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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판허가 내려진 응급피임약 논란

실패임신 줄이는 효과, '조기낙태허용' 비판도

성관계 후 72시간 내에 두알을 먹으면 임신을 사전에 막을 수 있는 응급피임약‘노레보정’이 전세계 39개국에 이어 한국에서도 팔리게 됐다.‘ 절반의 성공’또는‘99% 성공’이란 것이 응급피임약 시판에 찬성하는 사람들의 의견이다. 반면 청소년 자녀를 둔 부모들은 이를 계기로 성풍조가 더욱 개방되는 것이 아니냐고 염려하기도 한다. 지난한 논란과정을 거쳤던 노레보의 수입허가 과정 전모를 알아보자.

지름 5mm, 무게 0.75g, 무광택으로 처리된 흰색 표면. ‘노레보’의 외관상 특징이다. 설명만 들어서는 흔히 보는 여느 알약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응급피임약’이라는 수식어를 붙어주면 사정은 달라진다. 성관계 후 72시간 내에 복용하면 임신을 막을 수 있는 응급피임약 노레보정. 프랑스 제약회사 ‘HRA 파머사’가 개발한 이 약은 성관계를 맺은 여성이 72시간 안에 한알을 먹고 다시 12-24시간 내에 한알을 더 먹으면 임신을 최대 95%까지 막을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11월 12일, 응급피임약 노레보정은 의사 처방이 필요한 전문의약품으로 분류돼 국내 시판 허가를 받았다. 이에 따라 노레보정은 현대약품(주)을 통해 수입될 예정이며, 약의 수입절차 등을 고려하면 정식판매는 내년 1월부터 가능할 전망이다. 하지만 응급피임약이 수입허가를 받기까지는 수많은 우여곡절과 지난한 논쟁과정이 있었다. 응급피임약의 수입 허가에 맞춰 그동안의 논쟁을 살펴보고, 노레보정의 부작용은 없는지 알아보자.

알약 하나에 담긴 한국사회

응급피임약의 수입 여부가 처음 제기된 때는 지난 5월 현대약품(주)이 응급피임약 ‘노레보정’의 수입허가를 신청하면서부터였다. 국내 모든 약품의 수입여부를 결정하는 식품의약품안전청(이하 식약청) 김상봉 사무관은 “노레보는 이미 지난 95년에도 한국쉐링이 수입을 시도했다가 제풀에 포기하기도 한 약”이라며 “이 약의 수입 허가여부는 수많은 사회적 문제와 연관돼 있어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고 그간의 고충을 털어놓았다.

사실 국내에서는 노레보정의 수입여부를 놓고 첨예한 대립 양상을 보여왔다. 노레보 찬반논쟁에는 여성계, 의료계, 종교계 등 다양한 사회집단의 엇갈린 이해관계가 스며 있기 때문이다. 여성의 건강에서 종교적 생명관, 생명존중과 낙태반대, 낙태 시술 위주의 의료산업, 그리고 여성이 스스로 몸과 출산력을 통제하는 여성주의적 시각까지 함께 녹아 있기 때문이다.

평범해 보이는 콩알만한 알약 하나에 무슨 사정이 그리 복잡할까. 지난 8월, 수입허가 여부와 관련해 식약청이 의견을 조사한 결과를 보면 그 사정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결과에 따르면 찬성이 4곳, 반대가 6곳이다. 보건복지부와 청소년보호위원회, 대한약사회, 대한가족보건복지협회는 수입 허용쪽에 손을 들었고, 여성부, 대한의사협회, 대한산부인과학회,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천주교서울대교구청, 낙태반대운동연합 등은 반대 의견을 냈다. 더구나 철처한 반대와 찬성의 경우는 드물고 대개 한두개 정도의 ‘단서’를 단 조건부 주장이었다.

찬성쪽은 장애인, 청소년의 원치 않는 임신이나 성폭력에 의한 임신의 우려가 있을 때 이 약을 사용함으로써 낙태를 막을 수 있으며 나아가 미혼모나 사생아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조건으로는 응급피임약을 전문의약품으로 분류해 반드시 의사처방전을 받도록 하자는 단서를 달았다.

반면 종교계와 여성부 등의 반대쪽은 이 약이 시판될 경우 청소년의 성문란은 더욱 가속화될 것이며 약의 오·남용으로 인한 부작용이 우려된다고 주장한다. 허용 조건으로는 사후피임약의 안전성을 보다 철저히 검증해 부작용의 소지를 없애자는 단서를 달았다. 이쯤되면 노레보정은 단순한 알약의 차원을 넘어선, 대단히 미묘하고 복잡한 정치적 알약이라 할 수 있다.

