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 궁궐, 항교, 주택, 탑 등 건축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건축문화유산의 보존과 복원에 대해 살펴보고, 우리나라에서 진행된 주요 사례에 대한 문제점과 개선방향을 짚어보자.
우리나라 유형문화재 가운데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건축문화재이다. 이러한 건축문화재는 탑을 제외하면 동아시아 건축의 특성상 대부분 목조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화재나 비, 바람에 매우 취약하다. 실제로 옛 문헌을 들춰보면 창건 당시부터 원형을 그대로 유지해 오는 건축물보다는, 중간에 화재로 소실돼 중건하거나 부분적인 수리를 거친 것이 대부분임을 알 수 있다.
최근 국민경제와 문화수준의 향상은 국민 개개인의 문화유산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있으며, 정부에서도 문화유산의 보존과 복원을 위해 매년 막대한 비용을 투자하고 있다. 또한 과학의 발달과 건축기술의 진보로 이러한 건축물들을 과거보다 오랫동안 안전하게 유지시킬 수 있는 방법이 다양하게 개발되고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원래의 모습을 참고해 다시 복원하는 사례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해방 이후 우리 손에 의해 1959년 처음으로 실시된 무위사 극락전의 실측작업 이후 건축문화유산에 대한 적지 않은 보존과 복원작업이 진행됐다. 여기서는 그 가운데 주목할만한 몇가지 사례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토함산 석굴암
토함산의 석굴암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문화유산 가운데 하나다. 처음에는 ‘석불사’라 불렸는데, 조선시대 숙종 41년(1715년)에 이름을 석굴암이라고 고치고 몇차례의 수리를 했다. 하지만 당시의 사회 분위기로 인해 세간에서 잊혀졌다가 조선 말기에 이르러 크게 중수됐다. 일설에는 1907년 우편배달부가 우연히 다시 발견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석굴암의 보존작업은 일제강점기 동안 세차례에 걸쳐 일본학자들의 손으로 진행됐다. 최초의 작업은 천장의 3분의 1이 부서져 내려 본존불의 파손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거의 완전한 해체와 복원 공사였다. 그들은 흩어진 부재를 수습하고 조립하면서 당시 근대 건축의 신재료로 등장한 시멘트를 이용해 작업했다. 그 결과, 외부경관에 대한 손상과 침수 등 돌이킬 수 없는 결정적인 오류를 남겼다. 이것은 오늘날까지 석굴암의 보존에 크나큰 어려움을 안겨 줬으며, 문화유산의 보존에 있어서 많은 교훈을 남겼다.
해방 이후에는 1961년 우리 학자들에 의한 조사가 이뤄졌으며, 1962-1964년 사이 전면적인 보수공사가 진행됐다. 이 때 일본학자들이 잘못 배치한 불상의 위치를 바로잡고 석굴에 영향을 주는 습기 제거를 위해 기계장치를 설치했으며, 조선시대 화가 정선이 그린 ‘교남명승첩’에 의거해 신라시대 양식을 일부 차용한 석실입구의 목조전실을 세웠다. 그러나 학자들 사이에 목조전실의 존재유무에 대한 논란이 여전히 일고 있다.
경주 동궁과 안압지
신라 왕궁의 후원으로 삼국통일을 전후로 한 시기에 조성되기 시작해 문무왕 14년(674년)에 완성된 안압지는 1975-1976년 연못과 주변 건물지에 대해 준설을 겸한 발굴조사과정에서 유구(옛날 토목 건축의 구조와 양식을 알 수 있는 실마리가 되는 잔존물) 가 발견됐다. 뿐만 아니라 발굴조사의 과정에서 적지 않은 수량의 건축부재들이 발굴됐고, 발굴이 끝난 뒤 그 결과를 토대로 1980년 2동의 건축물과 연못에 대한 대대적인 복원 작업이 이뤄졌다.
이 때의 건물 복원 작업은 다른 지역과 달리 지상의 건축물이 완전히 사라져 원형을 알 수 없는 경우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발굴된 건축부재를 적극 활용해 부분적인 원형복원과 상상복원을 결합시키는 시도를 했다. 하지만 복원 건축물의 전체적인 풍으로 볼 때 당시의 원형이라고는 확신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좀더 시간을 갖고 신중하게 당시 주변 국가의 유사한 건축물을 비교해 작업이 이뤄졌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화성 행궁
화성 행궁은 정조의 화성축성 이후 팔달산의 기슭에 건립된 것으로, 효성이 지극한 정조가 부왕 장조(장헌세자)의 능침인 화산릉을 참배하고 돌아가는 길에 쉬어갔던 곳이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이 자리에 병원과 초등학교가 세워지면서 낙남헌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축물이 훼손됐다.
