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초의 해부도는 누가 그렸을까. 이 문제의 답을 이야기하기 전에 한가지 가정을 해보자. 고려 시대에 누군가가 인체를 해부해 해부도를 그렸다. 그는 아무도 몰래 무덤을 파헤친 후 시체를 해부했으며 자신이 본 것을 그리고 잘 봉한 다음 후손에게 5백년 후 뜯어보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5백년 후 그가 남긴 물품을 개봉해보니 자신이 해부를 한 경위와 해부도가 그려져 있다. 그런데 내용으로 보아 그가 해부를 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려 놓은 그림을 보니 뱃속에 구렁이가 들어 있고, 닭이 알을 품고 있는 등 전혀 사실과 맞지 않았다. 그가 남긴 그림를 해부도라고 할 수 있을까.
세계최초 놓친 다빈치
기독교의 힘이 강했던 중세에는 시체를 해부하는 것이 금지됐다. 따라서 의학 발전 속도가 아주 느렸고, 그 결과 중세 의학은 고대 그리스 의학자인 갈레노스의 의학이 계속해서 주류의 위치를 차지했다. 그러나 르네상스기에 접어들자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변화가 일어나 오랫동안 당연시되던 일들이 도전받기 시작했고 인체해부도 서서히 허용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아무리 해부를 했다 해도 해부를 통해 얻은 지식을 그림으로 남겨주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해부에 관한 내용을 배울 수 없고, 해부를 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도 없다. 그런데 단순히 해부를 했느냐 안했느냐의 문제보다는 누가 더 쓸만한 해부도를 남겼느냐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TV 프로그램에서와는 달리 조선시대의 명의 허준이 해부를 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그가 남긴 해부도가 도저히 해부를 해 본 사람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부정확한 그림이기 때문이다.
공식적으로 세계최초의 해부도를 남긴 사람은 베렌가리우스이다. 그는 1백구 이상의 시체를 해부해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수많은 조직을 새로 발견했으며, 1521년 발표한 저서에서 자신의 연구결과를 제시해 의학사가와 해부학자로부터 제대로 된 최초의 해부도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그의 발표보다 2년 앞서 사망한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해부도를 남겼다. 그도 시체를 해부해 인체에 있는 구멍의 부피를 측정했고 심혈관계와 신경에 관한 연구 결과를 기록으로 남겼다. 또한 단순한 해부학적 구조를 넘어서는 신체 각 부위의 기능에 대한 연구결과를 기술하는 등 베렌가리우스 못지 않은 해부학 지식과 훌륭한 해부도를 남겼다. 하지만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해부도는 그의 사후 2백년이 지나서 알려지는 바람에 해부학 발전에 전혀 공헌을 하지 못했다. 공헌 여부를 중시하는 서양인은 지금도 베렌가리우스의 해부도를 최초의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목숨 걸고 시체 훔친 해부학의 아버지
교통이나 통신수단이 발전하지 못했던 과거에는 새로운 움직임이 전파되는 속도가 느렸으므로 르네상스기의 역동적인 변화도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전파되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므로 시체해부가 허용됐다고 해도 16세기 초까지는 르네상스의 본거지인 이탈리아에 해당하는 이야기일 뿐 다른 유럽 여러나라에서는 허용되지 않는 곳이 많았다.
1543년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라는 해부학 책을 발표해 갈레노스 의학의 잘못된 점을 2백가지 이상이나 주장한 베살리우스는 프랑스에서 의학을 공부한 후 모국인 벨기에에서 해부학을 가르치던 교수였다. 그는 갈레노스의 해부학 기술에 많은 의문점이 있음을 발견하고 이를 규명하기 위해 시체를 해부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와 달리 벨기에에서는 해부가 허용되지 않던 시기였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아무도 몰래 시체를 훔쳐와 해부를 해가면서 해부학 지식을 쌓아나갔다.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라 그의 행동을 눈치챈 사람들이 그를 감시하기 시작했고, 결국 그는 자신의 비밀을 감추기 위해 이탈리아로 도망쳐야만 했다.
벨기에에서 볼 때 베살리우스는 시체를 훔쳐간 도둑에 해당하며 훔친 시체에 칼질을 함으로써 사람을 두번 죽인 죄인이지만 목숨을 건 그의 학문적 욕구는 오늘날 그가‘해부학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가지게 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