6개월 진통 끝에 얻은 합의

노레보를 둘러싼 논쟁이 이처럼 가열화되자 식약청은 중립적 의견 조정을 위해 논쟁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하 보사연)으로 넘겼다. 총리실 산하의 보사연은 그간의 논쟁을 정리해 지난 10월 12일 ‘응급피임약의 국내도입 여부를 위한 토론회’를 개최했다. 이날 토론회는 그동안 노레보의 수입여부에 대해 신문과 방송, 공청회 등에서 자신의 주장을 펼쳤던 각계의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인 자리였다.

토론회의 사회를 맡은 조재국 보사연 보건의료연구실장은 주제발표를 통해 “생명존중, 성문화 등의 측면에서 응급피임약 시판 반대의견은 존중돼야 하나 국내현실, 외국사례 등을 종합할 때 도입되는 것이 타당하다”고 밝혔다. 조실장은 또 “응급피임약을 시판하는 39개국 중 일반의약품으로 분류하는 국가는 7개국뿐”이라며 “전문의약품으로 분류한 뒤 응급의약품으로서의 접근성을 높이는 방안이 강구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또한 그동안 노레보 수입에 조건부 반대 입장을 표명해왔던 여성부도 찬성 입장으로 돌아섰다. 이기순 여성부 권익기획과장은 “미혼모, 낙태 등의 사회문제 예방에 효과가 클 것으로 보인다”며 “응급피임약의 오·남용과 부작용으로 인한 여성 건강에 미칠 악영향의 우려는 전문의의 처방전에 의한 철저한 약품 관리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8월초, 의견 조사과정에서 응급피임약의 오·남용과 부작용 우려를 반대 조건으로 내걸었던 강경한 자세에서 한발 양보한 발언이었다.

하지만 사실 여성부가 이처럼 태도를 바꾼 데에는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었다. 여성부 내부에서 응급피임약 노레보의 안전성 문제에 대해 의학계와 약학계의 의견을 수렴한 결과, 노레보 자체에는 큰 부작용이 없다는 잠정적 합의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지난 10월 12일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서는‘응급피임약의 국내 도입 여부를 위한 토론회’ 가 열렸다.


“부작용 우려는 기우”

종교계와 일부 의학계에서는 노레보가 초고용량의 호르몬제이므로 오·남용의 경우 심각한 부작용이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나온 피임약 가운데 가장 부작용이 적다는 의견이 전문가들 사이의 정설이다. 김창규 연이산부인과 원장은 “노레보는 매우 제한적인 상황에서 단 두차례만 복용하는 것이므로 일부에서 얘기하는 초고용량 호르몬 오·남용이라는 걱정은 기우”라고 말한다.

노레보는 이미 전세계 39개 국가에서 시판승인을 받았다. 이탈리아에서는 교황청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국민윤리상 위험성보다 유용성이 많다는 의견으로 시판허가가 났으며, 프랑스에서는 학교에서 양호교사를 통해 학생들에게 이 약을 나눠주고 있다. 프랑스, 스웨덴, 덴마크 등 15개 국가에서는 의상처방 없이 슈퍼마켓에서 이 약을 쉽게 구입할 수 있다.

미국의 식품의약국(FDA)은 1996년 응급피임약의 안전성을 승인했고, 지난 6월 세계보건기구(WHO) 역시 중절수술이 여성의 건강에 미치는 악영향을 고려해 응급피임약을 새로운 피임방법으로 보급키로 결정했다. 그렇다면 노레보는 부작용이 없을까. 김숙희 산부인과 전문의는 “노레보의 경우 구토와 메스꺼움, 경미한 월경 외 출혈, 두통 등의 경미한 부작용이 있을 뿐 심각한 문제는 없다”고 말하며 “노레보의 오·남용 걱정보다는 이미 시중 약국에서 10대 청소년을 대상으로 세스콘, 미니보라 등의 일반피임약이 응급피임약으로 둔갑돼 팔리고 있는 현실이 더 문제”라고 지적한다.

그녀는 “이 경우 환자는 한번에 4-5알의 일반피임약을 마음내키는 대로 복용하는데, 대부분의 경우 그 용법과 부작용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없어 약물의 오·남용 정도가 심각하다”고 우려를 나타낸다.
 

낙태 수술은 감염, 자궁 출혈 등의 육체적 피해와 우울증, 죄책감 등의 정신적 상처를 남겨 여성에게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한다.


