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은 정복될 것인가. 최근 미국 하버드 의대 포크만 교수팀이 항암효과를 입증한 두가지 물질 앤지오스태틴(angiostatin)과 엔도스태틴(endostatin)이 세계적인 화제로 떠오르고 있다. 현재와 같은 분위기라면 당장이라도 암을 치료할 수 있는 약이 대량으로 쏟아져 나올 것만 같다.
포크만 교수는 대부분의 암학자와 달리 독창적인 관점으로 암치료에 꾸준히 도전해 온 뛰어난 과학자다. 또 그의 연구 결과가 암 치료 원리를 개발하는데 커다랗게 기여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과연 앤지오스태틴과 엔도스태틴이 언론에서 보도된 것처럼 암을 획기적으로 치료하는 약제인지는 확실치 않다. 아직 넘어야 할 난관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혈관을 차단하라
암을 정복하기 위한 노력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1960년대 많은 학자들은 암세포를 직접 죽이는 항암제를 만들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하버드 의대의 포크만 교수는 이들과 다른 특이한 주장을 펼쳤다. 그는 암 주위에 정상조직에 비해 항상 혈관이 많이 분포한다는 점을 관찰하고, 암이 증식하기 위해 스스로 혈관을 만든다는 점을 확인했다. 혈관을 생성하는 이유는 혈액을 통해 암이 성장하는데 필요한 영양분을 공급받을 뿐 아니라 필요없는 노폐물을 제거하는 '하수처리관'의 기능을 위해서다. 아울러 암세포는 혈관을 통해 자기가 원하는 신체의 다른 부위로 이동할 수 있는 '교통로'로 사용한다.
이 관찰 결과에 근거해 포크만 교수는 암세포를 직접 죽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혈관생성을 억제시킴으로써, 즉 군대의 병참선을 차단하는 효과를 유도함으로써 암치료 효과를 증가시킬 수 있다는 가설을 제창했다. 혈관을 형성하는 내피세포는 암세포가 아니고 신체의 정상조직이다.
따라서 암을 치료하기 위해서 정상조직이 치료대상이 된 셈이다.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획기적인 암 치료이론이었지만, 불행히도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포크만 교수는 다른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도 꾸준히 이 분야를 탐구했다. 그 결과 1970년대에는 혈관생성을 억제했을 때 암이 2-3㎣이상으로 증식하지 못한다는 점을 밝혔다. 혈관생성을 억제하면 실제로 암이 치료될 수 있음을 증명한 것이다.
포크만 교수는 1980년대에 들어 연구의 중요한 분기점을 마련한다. 그는 암세포가 혈관생성을 유도하기 위해 어떤 물질을 생성해야 한다고 믿고 이 물질을 찾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가 최초로 발견한 물질은 FGF-2(basic fibroblast growth factor-2)라는 단백질이다. 이후 이 물질이 많은 암세포에서 생성되고 실제로 강력한 혈관생성 작용을 한다는 점이 여러 학자들에 의해 확인됐다.
이 연구 결과에 자극받아 1980년대 후반부터 여러가지 혈관생성 유도 단백질이 암세포에서 발견됐다. 그래서 이 물질들의 생성을 억제하면 혈관생성이 억제되고, 그 결과 암치료 효과를 증가시킬수 있다는 개념이 학계에서 인정을 받게 됐다.
포크만 교수의 연구진은 1980년대부터 신약 개발 연구에 착수했다. 한편으로는 실험실에서 혈관을 생성하는 내피세포를 배양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내피세포의 증식을 억제시키는 약제를 발견하고 있었다.
이 연구를 위해 내피세포를 깨끗하게 무균상태로 배양하는 일이 중요하다. 박테리아나 곰팡이에 감염되면 현재 시행하는 실험 결과를 모두 망칠뿐 아니라 주위에서 다음 실험을 위해 대기하고 있는 다른 세포에도 모두 전염돼 연구가 짧게는 몇주, 길게는 몇개월 동안 진행될 수 없다.
따라서 실험실의 각 연구원은 자기가 배양하는 세포가 항상 무균상태로 유지되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일단 박테리아나 곰팡이에 감염됐다는 점이 발견되면 즉시 보고한 다음 감염된 세포의 배양을 중지하는 것이 각 실험실의 엄격한 규칙이다.
하루는 연구원 한명이 밤 늦게 포크만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신이 배양하던 내피세포에 곰팡이가 감염됐는데, 이 세포를 현미경으로 보던 중 뭔가 특이한 현상이 관찰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곰팡이가 감염된 상태에서 다음날까지 배양한 후, 관찰한 내용에 대해 연구를 계속할 수 있도록 허락을 요청한다는 내용이었다.
