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의 마이크론 디바이스를 대체할 21세기 나노 디바이스 제작에는 SPM의 역할이 지대하다. 반대로 새로운 나노 디바이스는 SPM의 기능향상에 도움을 준다. 천생연분 같은 이 둘의 만남을 살펴보자.
지난 한세기 동안 인류는 마이크론의 세계(1μm= ${10}^{-6}$m)까지 정복했다. 그 결과 현재 최첨단 펜티엄 칩 속에 있는 트랜지스터는 소자 하나의 크기가 불과 수분의 1μm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현재 전자산업은 소형화 기술로 좀더 다양하고 빠른 성능의 전자소자를 만드는 과제를 안고 있다. 반도체 산업에서 중요한 경험법칙 중 하나인 무어의 법칙에 따르면, 지난 반세기에 걸쳐 실리콘 소자의 크기를 반으로 줄이는데 인류가 필요한 시간은 평균 18개월이 소요됐다. 만약 이 법칙이 지속된다면 앞으로 수십년 내에 우리가 쓰는 전자소자의 크기는 단지 몇개의 원자크기로, 즉 나노미터(1nm=${10}^{-9}$m)로 줄어들어, 지난 세기를 주름잡았던 마이크론 디바이스는 나노 디바이스에 지위를 넘겨줄 것으로 예측된다.
그러나 디바이스의 최소 소자 크기가 광학적 한계인 수백nm 이하가 되면 기존의 반도체공정의 광학적 방법은 더이상 적용되기가 어렵다. 이에 따라 많은 과학자들은 SPM이 궁극적으로는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는 한 수단이 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미 실제로 미래의 실리콘 반도체 디바이스를 대치하리라고 예상되고 있는 나노결정, 나노튜브와 같은 나노물질을 이용한 실험적인 디바이스 제작에는 SPM이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도구로 쓰이는 중이다.
저공 비행으로 나노소자 이미징
SPM이 나노 디바이스 제작에서 어떤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일까. 우선 SPM은 나노세계를 들여다보는 새로운 도구로 쓰인다. 어두운 방안에 갑자기 정전이 돼 깜깜해졌다고 하자. 더이상 사물을 보기 어려울 경우, 우리는 하는 수 없이 손으로 더듬어서 길을 찾아 나아가야 한다.
마찬가지 일이 나노세계에도 일어난다. 아무리 정밀한 렌즈를 가진 현미경이라도 빛을 이용해서는 수백nm 이하의 작은 물체를 보기는 불가능하다. SPM을 이용하면 이러한 광학적 한계 이하에서 마치 우리의 손이 우리의 눈을 대신하듯 날카로운 탐침으로 더듬어 사물의 모양을 파악한다.
나노 소자의 구조를 파악하기 위한 이미징(imaging)을 위해 흔히 사용되는 SPM은 바로 STM과 AFM이다. STM은 도체 시료와 탐침 사이에 흐르는 터널링 전류를 측정함으로써, 또한 AFM은 미세한 탐침이 달려있는 지렛대가 시료 표면과의 작용에 의해 휘는 정도를 측정함으로써 상세한 표면 굴곡을 원자 크기의 해상도로 측정하는 현미경이다. 따라서 나노결정이나 나노튜브를 이용한 새로운 나노 디바이스 제작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고 있다. 이같은 나노물질을 이미징하는 경우, 고려해야 할 점이 있다. SPM의 탐침과 시료 표면의 상호작용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예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지금 책상 위에 작은 구슬을 올려놨다고 가정하자. 이제 눈을 감고 손으로 더듬어서 구슬이 있는 위치를 찾으려면, 아주 세심하게 손의 힘을 조정해 구슬에 손이 닿는 순간에 구슬이 다른 곳으로 굴러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만약 손가락이 실제로 구슬에 닿기 전에 구슬을 느낄 수 있다면 어떨까.
어찌 보면 불가능해보이는 이 방법이 나노 세계에서는 가능하다. 과학자들은 작은 터널링 전류나 원거리에 작용하는 미약한 원자 사이의 힘을 측정해서 실제로 SPM 탐침이 시료의 표면에 물리적인 접촉을 하기 전에 표면과의 거리를 알맞게 조정한다. 이러한 세밀한 조정으로 말미암아 SPM 탐침은 아무리 굴곡이 심한 표면이라도 표면과 부딪히는 일 없이 극저공 비행을 하며 우리에게 시료 표면의 정보를 제공한다.
