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개봉한 영화‘혹성탈출’과‘A.I.’는 인간으로 진화한 원숭이와 인간이 되고픈 로봇의 이야기를 다뤄 사람들의 흥미를 자극했다. 이 두 영화를 진화의 관점에서 고민해보면 어떨까. 원숭이 또는 기계가 과연 인간으로 진화할 수 있을까.
1 인간이 원숭이로부터 진화했다? 팀 버튼의 '혹성탈출'
과학 교과서를 통해 진화론을 처음 배우면서, 또는 다른 경로를 통해 진화론을 접하면서 듣게 되는 이야기가 있다. 인간의 조상이 원숭이라는 것이다. 그때 호기심이 많은 필자는 이런 의문을 갖곤 했다. 인간이 원숭이에서 진화했다면,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엔 원숭이가 인간으로 진화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인간의 우월함을 코믹하게 풍자
이런 가정으로 제작된 영화가 바로 팀 버튼의 ‘혹성탈출’이다. 팀 버튼 감독은 1968년 찰톤 헤스턴이 주연했던 고전 ‘혹성탈출’을 새로운 시각으로 재구성했다. 영화 속에서 지구로 돌아온 주인공은 인간처럼 지적으로 진화한 유인원들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는 인류의 모습을 발견한다. 사실 팀 버튼의 혹성탈출은 유인원의 진화에 대한 우려보다는 지적인 유인원을 통해 인간이 다른 종에 대해 갖고 있는 어리석은 우월감을 코믹하게 풍자하고 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인간이 맡는다.”
우주 미아가 돼버린 원숭이를 구하기 위해 우주선에 오르는 주인공의 대사이다. 그러나 자기 폭풍을 통과해 도착한 행성에서 주인공의 생각은 어이없는 오만이었다는 것이 밝혀진다. 그리고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간 노예 상인은 30년 전 원작에 출현한 찰톤 헤스턴이 유인원들에게 내뱉었던 대사를 인용한다.
“그 냄새나는 손 치워, 이 더러운 인간아!”
원작의 영웅 찰톤 헤스턴은 늙은 원숭이로 등장해 아들 테드에게 모든 인간을 없애라고 유언한다. 악몽은 인간과 유인원의 단순한 자리바꿈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유인원들이 보여주는 갖가지 행태는 현재 인간의 모습과 너무나도 흡사하다. 예를 들어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백색 피부를 가진 유인원들이다. 그들은 인간을 냄새나고 더럽고 난폭한 것들로 부르고, 치명적인 병을 옮기는 존재로 멸시한다. 또한 유인원 부모는 아이의 생일에 인간의 아이를 선물한다. 인권주의자(동물의 권익 보호가에 가까운)로 등장하는 여성 유인원이 인간 노예 상인에게 내뱉는 대사는 더욱 가관이다.
“이렇게 하면 우리도 인간과 다를 바 없어. 인간도 가르치면 우리와 어울려 살 수 있어!”
‘할리우드의 악동’이라는 별명에 어울리는 팀 버튼다운 상상력이다. 팀버튼의 혹성탈출은 상대편 입장에서 생각해본다는 뜻의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고사성어를 상기시키는 영화다. 실험실의 우리에 갇혀 있는 침팬지를 보면서 먼 훗날 인간의 두뇌에 실험용 전극을 꽂고 있는 침팬지를 연상하도록 만든다. 과연 유인원은 인간처럼 지적으로 진화할 수 있을까. 필자는 그런 표현 자체가 적절하지 않다는 쪽에 결론을 두고 싶다.