비결은 농도 차이

노레보는 수정란의 자궁내막 착상을 방해해 임신을 막는다. 성분은 ‘레보노르게스테렐’이다. 레보노르게스테렐은 합성 프로게스테론의 일종인데, 흔히 보는 사전피임약의 성분이기도 하다. 응급피임약인 노레보의 성분이 일반피임약의 성분과 같다니, 어떻게 된 일일까.

김숙희 산분인과 전문의는 “사실 노레보는 무슨 특이한 성분의 독특한 약이 아니다. 성분은 일반피임약의 그것과 비슷하나 다만 그 양이 일반피임약에 비해 약 4-5배로 높을 뿐”이라며 “노레보의 비결은 독특한 성분이 아니라 그 농도에 있다”고 말한다. 일반피임약은 약 0.15mg의 합성 프로게스테론을 함유하지만 노레보의 경우 그 양이 0.75mg으로 합성 프로게스테론을 고농도로 함유하고 있다.

여성의 생리는 여러 호르몬에 의해 매우 정교하게 조절된다. 대표적 호르몬에는 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테론이 있다. 에스트로겐은 자궁내막을 두텁게 해 임신에 적당한 자궁 환경을 만들며 배란을 촉진시킨다. 프로게스테론은 수정이 이뤄진 뒤 분비돼, 더 이상 배란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며 자궁경부의 점액을 두껍게 만들어 정자가 더 이상 자궁 내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차단한다. 일반 여성의 몸에서는 이런 호르몬의 작용이 매우 미묘한 차이로 정교하게 조절되고 있다.

그러나 필요 이상의 고농도 프로게스테론은 자궁내막의 밸런스를 일순간에 무너뜨린다. 만약 고농도의 프로게스테론을 먹으면 인체는 마치 임신된 상태처럼 자신의 몸을 인식, 더 이상의 착상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자궁내막을 변화시킨다. 임신 전, 즉 착상에 필요한 자궁내막의 두께와 부드러운 정도, 자궁내의 산성도, 영양상태 등은 적당한 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테론으로 유지되는데, 고농도의 프로게스테론은 자궁내막의 상태를 임신 이후로 바꿔버려 더 이상의 임신을 막는 것이다. 바로 노레보의 원리다. 한알을 우선 먹고 프로게스테론의 혈중 농도가 떨어지기 전 한알을 더 먹어 일정 정도 이상의 농도를 유지시키면 피임 효과를 충분히 볼 수 있다.

이에 반해 일반피임약의 주성분은 에스트로겐이다. 착상을 방해하는 프로게스테론보다 배란 자체를 억제해 임신을 사전에 예방하는 에스트로겐이 일반피임약의 취지에 맞기 때문이다.

생명은 수정과 동시에 시작

한편 이날 공청회장에서는 응급피임약의 도입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정후빈 낙태반대운동연합 실행위원은 “생명은 수정과 동시에 시작되는 것인데, 이미 수정된 수정란을 폐사시킴으로써 수정된 생명체를 죽이는 노레보는 피임약이 아니라 낙태제”라고 주장했다. 그는 “실제로 최근 미국 하원 의원과 한국의 생명윤리자문위원회에서도 수정란 단계에서부터 생명이라고 간주해 모든 배아의 복제나 줄기세포 추출 연구를 금지한다고 결정한 바 있다”고 지적하며 “응급피임약의 도입은 수정된 생명체를 죽이는 것이며 생명을 경시하는 풍조를 조장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노레보는 성교 후에 먹는 아침 알약이라는 의미에서 일명 ‘모닝 애프터 필’(morning after pill)이라고도 불린다. ‘피임은 성관계 전에 하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있는 우리나라에서 ‘사후피임’ 방법인 응급피임약은 쉽게 받아들여지기 힘들어 보인다. 더욱이 ‘피임인가 낙태인가’라는 좀더 심각한 문제에 봉착하면 노레보의 운명은 더없이 복잡해진다. 여기에는 생명을 어떻게 정의하느냐 하는 근본적인 인식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임신은 정자와 난자가 만나 수정란이 만들어지면서 시작된다. 수정은 아버지의 유전자와 어머니의 유전자가 결합됨으로써 새로운 생명체의 발달이 시작되는 시점이다. 남성인지 여성인지 결정되는 것도 이때다. 하지만 수정은 어느 한순간에 이뤄지는 사건이 아니다. 정자가 난자와 만났다 할지라도 정자 속에 있는 유전자가 난자의 유전자와 결합하기까지는 약 48시간이 걸린다.