SPM이 나노 디바이스 제작에서 차지하는 두번째 역할은 나노구조를 조작하는 도구로 쓰인다는 점이다. 이 경우 표면의 윤곽구조를 얻는 이미징과는 반대로, SPM 탐침과 시료의 상호작용하는 힘을 증가시킨다. 그러면 시료 표면을 조작하거나 변화시켜 나노구조 자체를 만드는 일이 가능하다. 미국 IBM 연구소에 있는 아이글러 박사 연구팀은 이 분야에 있어서 매우 탁월한 업적을 갖고 있다. 이들은 이미 십여년 전부터 STM을 이용해 단결정 구리 표면 위에서 철원자를 하나씩 하나씩 조작해 원하는 곳에 배열해 양자 울타리라고 불리는 새로운 나노구조를 만들어냈다.
비슷한 방법으로, 필자가 속했던 하바드대 연구진에서도 STM을 이용해 새로운 나노구조의 가능성을 열었다. STM 탐침에 순간적으로 큰 전압을 걸어 발생한 강력한 전기장을 이용, 층층이 쌓여있는 단결정 표면의 원자들을 한번에 움직인다. 이로써 원래물질과 다른 구조를 가진 단지 한장의 원자평면을 만들 수 있다.
STM과 더불어 대표적인 SPM인 AFM을 이용한 경우는 어떨까. 일반적으로 1nm 이하의 크기를 갖는 STM 탐침에 비해, AFM 탐침은 크기가 수십nm에 이른다. 따라서 STM이 원자와 분자와 같은 비교적 작은 나노물질을 다루는 것에 비해 AFM은 수십-수백nm에 이르는 훨씬 더 큰 나노물질을 조작할 수 있다.
AFM을 이용한 나노조작은 주로 AFM 탐침과 시료 사이의 물리적인 상호작용을 이용한다. 수년 전 IBM연구소 아보리스 박사 연구진은 이러한 AFM으로 탄소나노튜브를 반도체 표면에서 움직여 새로운 나노 디바이스를 만들어냈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네덜란드 델프트대 데커 교수 연구팀과 코넬대 맥퀸 교수 연구팀에서 각각 STM과 AFM 탐침에 전압을 걸어서 나노튜브 다발을 끊어낼 수 있다는 점도 보였다. 이같이 SPM은 자르고, 끊고, 옮기는 등 나노재료를 조작하는 도구로도 다양하게 이용되고 있다.
나노튜브 끝의 화학성질 변경
한편 본격적인 나노 디바이스 제작에는 기존의 SPM의 기능을 좀더 확장시킬 필요가 있다. 이는 기존의 SPM 탐침을 개량함으로써 이뤄진다.
한 예로 최근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 버클리분교의 기계공학과에서는 AFM 탐침 끝에 온도계 역할을 하는 아주 작은 열전쌍(thermocouple)을 만들었다. 이같은 열전쌍이 달린 AFM 탐침을 시료의 표면 위에서 움직이면, 탐침과 연결된 캔틸레버의 휜 정도를 재는 동시에 열전쌍의 전압을 읽을 수 있다. 그러면 단지 시료의 표면 윤곽뿐 아니라 표면의 온도 분포도 나노미터 단위로 알 수 있다. 이같은 AFM의 확장된 기능은 나노 디바이스 구동시 열분포를 조사할 수 있고, 이로써 디바이스의 열적 안정성을 조사하는데 매우 중요한 기능을 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10여년 전에 발견된 탄소나노튜브는 SPM의 기능 향상과 확장에 매우 중요한 기여를 해왔다. 탄소나노튜브가 많은 나노 과학자들로부터 주목받은 이유는 그 독특한 전기적인 성질과 기계적인 성질에 있다. 탄소나노튜브는 원자배열 구조의 섬세한 변화에 따라 도체도 반도체도 되는 전기적인 성질을 갖고 있다. 또한 기계적으로 튜브벽의 탄소 원자간의 강한 공유결합에 의해 인장 강도가 매우 큰 장점이 있다. 이와 함께 마치 플라스틱으로 만든 빨대처럼, 외부에서 힘을 주면 부러지는 대신 휘어지고, 많은 힘을 가해 꺾더라도 힘을 제거하면 다시 원상으로 되돌아오는 마술같은 성질을 지녔다.
