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cm의 칩 위에서 화학물질을 분석하고 생체물질을 분리하는 생의학 분석화학.Lab-on-a-chip과 DNA칩으로 대표되는 생의학 분석화학은 우리에게 꿈같은 미래를 약속한다. 생의학 분석화학의 초소형 분석기구가 안내하는 환상의 미래세상으로 가보자.
“수상한 백색가루를 발견했습니다. 빨리 와주십시오!”
국립보건원 생물테러 대책반에는 하루에도 이런 전화가 수십통 넘게 걸려온다. 미국이 탈레반 정부와 전쟁을 시작한 이후 탄저균에 의한 생화학 테러로 보이는 일련의 사태가 세계 곳곳에서 발생되고 있기 때문이다. 신고 전화를 접수한 대책반은 화생방 기동대를 즉각 출동시켜 백색가루를 회수, 실체를 규명하는 작업에 착수한다. 그런데 신고된 백색가루가 탄저균인지 아니면 그저 평범한 밀가루인지를 밝혀내기 쉽지 않다. 일단 신고된 백색가루는 밀봉된 용기에 옮겨져 국립보건원으로 전달된다. 전달된 백색가루는 국립보건원의 생화학 분석실험실에서 여러 화학반응을 거친다. 그 후 결과를 분석해 실체가 규명된다. 출동에서 수거, 전달, 분석까지 그 과정이 여간 번거롭지 않다.
신고된 백색가루의 정체가 무엇인지 출동한 현장에서 즉시 알 수 있다면…. 너무 꿈같은 얘기일까. 아니다. 이런 공상같은 일이 랩-온-어-칩(Lab-on-a-chip)을 이용하면 가능해진다.
분석화학의 최신 화두 소형화
Lab-on-a-chip이란 말 그대로 칩 위의 실험실(Lab)이란 뜻이다. 동전만한 크기의 칩 위에 분석에 필요한 여러가지 장치들을 미세 기술을 이용해 집적시켜놓은 화학분석 장치가 바로 Lab-on-a-chip이다. 이는‘생의학 분석화학’이란 다소 생소한 학문적 배경에서 태어났다.
지금까지 과학의 발전은 새로운 관측장비와 실험기구의 개발과 그 흐름을 같이 해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X선의 발견이 그랬고, 전자현미경과 컴퓨터의 개발이 그랬다. 새로운 관측장비와 실험기구는 인간이 자연을 바라보는 시야를 넓혀주는 동시에 더욱 미세한 세계까지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그래서인지 지금까지 노벨상 수상자들을 살펴보면 새로운 관측기구를 개발한 사람들이 많다.
지난 10년 간 분석기술의 소형화는 생의학 분석화학의 주된 연구분야로 자리잡아 왔다. 다양한 시료와 시약을 작은 단위로 처리, 분석이 가능한 초소형장치를 개발하는 일은 많은 과학자의 관심을 일으켰다. 몇몇 과학자들은 마이크로칩이 컴퓨터와 전자공학 분야에 일대 혁명을 가져온 것처럼 화학에서 이러한 초소형 장치가 분석과 합성에도 거대한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생의학 분석화학은 첨단 기기 분석 방법의 개발을 통해 오염된 환경을 모니터링하고 생명의 신비를 캐는데 이용될 수 있는 새로운‘눈’을 제공하는 학문이다. 생의학분석화학은 Lab-on-a-chip과 DNA칩의 양두마차에 의해 선도되고 있다. Lab-on-a-chip과 DNA 칩은 무엇이고 생의학 분석화학을 어떻게 이끌고 있는지 알아보자.
마이크로 머시닝과 컴퓨터프로그램의 합작
전통적인 분석시스템에서는 현장에서 시료를 채취한 후 이를 실험실로 가져와 시료의 분리나 검출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복잡한 처리과정을 거친다. 이런 전처리 과정을 거친 시료는 크로마토그래피 등과 같은 분리방법을 거쳐 그 특성에 따라 각각 분리된다.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들은 서로 독립적으로 이뤄질 뿐 아니라 분석장비들도크며 필요한 시약과 시료의 양도 많아야 한다.
하지만 Lab-on-a-chip에서는 수μL(1μL=10-6L)의 시료만 갖고도 위와 같은 과정을 모두 처리할 수 있다. 분석에 필요한 모든 과정들이 하나의 작은 칩 위에서 수행될 수 있도록 여러 개의 채널이나 미세 구조물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칩의 크기는 보통 가로 세로 3-4cm의 사각형 모양으로, 손바닥 위에 올려놓기에 충분하다.
어떻게 이 작은 칩 위에서 복잡한 화학반응이 일어날 수 있을까. 비밀은 마이크로 머시닝 기술이다. 반도체칩 위에 복잡하고 수많은 회로를 고밀도로 집적시키는 방법이 마이크로 머시닝 기술인데, 이 기술을 Lab-on-achip에 이용하는 것이다.
Lab-on-a-chip은 크게 칩으로 사용되는 기판과 기판 위에서 시료가 흘러가며 각종 화학반응을 하게 되는 미세채널, 그리고 시료를 주입할 입구인 플라스틱 팁으로 구성된다. 여기서 핵심은 바로 미세채널이다. 채널을 어떻게 설계하는냐에 따라 화학반응의 정도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미세채널은 흔히 건축설계에 이용되는 컴퓨터프로그램 캐드를 이용한다. 원하는 채널 모양을 캐드로 디자인한 후, 이 모양대로 기판을 깎으면 원하는 채널모양의 Lab-on-a-chip을 만들 수 있다.