각자 생활방식에 맞게 진화
그렇다면 인간이 원숭이로부터 진화했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사용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크게 두가지의 문제점을 짚어볼 수 있다. 하나는 원숭이가 인간보다 열등한 생명체라는 선입견이고, 다른 하나는 진화가 좀더 우수한 생명체로 이뤄지려는 방향성이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물론 진화는 점차 다양해지고 복잡해지려는 성향을 갖고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모델에 접근해가는 식의 발전’이라는 방향성은 갖고 있지 않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듯 원숭이가 인간보다 열등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들은 인간과 달리 나무 위의 생활에 적합하게 진화했을 뿐이다. 바이러스를 포함한 지구의 모든 생명체는 38억년이라는 지구 생태계의 역사 속에서 나름대로 환경에 적합하게 진화한 생명체들이다. 지렁이가 인간보다 진화가 덜된 생명체일 이유는 없지 않은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화가 항상 발전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해보자. 진화가 진행될수록 생물의 종류가 증가하고 내부 기관이 복잡해지기 때문에 발전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산업혁명시절, 잘못 해석된 다윈의 진화론은 스스로 우월하다고 여긴 백인이 다른 인종을 침략해 노예로 만드는 것을 ‘적자생존’으로 정당화했다. 히틀러는 진화론을 인용해 유태인의 학살을 변명했다. 그러나 인종 사이에 문화적 차이가 있을 뿐, 지적 능력에는 차이가 없다. 마찬가지로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우월과 열등 관계에 놓인 것이 아니라 각자 다른 생활 방식에 알맞게 진화했을 뿐이다. 인간을 다른 동물과 차이가 나도록 만드는 것은 뛰어난 지적 활동으로 인한 소산물인 문화다.
인류 진화의 방향은 문화에서 찾는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미래의 인간은 어떤 모습일까. 높은 지능으로 인해 거대해진 두뇌, 연장된 수명, 영화 속에 등장하는 외계인처럼 가냘픈 팔다리를 가진 모습일까. 현대의 인류는 더이상 진화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진화가 일어나려면 가장 기본적인 필요조건으로 자연선택이 선행돼야 하는데, 문화와 의학의 발전은 인류로 하여금 자연선택의 법칙을 초월하도록 허락했기 때문이다.
문명이 싹트기 전에는 추위에 잘 견디는 사람이나 힘센 사람 또는 남보다 뛰어난 사고능력으로 상황판단을 잘 하는 사람이 살아남아 자손을 남겼다. 그러나 현대의 인류에게 선천적인 육체적 능력이나 사고 능력은 사회에서 성공하는 직접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인적인 능력의 차이에 관계없이 누구나 배우자를 만나 자손을 낳을 수 있고, 개인들이 갖고 있는 다양한 재능을 발전시키는 것이 성공으로 연결되는 사회가 됐다. 현대 사회에서 인류의 진화를 논하는 일은 어쩌면 가치가 없어보인다. 다만 남아있는 가능성이 있다면 바이러스에 의한 유전자의 변형과 영화 ‘가타카’의 인위적인 선택으로 인한 진화 정도가 거론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인류는 진화의 가능성을 영영 잃어버린 것일까. 아니다. 우리는 다른 곳에서 인류 진화의 방향을 모색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문화의 진화다.
문화의 진화를 다루기에 앞서 잠시 다른 질문을 하나 던져보자. 생명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아직까지 그 해답을 밝혀내지 못했다. 우리는 단지 생명이 갖고 있는 몇가지 특징만을 파악했을 뿐이다. 생명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자신과 비슷한 개체를 복제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리고 진화는 생명의 자기 복제능력에서 출발한다. 어버이는 자신과 비슷한 모습의 자손을 생산하는데 자손들은 여러가지 요인에 의해 부모와 조금씩 다른 점을 갖고 태어난다. 그 중 환경에 유리한 특질을 갖고 있는 개체가 살아남아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에 전달한다. 이런 일이 오랜 시간 동안 일어나면서 종의 진화가 이뤄지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런 방식의 진화를 인류의 문화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서태지는 문화 유전자 역할
현대의 진화생물학자 중 한사람인 리처드 토킨스는 문화의 진화를 이끌어가는 ‘밈’(Meme)이라는 존재에 대해 역설했다. 밈은 문화의 유전자로, 종교와 정치에서부터 대중음악과 패션의 유행까지 문화의 전반적인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정치는 전제주의와 왕정을 거쳐 민주주의로 진화했다. 서태지의 음악적 코드가 이후 10년 간 한국 대중음악의 변화에 영향을 줬다면 그 역시 대중 문화를 이루는 유전자인 밈으로 볼 수 있다.