이같은 탄소나노튜브의 우수한 성질을 처음으로 SPM에 적용한 예는 현재 스탠퍼드대 교수인 다이 박사의 실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나노튜브가 매우 우수한 기계적인 성질이 있음에 착안해, 탄소나노튜브를 AFM 탐침 끝에 붙였다. 이를 통해 AFM의 분해능을 획기적으로 개선시키는 길을 보여줬다.
기존의 AFM 탐침이 약 30nm 정도의 분해능을 가진 반면, 나노튜브를 사용한 AFM의 경우 그 분해능이 5nm 이하로 달성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오래 사용할 경우에도 쉽게 부러지거나 닳아 없어지지 않는 장점도 있다. 기능이 향상된 이같은 AFM은 즉각 많은 나노과학자에 의해 널리 이용되고 있다.
나노튜브의 응용은 단지 AFM의 해상도 향상에만 그치지 않고 있다. 흑연의 공유결합과 같은 나노튜브의 화학적 결합구조는 사실 화학자들에게 이미 오랫동안 잘 알려져 왔다. 따라서 흑연에 대해 알려진 것과 비슷한 화학적 처리에 의해 나노튜브 끝의 화학적 성질을 바꿀 수 있다. 만약 끝이 화학적으로 변형된 나노튜브를 AFM 탐침으로 사용하면, 표면의 윤곽구조와 더불어 표면의 국소적인 화학적 구조까지도 측정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더 나아가서는 시료의 국소적인 화학적 조작까지도 기대해볼 수 있다.
정전기유도 이용해 집게 개발
수년 전부터 하버드대 리버 교수 연구진에서는 이와 같이 화학적으로 변화된 나노튜브 SPM을 이용해 나노미터 단위에서 바이오틴과 같은 단백질이나 DNA와 같은 생체 내 거대 분자의 탐지와 조작을 보여줬다. 이같은 응용은 열쇠가 특정 자물쇠에 들어맞듯이 나노튜브 끝에 붙여진 분자가 표면에 있는 특정 분자와 결합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지금까지 설명한 SPM은 모두 하나의 탐침을 이용하는 경우다. 최근에 필자가 속한 연구팀에서는 하나의 탐침 대신에 2개의 나노 탐침을 이용한 새로운 SPM을 고안했다. 이름은 나노집게(nanotweezers). 끝이 매우 가는(1백-5백nm) 유리관에 2장의 서로 떨어져있는 금속막을 입힌 후 그 끝에 두개의 탄소나노튜브를 붙인 것이다(그림). 이 디바이스의 금속전극에 전압을 가해주면, 양과 음의 전하가 각각의 나노튜브 끝에 유도된다. 우리는 플라스틱 자를 털헝겊으로 문지르면 플라스틱에 전하가 유도돼 작은 종이조각이 들어붙는 정전기유도 현상을 알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노튜브의 끝에 유도된 서로 다른 부호의 전하는 서로 잡아당기게 된다. 다른 전하 사이의 끄는 힘은 나노튜브가 휘면서 만드는 탄성력과 균형을 이루기 때문에, 집게의 팔을 이루는 나노튜브는 전압에 비례해 서로 가까워진다. 따라서 외부에서 가해주는 전압으로 나노튜브로 만들어진 나노집게의 동작을 조종할 수 있다.
실제로 필자의 연구진은 이 나노집게로 수백nm의 나노구조를 조작해봤다. 또한 이 나노집게는 전기적 성질이 좋은 나노튜브의 장점을 이용해, 집게로 집혀진 시료의 전기적 성질을 측정할 수 있다. 따라서 그 자체가 전기적인 특성을 가진 나노 디바이스가 될 수도 있다. 더 나아가서 나노집게는 생물세포를 조작하거나 나노기계를 만들고 미세 수술에도 응용을 기대해볼 수 있다.
SPM은 쓰이는 탐침이 수nm라는 면에서 그 자체가 하나의 나노 디바이스이다. 나노세계와 우리를 이어주는 매우 중요한 도구인 것이다. 지금 세계는 나노 디바이스의 개발에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나노세계의 승자가 되기 위해 과학자들은 새로운 SPM 기술과 이를 이용한 새로운 디바이스의 개발에 지금 이 시간에도 노력중이다. 또한 개발된 나노 디바이스는 다시 새로운 SPM의 기술을 탄생시킨다. SPM과 나노 디바이스의 상호상승작용은 나노과학 발전의 중요한 원동력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