오던 아리스토텔레스의 그것을 훌륭하게 대체해냈고, 이제 캐번디시 부인이 된 마담 마가렛은 세계적인 지적 동료들에게 자신의 견해를 토로했다.
18년이라는 긴 망명생활을 접고 1666년 런던으로 되돌아온 마가렛은 프랑스에서의 지적 경험을 토대로 ‘자연철학에 관한 관찰’을 출간했다. 당시는 과학이라는 용어가 아직 출현하지 않았고, 자연을 대상으로 삼았던 지적 사고의 총체를 자연철학이라고 불렀다. 또한 그녀는 그로부터 3백년이 더 지나야만 여성이 회원이 될 수 있었던 왕립학회를 방문해 보일과 후크 등의 실험을 목격하는 역사적 현장에 있었고, 그것을 자세하게 보고하는 글을 남겼다. 힘들었던 망명생활을 과학에 대한 열정으로 승화시켰던 마가렛은 과학을 사랑했던 캐번디시 가문의 최초의 여성이었고, 그녀의 과학사랑은 캐번디시 가문에 대대로 이어졌다.
제4대 데본셔 공작 윌리엄 캐번디시(제1대부터 제7대까지 데본셔 공작의 이름은 모두 윌리엄 캐번디시였다)의 친척이며, 수소를 발견한 인물로 유명한 헨리 캐번디시(Henry Cavendish, 1731-1810)는 사실 고독하고 특이한 삶을 살다간 독신 과학자다. 케임브리지대를 다녔지만 학위를 받지 못했고,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을 즐겼지만 청년이 된 이후에는 너무 높고 날카로운 목소리 때문에 늘 웃음거리가 되곤 했다. 이 때문에 그는 특히 심한 여성기피증을 보였고, 종국에는 여성 대신 과학과 결혼하는 삶을 선택했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홀로 보내기를 즐겼다. 어느 날 그는 먼 삼촌으로부터 예기치 않게 거대한 유산을 물려받았다. 대저택을 구입하고 도서관을 꾸몄으며, 과학연구를 위한 여러 기구들을 사들였고 시중들 수명의 하녀들도 뒀다. 그런데 그는 오다가다 하녀들과 마주치고 또 명령을 내리는 것이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고민 끝에 그는 식사주문이나 세탁과 관련된 모든 지시사항을 쪽지로 책상 위에 남겨 뒀고, 하녀들을 피해 혼자만 사용할 수 있는 비밀 출입구를 만들어버렸다.
캐번디시의 연구는 주로 공기에 관한 것이었다. 18세기 당시는 기체화학이라는 새로운 분야가 성립되던 시기로, 공기가 단일 물질이 아님을 밝히는 작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그는 지하 실험실에 파묻혀 지내면서 공기 중에서 수소(당시는 비가연성 공기로 불렀다)와 이산화탄소(고정된 공기)를 구별해냈으며, 기체들의 정확한 무게를 측정하려고 시도했다. 당시는 고무풍선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돼지오줌보를 이용해 수소와 산소를 모은 다음 두기체를 합성하는 수백번의 실험을 반복했고, 병 속에 무색의 액체를 얻었다. 실험은 매번 커다란 폭발음을 냈고, 이에 집안의 하인들은 깜짝 놀라 어찌할 줄 몰랐다고 한다. 그는 거리낌 없이 이슬처럼 맺힌 액체를 마신 다음 그것이 물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밝혀냈다.
과학단체 모임 이외에는 외부에 나타나지 않았던 그의 삶처럼 캐번디시의 과학연구도 대부분 출간되지 않았다. 다행히 옴의 법칙을 예견한 전기 부분은 캐번디시 가문과 이름을 세상에 빛나게 한 ‘캐번디시 불독’인 맥스웰에 의해 편집됐다. 찰스 다윈이 사실 세상에 빛날 수 있었던 것이 ‘다윈의 불독’ 헉슬리 때문이었던 것처럼. 그는 또한 지구의 평균밀도를 측정한 최초의 과학자이기도 한데, 그의 정확한 실험은 오늘날 ‘캐번디시 실험’으로 불리고 있다.