문화는 진화한다. 과거부터 지금도 수많은 문화가 탄생했다. 어떤 것은 철 지난 유행처럼 금새 사라지고, 어떤 것은 다양한 모습으로 변해 그 명맥을 유지한다. 그런 문화적 유전자를 뜻하는 신조어가 바로 밈이다. 밈은 모방을 뜻하는 그리스어 ‘mimeme’으로부터 리처드 도킨스가 새롭게 만들어낸 단어이며, 1976년 웹스터 사전에 정식 명사로 채택됐다. 문화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은 밈으로 간주될 수 있고, 그 중 환경과 서로 다른 문화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채택되는 밈으로 인해 전반적인 문화가 진화한다는 것이 리처드 도킨스의 주장이다.
인간은 냉혹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수단으로 문화를 발전시켰고, 문화는 자연선택과 진화의 이기성을 컨트롤 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사실, 밈에 대한 이론은 이기적이며 냉혹한 생물학적 진화의 세계에서 인류의 문화적 양심을 찾으려는 리처드 도킨스의 변명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밈은 인류의 진화에서 생물학적인 진화보다 더욱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인간의 진화는 멈췄다. 그러나 인류가 창조한 문화는 앞으로 무궁무진한 진화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인류의 문화 유전자인 밈은 인간의 육체적인 진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
요즘 우리사회에서 거론되는 트렌스젠더도 밈에 의해 영향을 받는 육체적인 진화로 볼 수 있다. 현재의 문화는 인간의 복제나 우수한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나는 수정란의 선택을 인정하지 않지만, 미래의 문화에서는 그런 것들이 자연스러운 일상이 돼있을지도 모른다. 또는 팔과 다리를 기계로 바꾸는 것이 눈 나쁜 사람이 안경을 쓰는 것과 동급으로 생각할 정도로 문화가 바뀔 수도 있다.
앞으로 육체적인 진화보다는 문화적인 진화가 인류의 생활에 더욱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적 진화는 인류의 생물학적 진화까지 야기할 것이다. 즉 인류의 진화는 인류가 이룩한 문화의 진화와 같은 선상에 놓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2 인격체 갖춘 로봇 등장할까 스티븐 스필버그의 ‘A.I.’
우리는 로봇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다.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는 어린이 만화프로그램의 50% 이상을 로봇이 점유하고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가까운 미래에 인간을 닮은 로봇의 봉사를 받으며 살아가는 일상의 모습을 의심하는 사람이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사실 어린 시절 꿈꿨던 기대에 비하면 로봇 시대의 도래는 더디게만 느껴진다.
우리가 로봇을 만드는 이유는 너무나 당연하다. 로봇은 우리가 귀찮아하거나 위험한 일을 대신 해줄 수 있다. 청소에서부터 설거지, 정원관리, 힘든 공장일, 위험 지역의 탐사까지.
‘로봇은 우리의 친구가 돼줄 수 있다’라는 말도 어색하게 들리지 않는다. 이는 우리가 프로그램에 의해 단순하게 움직이는 로봇이 아닌 고차원적인 상호작용이 가능한 로봇을 원하고 있음을 뜻한다.
간단한 예로 몇년 전 소니에서 개발한 로봇 강아지 아이보를 들 수 있다. 아이보는 로봇으로서 어떤 편의도 제공해 줄 수 없지만 살아있는 강아지와 비슷한 감정을 가진 것처럼 행동함으로써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로봇을 원하면서도 두려워하는 이유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신작 ‘A.I.’를 떠올려보자. A.I.는 감정을 갖고 있는 로봇을 동화적 서술방식으로 그린 영화다. 주인공 데이빗은 자식이 없는 부모들을 위해 만들어진 로봇으로, 아들이 5년째 식물인간으로 누워있는 부부에게 실험적으로 입양된다.