정자와 난자가 수정을 이루는 곳은 여성의 나팔관이다. 수정란은 여기서부터 자궁내막까지 서서히 이동하며 자체적으로 2배수로 분열해나간다. 수정 후 약 5-7일 사이에 수정란은 자궁내막에 도착해 안쪽으로 함입되기 시작한다. 이 상태를 착상이라 부른다. 착상이 완료되는 시기는 수정후 약 14일 정도로 파악한다.

응급피임약 수입을 반대하는 종교계와 낙태반대단체는 정자와 난자가 만나 수정란을 이룬 상태부터 생명이라고 간주한다. 따라서 이들에게 수정란의 착상을 방해해 임신을 막는 응급피임약은 생명을 파괴하는 낙태제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노레보는 성관계 후 72시간 이내에 한알을 먹고, 이후 프로게스테론의 혈중 농도가 떨어지 는 12시간 내에 한알을 더 먹으면 피임 효과를 낸다.


도입 취지 잘 이해해야

이에 대해 김창규 연이산부인과 원장은 “의학적으로 임신 또는 생명의 시작은 수정란이 자궁내막에 착상되면서 시작된다고 정의된다”고 말하며 “생명을 존중하는 자세도 중요하지만 응급피임약의 수입 취지를 잘 이해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생명윤리자문위원회가 제안한 생명윤리기본법 시안에서 생명의 시작은 수정 순간부터라고 정의하고 있으나 이 법의 취지는 건강유지 또는 질병치료 차원이 아니라 생명윤리 확보에 있다. 이에 비해 노레보 도입은 낙태와 실패임신으로 고통받고 있는 여성의 건강을 위한 것이다. 물론 생명은 존중돼야 하겠지만 노레보 도입이 곧 생명을 경시하는 풍조를 조장할 것이라고 이해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미국과 이탈리아에서도 윤리성보다는 건강보건의 입장을 중요히 여겨 응급피임약을 허용하고 있다. 김원장은 또 응급피임약의 도입을 반대해온 기존 의료계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기존 의료계가 낙태수술을 엄청난 수입원으로 삼아온 것은 사실이다. 낙태수술, 수술 이후 입원 기간중 발생하는 병원과 제약업계의 수입 때문에 여성의 건강에 치명적인 낙태를 피임방법의 하나로 방관해온 측면이 있다”고 주장했다. ‘먹는 피임약으로 건강을 해치느니 임신이 되면 낙태수술을 하고 말지’하고 여성들이 생각하도록 의사들이 방조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세계 최고의 낙태국가, 불임으로 인한 시험관 아기 시술 1위 국가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이임순 대한산부인과학회 이사는 “기존의 의료계가 가졌던 잘못된 관행과 문제점은 반드시 개선되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하지만 기존 의료계의 문제점을 응급피임약의 도입근거로 삼아서는 안된다”라고 지적했다. 그녀는 “피임교육이 미비한 현실에서 이 약이 모든 성생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으로 잘못 인식될 우려가 크다”며 “오·남용 방지책, 성교육 활성화 등 사회적 기반이 마련된 후에 도입해도 늦지 않다”고 반대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노레보의 수입을 반대하는 종교계와 낙태반대단체는 수정란은 이미 생명이므로 수정란의 착상을 방해하는 응급피임약은 낙태제와 다를 바 없다고 주장한다.


이상과 현실 조화 이뤄야

2년간 응급피임보급 시범사업을 했던 대한가족보건복지협회 정정순 가족보건 과장은 이번 응급피임약 수입허가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물론 최선은 철저한 성교육과 사전 피임이다. 하지만 성폭행이나 강간, 또는 콘돔이 찢어지는 등 실패임신의 경우 인공 임신중절보다는 사후응급피임약이 여성의 정신적·육체적 건강에 훨씬 유익하다. 낙태수술은 감염, 출혈, 자궁에 상처가 생기는 등의 육체적 피해와 우울증, 죄책감 등의 정신적 상처를 남겨 여성에서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한다.”

응급피임약의 시판 허용 여부는 이상과 현실간의 복잡한 갈등문제라 할 수 있다. 생명 존중을 위해 응급피임약 시판을 반대하는 이상론측 주장처럼, 생명을 중시하는 것이 우리 사회가 궁극적으로 달성해야 할 목표라는 데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처한 현실을 들여다보면, 이상의 추구도 중요하지만 현실에 처한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시급하고 심각한 문제라는 점도 결코 간과할 수 없다. 2000년도 성폭력 범죄가 1995년에 비해 60.4%가 증가한 9천7백75건에 이른다는 수치는 성폭력 등으로 인해 원치 않는 임신 가능성이 점차 증가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주목해야 할 것은 아무런 준비없이 임신과 출산을 경험하는 청소년들이 급속하게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나마 임신 후 낳아서 기르거나 입양을 선택하는 경우는 10대 임신경험자 가운데 8%에 지나지 않고 다수가 합법 또는 불법의 낙태를 선택했다는 표본조사결과는 우리에게 많은 점을 시사한다.