그 후 19995-1999년까지 4차에 걸쳐 한양대와 수원대 박물관의 발굴조사를 통해 유구가 확인되고, 최근 상당수의 건축물이 다시 복원돼 원형을 되찾았다. 복원은 발굴된 유구를 기초로 일제강점기에 촬영된 사진자료와 화성의 축조 당시에 정리된 문헌자료를 참고해 이뤄졌다.
사라진 건축물에 대한 복원은 매우 신중한 작업으로, 원형을 찾는 과정이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화성 행궁의 경우는 ‘화성성역의궤’라고 하는 상세한 문헌기록이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정확한 고증자료를 통해 원형에 가까운 복원이 가능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복원과정을 통해 역사기록의 중요성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미륵사지 동탑
미륵사지는 7세기 백제 가람의 전체적인 구성을 확인할 수 있는 대표적인 곳으로, 오랜 기간에 걸쳐 다양한 방식의 보존과 복원작업이 진행된 유적지다. 우선 일제 강점기에는 붕괴된 서탑을 콘크리트로 보강함으로써 문화유적을 훼손한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고 있다. 그 후 1966년부터 사지에 대한 발굴작업이 시작됐고, 1978년과 1989에는 서탑의 실측과 동탑의 복원 설계가 있었다. 1980년부터 1995년까지 대규모의 발굴작업이 이뤄져 유구의 전체적인 모습이 확인됐다. 그리고 이러한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1993년에는 동탑이 원래의 위치에 복원됐다. 뿐만 아니라 2001년에는 목탑을 비롯한 주요 건축물에 대한 학술적인 차원의 복원연구가 이뤄지기도 했다.
동탑의 복원과정에서는 여러 가지의 복원안이 제시돼 논란이 있었고, 발굴시 수습된 부재들이 다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석재가공의 기술적인 수준문제로 재활용되지 못했으며, 상상에 의한 새로운 건축물이 등장해 서탑과의 부조화는 물론 전체적으로 생경한 경관을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보존과 복원의 기본원칙을 위배한 또다른 방식의 유적파괴라는 오점을 남겼다.
경복궁 흥례문
경복궁은 태조 4년에 창건된 조선왕조의 정궁이다. 그러나 이 궁궐은 선조 25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전소됐으며, 그 후 2백73년간 중건되지 못하다가 고종 때에 이르러 대원군의 주도하에 대대적인 중건공사가 진행됐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총독부가 들어서면서 궁궐의 면모가 크게 훼손됐으며, 문민정부를 자칭한 김영삼 대통령 시절 ‘역사 바로 세우기’의 일환으로 대대적인 발굴과 복원공사가 시작됐다.
그 결과 침전부분을 비롯한 동궁이 이미 복원됐고, 2001년에는 흥례문 주변의 복원이 끝남으로서 기본적인 궁궐의 골격이 갖춰졌다. 이 과정에서 흥례문의 사례는 건축문화유적의 복원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어려운 작업인가를 깨닫게 해줬다. 국내 최고의 장인이 동원됐고 관련자료가 비교적 풍부함에도 불구하고 복원의 결과는 원형과 다른 모습을 띠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 전통목조건축이 갖고 있는 처마의 아름다운 곡선의 미는 약간의 차이만 있어도 시각적으로 불편한 느낌을 주기 마련인데, 흥례문은 그 선의 미를 재현해 내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유구를 환경친화적으로 보존
건축 문화유산의 원형을 오래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수리나 복원 작업이 불가피하다. 이런 작업의 과정을 좀더 엄격하고 철저하게 감독함으로써 상상이나 왜곡, 또는 아예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문제를 방지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다량으로 소모되는 목재의 수급, 특히 국산재의 원활한 공급 역시 정책적으로 배려돼야 할 부분이다. 최근에는 한국전통문화학교가 설립돼 전문가를 체계적으로 육성할 수 있는 길이 열리고 있으며, 문화재 보존용 육성림이 지정됐다. 이러한 사실은 매우 고무적이라고 할 수 있다.
낡은 부재를 무조건 새 부재로 교체할 것이 아니라, 낡은 부재의 재활용 방법에 대한과학적인 기술개발이 필요하며, 건축물의 수명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지나치게 무거운지붕의 고정하중을 경감할 수 있는 방법도 모색돼야 한다. 나아가 발굴돼 노출된 유구도주변 환경과 어울리도록 환경친화적으로 개선∙보존될 필요가 있으며, 유구 위에 무분별한 복원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일이므로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