로봇이 잠들어있는 아들을 대신할 수 없다고 생각한 모니카는 데이빗에게 심한 거부감을 느끼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엄마의 사랑을 바라는 로봇 아이에게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게 된다. 그리고 모니카가 설명서에 적힌 일련의 단어를 읽어주는 순간부터 데이빗은 엄마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에 빠진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친아들이 데이빗을 질투하면서 사고가 연발하자 모니카는 데이빗을 숲에 버린다.
이때부터 엄마의 사랑을 얻기 위한 데이빗의 모험이 시작된다. 데이빗은 ‘진짜 아이’가 되기 위해 푸른 요정을 찾아나선다. 엄마가 들려준 피노키오의 푸른 요정이 자신을 인간으로 만들어주면 엄마의 사랑을 되찾을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데이빗은 폐기물 축제에서 파괴될 운명에 놓이게 된다. 폐기물 축제에 모여든 사람들로부터 우리는 인간이 로봇에 대해 갖고 있는 두려움과 분노를 엿볼 수 있다. 사람들은 로봇을 끌어내 온갖 잔인한 방법으로 파괴하며 즐거워한다. 과연 우리가 로봇을 원하면서도 두려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로봇이 인간 고유의 영역을 침범할지도 모른다는 것과, 더 나아가 인간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로봇에게 지배당할지도 모른다는 추측에 있다.
“로봇과 잠자리를 하게 되면 보통 남자들이 시시하게 느껴질 거야”라는 대사에서 스필버그 감독은(또는 큐브릭 감독) 남녀 간의 사랑마저 로봇이 대신할 수 있다는 사실을 코믹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영화에서 무엇보다 공포스러운 것은 데이빗의 사랑이다. 인간의 계산적인 사랑과 달리 데이빗의 사랑은 맹목적이다.
“엄마, 진짜가 아니라서 미안해요. 저를 버리지 마세요” 라는 데이빗의 눈물 섞인 말에서 모니카는 인간보다 순수한 사랑을 가진 로봇에게 몸서리치는 공포를 느꼈을 수도 있다.
인간의 마음을 닮아가는 컴퓨터
미래의 로봇이 인간보다 뛰어난 육체를 지니고 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앞으로는 ‘로봇은 얼마나 인간의 마음을 닮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로봇은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움직일 수 있는가?’라는 질문보다 중요할 것이다. 인간의 진화가 수백만년에 걸쳐 진행된 것에 비해 컴퓨터는 1946년 에니악의 탄생 이후 눈부신 발전을 이뤘다. 당시의 과학자들이 예견하길 21세기의 컴퓨터는 냉장고 만한 크기로 작아질 것이라 장담했다. 그러나 우리는 지하철에서 손바닥 안에 들어가는 컴퓨터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1981년 IBM 컴퓨터의 운영체계를 개발한 빌 게이츠는 앞으로 개발될 모든 개인용 컴퓨터의 메모리는 6백40KB면 충분하다고 예견했다. 그러나 필자의 컴퓨터에는 2백56MB의 램이 장착돼 있다.
1997년 5월, 체스 챔피언 카스파로프와 IBM에서 제작한 ‘딥블루’의 체스 경기가 개최됐다. 결과는 2승 3무 1패. 딥블루의 승리였다. 물론 컴퓨터의 발전이 인간의 마음을 닮은 인공지능의 완성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수학적인 논리력을 중요시하는 체스 경기로 인간과 컴퓨터의 지적 능력을 비교할 수는 없다. 우리가 사용하는 컴퓨터는 인간보다 뛰어난 계산 능력과 데이터처리 능력을 갖고 있지만, 인간의 판단 능력과 마음을 흉내낼 수는 없다.