김성이 청소년보호위원회 위원장은 “매년 새로 태어나는 아기가 70만명인데 인공유산 건수가 1백50만건으로, 낙태율이 성문화가 가장 개방됐다는 네덜란드의 50배에 달한다”며 “청소년의 성교육이 제대로 안되고 성행위를 막을 수 없는 상황에서, 서구에서 안전도가 입증된 응급피임약의 도입은 당연하다. 응급피임이 안되면 그 다음은 당연히 인공중절이다. 지금까지 우리의 청소년 보건정책은 피임정책이 아닌 낙태정책 일변도였고, 이는 우리나라를 낙태의 천국으로 만들어버렸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응급피임약의 도입은 성문화의 문란과 생명 경시 풍조 등의 부작용도 초래할 것이다. 이를 최 소화하기 위한 노력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요구된다. 사진은 영화‘눈물’의 한장면.


이제부터 진정한 논쟁 시작

지난 10월 12일 열린 토론회에서 대다수 참석자들은 “시판을 허용하되 오·남용을 막을 수 있는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이번 토론회에서 시판허용에 찬성입장을 보인 단체와 개인은 보사연, 여성부 등 8곳이며 반대는 낙태반대운동연합, 대한산부인과학회 등 2곳에 그쳤다. 이날 토론회의 의견을 수렴한 보건복지부와 식약청은 한달간의 심의 끝에 지난 11월 12일 응급피임약의 국내시판 허가를 내렸다. 이에 따라 늦어도 내년 1월이면 전문의약품으로 분류된 응급피임약을 의사 처방전만 있으면 일반 약국에서도 구입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성폭행을 당했을 경우나 가족계획을 위한 경우, 성폭력상담소나 가족보건복지협회 등 관련 단체를 찾으면 처방전 없이도 구할 수 있다. 약값은 2정 1세트에 1만원이며 의원을 찾을 경우 처방료 3천원을 추가로 부담해야 한다.

찬성쪽의 한 토론자는 시판허가 결정 이후에 이뤄진 인터뷰에서 “응급피임약은 최종적으로 일반의약품으로 허가를 받아야한다. 하지만 일단 판매허가를 받았으니 절반의 성공은 거둔셈”이라고 말했다. 지난한 논쟁의 과정을 거친 만큼 응급피임약 시판에 찬성했던 토론자는 이번 결정을 99%의 성공이라고 자축(?)할 만 하다.

하지만 이번 응급피임약 합법화와 관련, 일부 낙태반대 운동단체는 응급피임약이 국내에 시판되면 청소년들을 중심으로 성문란 풍조가 만연될 것이라며 여전히 우려하고 있다. 또 종교계는 이 약이 조기 낙태약이라며 시판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기독교 의료인들의 모임인 한국누가회는 “인간은 수정된 순간부터 고귀한 생명체이기 때문에 수정란의 착상을 막는 것은 조기낙태임이 분명하다”면서 노레보정의 국내시판에 대해 반대운동을 전개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의료계 일부에서는 이번 응급피임약의 합법화를 계기로 낙태수술로 병원 수익의 상당부분을 의존해온 기존 의료시스템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응급피임약을 둘러싼 논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어쩌면 판매가 허용된 지금부터가 진정한 논쟁의 시작인지도 모른다. 성적 윤리가 결여돼 가고 있는 우리 사회에 응급피임약의 도입은 성문화의 문란과 생명 경시 풍조 등 부작용을 일으킬 소지를 갖고 있다. 응급피임약은 법적으로 합법화됐다고 하지만 사회의 어두운 곳에서는 여전히 응급피임약으로 둔갑한 각종 불법 조제약이 약물의 무분별한 오∙남용을 부추기고 있다. 이제는 도입여부의 논쟁이 아니라 부작용을 최소화시킬 수 있는 적극적 방안이 강구돼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의사, 약사, 청소년전문가, 사회운동가 등으로 구성된 전문가 집단을 구성해 응급피임약 도입에 따른 부작용을 최소화 하기 위한 차분하고 신중한 대처방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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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12월 과학동아 정보

  • 김대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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