곰팡이에서 얻은 힌트
다음날 이 연구원은 곰팡이가 감염된 내피세포가 성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포크만 교수에게 보고했다. 그렇다면 곰팡이에서 내피세포의 증식을 억제하는 어떤 물질이 생성되고 있는게 아닐까. 연구진은 곰팡이에서 생성되는 물질(Fumagillin)이 실제로 혈관생성을 강력히 억제한다는 점을 확인했다.
흥미롭게도 이 약제는 1930년대에 기생충 제거용으로 개발됐다가 인체에 부작용이 심해 폐기된 것이다. 따라서 이 약제를 그대로 인체에 투여하기는 무리이므로 혈관생성 억제능력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부작용이 감소된 약제를 합성하려는 노력이 시도됐다.
그 결과 내피세포의 증식을 억제하는 세계 최초의 약제(TNP-470)가 개발됐다. 곰팡이가 감염되면 당연히 그 세포를 버리는 것이 규칙이던 연구원 사회에서 한 연구원의 보다 세심한 관찰력이 세계 최초의 혈관생성 억제제를 개발하게 만든 것이다.
포크만 교수는 신약개발 연구를 진행하던 중 또다시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이번에는 이전의 가설과 정반대, 즉 암세포가 혈관생성을 억제하는 물질을 생성한다는 내용이었다.
포크만 교수는 쥐의 복부 부위에 암세포를 주입하면 암세포가 폐로 잘 전이되는 세포를 연구하고 있었다. 그런데 복부의 종괴를 제거하자 암세포가 폐로 전이하는 속도가 급격히 증가하는 이상한 현상이 관찰됐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쥐의 복부에 암세포를 주입하면 복부에서 종양이 자라면서 일부 세포는 폐로 전이한다. 하지만 암이 여러 부위에서 동시에 자라면 쥐의 건강이 나빠지고 그 결과 암세포가 자라기에 충분한 조건이 되지 못한다. 따라서 복부에 있는 암세포는 폐에 전이한 세포가 너무 많이 자라지 못하게 혈관생성을 억제하는 물질을 생성해 폐로 보내는 것이다. 만일 복부의 암조직을 제거하면 이 혈관생성 억제물질이 없어지므로 폐의 암세포가 급속히 혈관을 생성해 성장한다는 가설이다.
이 가설은 여러 가지 증거에 의해 뒷받침되기 시작했다. 포크만 교수는 1970년대 미국의 유방암 수술 권위자인 피셔 박사가 이와 비슷한 상황이 인체에서 발생했다고 보고한 사실을 접했다. 즉 일부 유방암 환자의 경우 유방 부위를 수술한 후에 전이된 다른 부위에서 암이 급격하게 성장했다.
포크만 교수는 쥐에 암세포를 주입하면 혈액과 소변에 혈관생성을 억제하는 물질이 반드시 존재할 것이라고 가정하고 이를 찾아냈다. 앤지오스태틴이 발견된 순간이었다. 앤지오는 혈관, 스태틴은 억제제라는 뜻이다. 즉 앤지오스태틴은 혈관생성을 억제하는 단백질이라는 의미다.
이후 포크만 교수는 또다른 혈관생성 억제물질 엔도스태틴을 발견했다. 엔도는 내피세포를 의미한다.
포크만 교수는 최근 앤지오스태틴과 엔도스태틴의 혼합물을 암에 걸린 쥐에 투입하고 항암 효과를 확인했다. 이 사실은 작년 11월 '네이처'에서 처음 소개됐다. 한 의학자가 35년 간 자신이 관찰한 발견에 근거해 이론적 배경을 설립하고 새로운 약제를 개발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가 마침내 결실을 맺게 된 보기 드문 과정이었다.
탁월한 선택력
새로운 학문적 이론을 정립하고 신기술을 개발할 때 일반인이 인정하지 않는 꿈같은 가정에서 시작해도, 실제로 최종 결과를 얻어내기 위해서는 이를 하나하나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증명하는 일이 필수적이다. 더욱이 암과 같이 난치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막연한 꿈보다 반드시 과학적 근거가 입증된 치료법이 시행돼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과 현실이 뒤범벅이 돼 '꿈의 항암제' '기적의 항암제'라는 용어가 존재한다는 점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암의 특성상 아직까지 한가지 치료 약제가 모든 암을 치료하기는 커녕, 한가지 암에서만도 그 암이 발생한 모든 환자를 치료할 수 없음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는 엄연한 사실이다. 이런 면에서 포크만 교수가 개발한 앤지오스태틴과 엔도스태틴이 개발자의 의도와는 완전히 다르게 잘못 전달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외국은 물론 국내에서도 앤지오스태틴과 엔도스태틴이 모든 암을 완치시킬 수 있는 약제로 오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항암제는 암세포를 직접 죽이는 작용을 한다. 그러나 이 약제들은 정상세포의 일부도 죽여 부작용을 일으킨다는 단점을 피할 수 없다. 따라서 현재의 신약개발은 보다 선택적으로 정상세포는 건드리지 않고 암세포만 죽이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포크만 교수의 이론은 '선택성'의 관점에서 볼 때 탁월한 효과를 발휘한다. 앤지오스태틴과 엔도스태틴은 혈관 내피세포를 공격한다.