그러나 최근 들어 인간의 마음을 과학적으로 이해하려는 연구가 활발히 진행중이며,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고 있다. 그리고 인간의 뉴런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유니트로 구성된 신경망 회로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인간의 마음을 알고자 하는 욕망으로 인공지능을 연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필자는 인간의 마음에 대한 지식이 완성되는 날, 인간의 마음을 닮은 기계도 완성되리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인간의 사고를 완벽히 흉내내는 컴퓨터의 등장 이후에 인간보다 고차원적인 사고 능력을 가진 컴퓨터가 나타나지는 않을까.
로봇과 공존하기 위한 고민
사실 로봇에 대한 우려는 로봇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있었다. 수많은 작가들과 과학자들은 로봇으로부터 인간을 지키기 위한 여러 장치들을 고안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 3원칙일 것이다.
첫째, 로봇은 사람에게 위험을 가해서는 안되고 위험이 미치는 것을 방관해서는 안된다. 둘째, 로봇은 사람이 부여한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 안된다. 다만 제1조에 해당되는 경우는 제외한다. 셋째, 로봇은 제1조와 제2조에 반대되지 않는 한 로봇 자신을 지키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위의 세가지 법칙은 로봇으로부터 인간을 지키기에 너무도 나약해보인다. 로봇의 두뇌에 각인된 3원칙은 언제라도 지워질 수 있으며, 전투를 위해 제작된 로봇 병사는 로봇 3원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도 있다. 그리고 기계 이상의 감정을 가진 로봇에 대처하기에 로봇 3원칙은 시대에 뒤떨어져 보이기까지 한다. 앞으로 인간은 로봇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또는 로봇과 공존하기 위해 좀더 많은 장치를 고안해야 할 것이다. 로봇 시대의 도래 이전에 인간이 로봇을 통제할 수 있다는 확신이 필요하다. 그리고 하나 더. 인간으로부터 로봇을 지키기 위한 장치들도 필요하지 않을까.
우리는 공장에서 자동차에 페인트를 칠하는 단순한 기계적인 로봇이 아닌, 인간을 닮아가는 기계인 로봇을 꿈꾼다. 로봇의 궁극적인 목표는 인간과의 상호작용이 가능한 감정을 가진 기계일 것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우리는 한가지 문제에 직면한다. 감정을 느끼기 위해선 감정을 느끼는 주체인 자아가 선행돼야 한다. 과연 우리는 자아를 가진 피조물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을까.
하나의 인격체로 인정해야 하나
1997년 영국의 로슬린 연구소에서 태어난 복제양 돌리는 그해 최고의 과학적 업적으로 기록됐다. 이후 돌리는 수많은 윤리적 논쟁을 불러일으켰는데, 복제의 성공으로 인해 인류가 누릴 혜택보다는 인간 존엄성의 파괴에 대한 우려가 더욱 많이 제기됐다. 그리고 세계의 많은 국가가 인간 존엄성의 보호라는 이유로 인간 복제를 금지시키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과연 인간의 존엄성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 종교적·철학적으로 많은 의견들이 제시되고 있다. 그것을 간추려보면 인간은 자신의 자율적 의사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유일하게 자아를 인식하며 자신의 행동과 삶의 의미를 찾는 존재라는 것이다. 어떤 동물도 자신의 본능을 뛰어넘을 수 없지만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문화와 예술을 창조할 수 있는 존재다.
그렇다면 인간의 존엄성과 관련된 모든 조건을 만족시키는 인공지능을 만들어낸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과연 로봇을 하나의 인격을 가진 존재로 인정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애초에 그런 로봇의 생산을 인간 복제와 마찬가지로 금지해야 할 것인가. 이는 복제양 돌리와 마찬가지로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데이빗은 한사람을 끝까지 사랑하도록 프로그래밍된 로봇이다. 데이빗이 폐기되는 순간까지 그 사랑에는 변함이 없다. 모니카는 남편으로부터 충분한 주의를 받았고, 데이빗의 사랑을 받아들일 준비가 됐다고 확신을 한후 설명성에 적힌 단어를 읽었다. 그러나 데이빗을 끝까지 책임질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