언제 그가 들어왔고 또 언제 나갔는지를 아는 하인이 아무도 없을 정도로 베일 속에 살면서 외로운 실험실을 지켰던 캐번디시는 오늘날로 환산할 때 1백만파운드(약 20억원)가 넘는 돈을 유산으로 남겼다. 자식이 없었던 탓에 그의 유산은 모두 캐번디시 가의 재산이 됐고, 케임브리지대의 총장을 지내던 제7대 윌리엄 캐번디시는 그를 기념해 캐번디시 물리학 연구소를 설립했다.
물리학의 메카 캐번디시 연구소
굴뚝을 청소하는 빨강머리 앤이나 신문을 파는 어린 소년은 19세기 영국사회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어린이들은 학교에 갈 수 없었고 경쟁이 치열한 산업사회에서 먹고살기 위해 힘겨운 노동을 해야 했다. 그럼에도 정부는 자유방임주의를 최고의 가치로 외치며 모든 인간의 활동에 최소한 간섭주의를 표방했다. 물리학을 포함한 과학교육이나 과학연구도 예외일 수는 없었고, 만약 그것을 시작하려면 그것은 국가가 아니라 순전히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가능했다. 1868년 케임브리지대는 독일 대학들에 뒤지는 것을 만회하기 위해 물리학우등시험이라는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학생들을 과학으로 유도하려 했으나 물리학을 가르칠 교수가 부족했고 물리학을 담당할 교수좌도 마련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선뜻 6천3백파운드라는 거금을 희사함으로써 물리학 연구소를 짓게 했던 인물이 바로 제7대 데본셔 공작 윌리엄 캐번디시다(당시 19세기에는 어린이들이 하루 종일 일하고 1년 동안 받는 돈이 10파운드, 오늘날의 5백파운드였다). 영국의 손꼽히는 귀족집안 출신인 그는 케임브리지대 수학우등시험에 1등으로 합격한 뛰어난 수학자였고, 과학연구를 위해 경제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을 뿐 아니라 과학진흥정책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해 대중에게 과학을 확산시키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874년 캐번디시 물리학연구소는 새로운 건물에 필요한 장비와 도구를 구비하고 개관됐다. 실제로 이 연구소 건립에는 2천2백파운드가 초과돼 8천5백파운드나 들었는데, 윌리엄 캐번디시는 아무 조건없이 이 돈을 더 후원해줬다. 바야흐로 실험실 중심의 새로운 물리학 시대가 도래했음을 선포한 캐번디시 연구소에는 곧 유럽의 내노라하는 물리학자들이 몰려들었고, 역대 소장이 노벨 물리학상과 노벨 화학상을 휩쓸며 20세기 양자 물리학의 씨앗을 키워냈다.
캐번디시 연구소의 제1대 소장에는 ‘신이 썼는가’라는 의문 섞인 찬사를 받을 정도의 전자기학 방정식을 완성한 맥스웰이었다. 그는 물리학의 정수가 실험에 있다고 확신하면서 캐번디시 연구소를 실험 물리학의 메카로 만들어갔다. 맥스웰을 가슴깊이 존경하던 레일리경은 제2대 소장에 임명돼 색의 분산과 산란에 관한 독창적인 연구를 수행했다. 이후 전세계에서 몰려든 젊은이들에게 독창적인 과학 연구의 능력을 당당히 키워주던 그는 1904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제3대 소장에는 대서양을 해저케이블로 연결한 세계적 명성의 켈빈경을 제치고 28세의 젊은 톰슨이 당당하게 임명됐다. 35년간의 재임 기간동안 그는 인간적인 지도력으로 선배와 심지어 스승까지 포용했고, 원자구조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를 가능하게 했다. 그 역시 1906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여하는 영광을 안았다.