현미경 수준의 액체를 제어한다
Lab-on-a-chip 연구분야에서는 기판의 재료와 기판을 만드는 방법, 채널에서 일어난 화학반응을 검출하는 방법, 적은 시료를 효과적으로 제어해 원하는 곳으로 흘리는 방법 등이 주 연구과제다. 그 중 미세채널에서 수 마이크로단위의 액상시료를 제어하는‘마이크로 유체공학’이 최초의 화두다.
압력차에 의한 일반적인 유체의 흐름은 채널단면의 중심에서 가장 빠른 유속을 갖고 채널의 벽으로 갈수록 점차 유속이 느려지는 포물선 형태의 유속분포를 갖는다. 하지만 수μm에 불과한 미세채널에서 이런 흐름을 보여서는 곤란하다. 아직까지 이런 극미세의 채널에서 극소량의 액체를 효과적으로 다루는 방법은 개발돼 있지 못하다. 이슬방울보다 수천배나 부피가 작은 액체를 다루는 분야인 마이크로 유체공학이 주목받고 있는 이유다.
포항공대 생의학분석기술연구실의 한종훈 교수는 “마이크로 유체공학이야말로 생의학 분석화학분야에서 가장 큰 화두다. 하나의 칩 위에서 현미경 수준의 액체를 운반하고 섞어주고 나눠주는 장치의 개발이야말로 Lab-on-a-chip분야와 DNA칩 개발의 필요∙충분조건이다”라고 말한다. 현재는 마이크로 단위의 펌프와 밸브를 제작해 칩 안에서 액체를 제어하려는 연구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유전병 진단하는 DNA칩
생의학 분석화학의 또다른 응용분야는 DNA칩이다. DNA 칩은 엄밀히 말 Lab-on-a-chip의 특화된 형태라 할 수 있다. 분석대상이 DNA라는 물질로 좁혀진 것이다. DNA칩은 수cm의 기판 위에 DNA를 촘촘히 매달아놓고 이 위로 분석하고자 하는 DNA를 넣어주면 해당하는 화학반응에 따라 DNA를 가려낼 수 있는 장치다.
DNA는 이중나선으로 꼬여있는데 각각의 한 나선은 반대편의 나선과 화학반응으로 결합돼 있다. 아데닌(A), 구아닌(G), 시토신(C), 티민(T)의 네 염기가 이 화학반응을주도하는데, 이들은 특정염기하고만 결합한다. 즉 A는 T,C는 G하고만 결합하는 것이다. DNA의 이런 특이한 성질을 이용하는 것이 DNA칩이다.
유리나 플라스틱의 기판 위에 분석하고자 하는 DNA의 반대편 나선을 붙인다. 물론 기판 위에는 수많은 분석대상의 DNA를 촘촘히 붙여놓을 수 있다. 여기에 염기서열을 모르는 시료를 넣어주면 자신의 염기서열과 결합하는 DNA 가닥과 반응해 이중나선을 이루게 된다. DNA가 이중나선을 이루면 형광이나 전기적 특성을 나타내도록 DNA칩 위의 단일나선을 미리 조작해뒀기 때문에 이들을 쉽게 검출할 수 있다.
DNA 염기서열은 최근 연구가 활발한 여러 게놈프로젝트를 통해 쉽게 구할 수 있다. 이를 이용해 칩을 만들면 기능을 알지 못하는 유전자에 대해 해석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다. 특히 가장 기대가 되는 DNA칩의 응용분야는 유전병 진단이다. DNA칩으로 수많은 유전자를 빠른 시간 내에 정확하게 분석함으로써 유전자 변형에 의해 생기는 유전병을 진단하는데 쓰일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DNA칩 회사들이 수백억 달러의 연구비를 의약용 진단시약분야에 투자하고 있다.
미래의 생명공학과 분석화학 선도
Lab-on-a-chip과 DNA칩으로 대표되는 생의학 분석화학분야는 미래의 생명공학과 분석화학을 주도할 첨단과학이다.
포항공대 생명공학과의 최관용 교수는“Lab-on-achip과 DNA칩 기술은 화학, 생명, 환경, 제약, 의료보건등의 광범위한 산업전반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새로운 기술이다. 하지만 이 분야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전공지식이 필요하다”라고 말한다. 그는 “우선 화학과 생물은 기본이고 반도체 소자와 칩의 집적기술을 위해서 재료공학과 전자∙전기공학의 지식이 필요하다. 또한 화공, 의약, 환경, 약학 등 과학 전분야의 지식이 필요한 총체적 학문이 바로 생의학 분석화학”이라고 지적한다.
Lab-on-a-chip은 우리에게 환상적 미래기술을 약속한다. 강물의 오염 물질을 현장에서 바로 분석할 수 있으며, 한번에 많은 시료를 빠른 시간 내에 분석해 신약 후보물질을 쉽게 가려낼 수 있다. 또한 생의학 분석화학의 소형 분석기구를 이용하면 각종 유해한 세균을 탐지, 식별할 수 있는 장치가 손바닥 위에 실현 될수 있다.
DNA칩이 개발되면 미래의 모든 사람은 가정에서 피 한방울만 갖고도 각종 유전병을 진단해 낼 수 있다. 또한 이런 검사는 매우 간편해 암이 몸 속에서 생기기 시작했는지 또는 바이러스에 감염됐는지를 초기에 진단할 수 있다.
생의학 분석화학을 이용한 Lab-on-a-chip와 DNA칩 분야는 인간에게 개척해야 할 또다른 세계를 열어주는 도구를 제공한다. 동시에 이러한 일은 학문적성과 이외에도 산업적 파급효과가 매우 큰 중요한 일이다.
그 옛날 심청이가 인당수에 몸을 던져 눈먼 심봉사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줬던 것처럼, 생의학 분석화학의 연구는 자연을 이해하는‘새로운 눈’을 만든다는 기쁨으로 분석의‘바다’에 몸을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