그런데 성장기를 거친 보통 사람의 경우 혈관 내피세포는 자라지 않는다. 즉 혈관 내피세포의 증식은 유아의 성장기, 외상이 났을 때 상처를 치유하는 시간, 그리고 여성의 생리기에만 발생한다. 따라서 이 경우를 제외하곤 성인에서 혈관생성은 오직 암이 성장하고 있는 부위에서만 발생한다. 암만 선택적으로 치료할 수 있고 따라서 부작용이 비교적 적으리라는 예측이 가능하다.
그러나 중요한 단점이 있다. 암으로 가는 혈관을 모두 차단할 경우 암세포의 덩어리는 2-3㎣의 크기로 증식하지 않고 생존한다. 즉 암세포를 직접 살해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보급로만 차단함으로써 암의 증식만 억제하는 것이다.
2-3㎣의 암덩어리에는 수십만개의 암세포가 존재한다. 이들은 혈관만 보급되면 언제든지 다시 증식한다. 따라서 혈관생성을 계속 억제하기 위해서는 평생 치료를 해야 한다. 또 상처가 발생하거나 생리기를 맞은 여성의 경우 치료를 중단해야 한다. 따라서 남아 있는 암세포를 모두 제거하기 위해서는 현재 사용하는 항암제나 방사선치료 또는 면역치료가 반드시 병용돼야지, 앤지오스태틴과 엔도스태틴만으로는 완치가 불가능하다.
아직 확실히 밝혀지지 않은 원리도 있다. 앤지오스태틴과 엔도스태틴은 암 부위에서 생성돼 분비된 다음 다른 부위의 전이 암 부위에서 혈관생성을 억제한다. 그렇다면 한가지 의문이 든다. 앤지오스태틴과 엔도스태틴을 직접 생성하는 암 부위에는 왜 혈관생성이 잘될까.
가능한 대답은 암 부위에 앤지오스태틴과 엔도스태틴의 기능을 억제시키는 물질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약제를 투여하기 전에 먼저 환자에게 억제 물질이 얼마나 존재하는지 조사할 필요가 있다. 즉 같은 종류의 암에 걸렸어도 환자에 따라 치료효과가 기대되는 환자와 그렇지 못한 환자가 있다는 뜻이다.
대량 생산 어려워
한편 앤지오스태틴과 엔도스태틴은 인체의 어느 한 부위에 암이 발생한 경우에 효과가 크다. 하지만 암이 전신에 퍼진 환자에서 암세포를 직접 죽이지 못하는 약제를 이용해 증식만을 억제하는 것으로는 중과부적이다.
따라서 이 물질들은 수술 치료나 방사선 치료로 암을 제거한 후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부위에서 암의 증식을 억제할 때 효과적이다. 그리고 다른 항암제나 면역치료가 동시에 투여돼야 완전히 암을 박멸할 수 있다.
따라서 앤지오스태틴과 엔도스태틴이 약제로 개발된다 해도 모든 암환자가 치료대상이 아니다. 단지 현재 시행하는 암 치료와 적절한 조합을 이룰 때 효과가 기대되는 것이지 현재의 치료에 실패한 환자들에게 효과를 기대한다면 비과학적이고 감상적이다.
난관은 더 있다. 앤지오스태틴과 엔도스태틴은 대량 생산을 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이들의 성분이 단백질이기 때문이다. 단백질을 대량으로 만들려면 해당 유전자를 추출한 후 적절한 조작을 가해 순도가 높은 단백질을 만들어내고, 이를 순수하게 분리해야 한다.
그런데 순도를 높이는 과정에서 단백질의 3차원 구조가 변형돼 약효를 잃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실험실에서 소량으로 추출했을 때는 효과가 있지만 대량생산 공정에서 약효가 소실돼 약제로 개발되지 못한 개발품이 많이 있다.
따라서 대량생산이 가능하기 까지는 약제로서의 가치가 입증되지 않은 셈이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점은 이번에 성공을 거둔 실험의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쥐라는 점이다. 사람에게 앤지오스태틴과 엔도스태틴이 효능을 제대로 발휘할지는 여전히 미지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