멀리 뉴질랜드의 오지에서 감자를 캐다가 호미를 내던지고 영국으로 내달려온 촌닭 러더퍼드는, 톰슨이 연구소로부터 반경 1마일 이내로 들어오지 않는다는 용감한(?) 조건을 제시하며 제4대 소장에 임명됐다. 그는 퇴임한 전직 소장의 간섭을 철저히 배제하면서(실제로 톰슨은 지하 실험실에서 자신의 연구 이외에는 전혀 연구소 일에 관여하지 않았다) 연구소를 독자적인 방향으로 이끌어 그의 재임기간중에 가장 활발한 연구 성과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역시 1908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제5대 소장 브래그 경도 1915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윌리엄 캐번디시는 당시 왕립조사위원회(일명 데본셔 위원회)의 위원장으로서 영국에서 체계적인 과학교육과 과학연구가 제도적으로 정착될 수 있도록 정책적 차원의 지지도 아끼지 않았다. 1851년 크리스탈 팰러스에서 영국인들이 느끼던 자만심은 10년만에 프랑스에 뒤쳐진다는 불안감으로 바뀌었고, 켈빈경, 레일리경, 헉슬리 같은 과학자들은 과학교육과 연구를 통해서만 국가의 위기가 극복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데본셔 공작은 그들의 목소리를 하나로 묶어내던 구심점이었으며, 그들의 목소리가 정책에 반영되도록 견인차 역할을 톡톡히 수행했다. 그가 제출한 총 8차례의 방대한 보고서는 이후 국가 과학정책 수립의 중요한 지침서가 됐고, 그 결과 폭넓은 대중은 처음으로 과학과 만날 수 있게 됐다.
캐번디시 가문의 과학사랑은 오늘날에도 멈추지 않고 있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경계 쯤에 해당하는 체스터셔 지방에는 채트워스라는 이 가문의 본가가 있다. 시내에서 차를 타고 두시간 쯤 들어가야 하는 아주 깊숙한 곳에 위치한 이곳에서는 매년 과학을 위한 행사가 마련되고 있다. 순전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행해지는 캐번디시 가문의 과학 행사에는 전국에서 몰려든 관람객들의 발걸음으로 북적거린다.
목소리 내지 않은 후원자
캐번디시 연구소의 역대 소장들이 마음껏 과학연구를 수행하면서도 차례로 노벨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종교재판에 회부됐던 이탈리아의 갈릴레이가 자신이 역사상 처음으로 발명한 망원경으로 발견한 목성의 위성에 자신의 후원자였던 메디치 가문의 이름을 붙여줬던 것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18세기 대표적인 자수성가형 화학자 데이비는 책 제본공 패러데이가 과학연구에 일생을 바치겠다고 하자 “과학은 돈이 많이 드는 성질 고약한 여자와 같다”며 돌려보냈다. 아직 과학이 돈이 되지 않던 시절 과학연구에는 많은 돈이 소요됐고, 캐번디시 가문은 심지어 국가도 외면해버린 과학사랑을 경제적 후원이라는 형태로 보여줬다.
캐번디시 가문의 과학사랑은 뭔가 특별하다. 20세기 초 제너럴 일렉트릭사나 듀퐁사가 기업 연구소를 설립하고 과학자들을 불러들였을 때와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 캐번디시 가문이 후원한 돈은 목소리를 전혀 내지 않았다. 캐번디시 연구소의 연구방향과 주제는 전적으로 소장의 자율에 맡겨졌으며, 자율의 대가는 엄청난 것이었다. 연구소는 역대 소장의 노벨상 수상이라는 명예와 물리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는 특권을 갖게 됐던 것이다.
게다가 캐번디시 가문의 과학사랑은 소수 과학자만을 대상으로 삼은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체계적인 학교 과학교육이 제도적으로 정착될 수 있는 여건과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역사상 처음으로 대중에게 과학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보여줬다.
오늘, 2002년 새로운 해에 지구 반바퀴나 멀리 떨어진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이미 한세기 훨씬 전에 영국섬에서 살다간 캐번디시 가문의 높은 안목을 만나고 싶은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머리 스타일과 옷장식에서 물씬 풍겨나는 복고풍 작금의 대중문화, 그것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