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리소그래피 기술은 반도체 표면에 1백nm 두께의 회로를 그릴 수 있는 정도다. 여기에 쓰이는 기술은 사진기술. 그러나 더이상 가늘어지기 어렵다. 새로운 리소그래피 기술이 필요한 시기다. 바로 SPM이다.
현대 과학기술분야에서 리소그래피(lithography)란, 반도체나 다른 고체의 표면을 처리해 아주 작은 구조를 만드는 기술을 일컫는다. 현재 컴퓨터 집적회로제작에 쓰이는 리소그래피 기술은 사람 머리카락 1/백 두께의 선을 반도체 표면에 그릴 수 있다. 우리나라의 주력산업인 반도체 산업은 누가 더 작게 리소그래피를 해서 더 많은 회로를 한개의 칩 안에 넣을 수 있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반도체 공정에 쓰이는 리소그래피의 기본원리는 ‘사진 리소그래피’라는 사진현상과 비슷한 기술에 바탕을 둔다. 사진현상의 기본원리는 필름을 통해서 감광재료가 묻어있는 종이에 특정부분에만 빛을 쪼여주는 것이다. 물론 사진의 크기는 돋보기 같은 렌즈의 조합으로 조정할 수 있다.
반도체 공정도 마찬가지다. 반도체 표면을 감광재료로 덮은 후 특정한 부분만을 필름(photomask)을 통해, 눈에 보이는 빛(가시광선)보다 파장이 짧은 자외선을 쪼여준다. 자외선을 쪼인 부분의 감광재료는 현상용액으로 녹여지고, 그 부분의 반도체 표면이 드러나게 된다.
이러한 사진 리소그래피는 수백조원에 달하는 반도체 산업에 핵심기술로 자리잡아 왔다. 치열한 반도체 기술 경쟁에 힘입어, 최근 사진 리소그래피 기술로 이미 1백nm 정도까지 작은 회로를 만드는 수준에 도달했다.
하지만 사진 리소그래피로 더이상 작은 회로를 만들 수 없다. 사진 리소그래피에 쓰이는 가장 짧은 자외선의 파장은 1백nm 정도. 때문에 1백nm보다 더 세밀하게 회로를 그릴 수 없다. 굵은 연필심으로 가는 선을 그리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때문에 여러나라는 현재 사진 리소그래피를 대체할만한 새 기술개발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자외선 대신 전자빔이나 파장이 아주 짧은 빛의 일종인 X선을 써보려는 노력도 하고 있고, SPM의 탐침을 이용하려는 연구도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현재까지 어느 누구도 자신있게 차세대기술을 예측하지 못하고 있다. 한마디로 리소그래피의 춘추전국시대가 도래한 셈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최근의 나노기술이나 생명공학의 눈부신 발전에 힘입어, 반도체 외의 다른 물질을 위한 리소그래피 기술에 대한 필요성이 증가하는 것도 주시할만하다. 예를 들어 게놈프로젝트에는 염기서열(DNA sequence)을 판독하기 위한 DNA칩이 많이 쓰인다. 현재 쓰이는 DNA칩은 유리판에 DNA 한가닥으로 점을 찍어놓은 것이다. 이 칩을 배열을 모르는 DNA 용액에 넣으면, 용액 속 DNA가 어떤 특정한 배열을 형성하는지를 알 수 있다. 즉 용액 속 DNA의 특정한 배열이 DNA칩에 찍어놓은 한가닥의 DNA에 달라붙어 DNA칩 속 특정 부분의 색을 변화시킨다. 이로 인해 모르는 DNA 배열을 파악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종류의 DNA칩이나 다른 생화학물질 판별을 위한 칩 개발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런데 사진 리소그래피에 쓰이는 감광재료는 고분자물질로서 화학작용을 통해 생화학물질을 변질시킬 수도 있고, 감광재료 처리과정중 칩을 1백℃ 정도까지 가열하는 과정이 생화학물질을 변형시킬 수도 있기에, 기존의 사진 리소그래피 기술로 생화학 물질들을 다루는데 어려움이 있다. 따라서 이런 생화학물질이 쓰이는 칩들을 한칩에 집적시켜 가볍고 다양한 기능의 칩을 만들려면, 생화학물질을 위한 새로운 리소그래피 기술이 필요하다. SPM을 이용한 리소그래피는 반도체 공정에서의 사진 리소그래피 기술의 한계를 극복하고, DNA칩처럼 새로운 물질을 위한 리소그래피 기술에 대한 필요성을 충족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활발히 연구되고 있다.
원자로 쓴 글씨 ‘IBM’
SPM이 차세대 리소그래피 기술에 이용되는 이유는 나노물질 표면과의 직접적인 작용 때문이다. SPM은 10nm보다 작은 탐침으로 물질의 표면을 보고 만지고 조작할 수 있다. 따라서 쉽게 사진 리소그래피 기술의 한계를 넘어 1백nm 보다 가는 선을 그릴 수 있다. 때문에 발명 초기부터 리소그래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1990년 아이글러를 비롯한 IBM 연구원들이 원자 하나하나를 옮겨 ‘IBM’이라는 글자를 쓴 것이 바로 그 예다. SPM을 이용한 리소그래피의 한획을 그은 사건이었다.
네이처지에 발표된 이 실험에서, 아이글러는 STM 탐침을 이용해 크세논 원자 하나하나를 옮겨 니켈 표면에 글씨를 쓰는데 성공했다. 이 원자단위 리소그래피는 리소그래피의 궁극적인 해상도를 보여주는 것으로, 현재까지 다른 방법으로는 구현되지 못하고 있다. 이 결과는 당시 세상사람들에게 STM에 대한 깊은 인상을 심어줬다.
이 원자단위 리소그래피는 발전을 거듭해, 최근에는 다원자로 이뤄진 분자를 고체표면에 붙이기도 하고, 심지어 분자 하나하나의 화학구조를 직접 변화시키기도 한다. 예를 들어, 지난해 독일 베를린대 리더 교수는 구리 표면에서 두개의 페닐 분자(C6H5)를 STM 탐침으로 합성해 바이페닐 분자(C12H10)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그림1). 또한 코넬대 윌슨 호 박사(현재 UC Irvine 교수)는 STM 탐침을 이용해 아세틸렌 분자가 구리 표면 위에 달라붙은 방향을 바꾸기도 하고, 은 표면에서 일산화탄소를 철 분자에 화학적으로 결합시키기도 했다.
이렇게 원자나 분자를 원하는 대로 조정한다는 것은 이전까지 과학자들은 상상조차 못했던 일이다. 원자나 분자를 조작할 수 있는 STM은 나노과학을 비롯한 과학연구에 많은 공헌을 했다. 1993년 크로미를 비롯한 IBM 과학자들은 구리 표면에 철 원자들을 원 모양으로 배열한 후, 이 원안에 잡힌 표면 전자의 운동을 연구했다. 또한 최근의 새로운 분야인 분자전기학에서는 분자 하나하나를 전선이나 트랜지스터 같은 전기 회로 소자로 쓰려고 하는데, STM을 이용한 원자단위 리소그래피 기술로 분자회로를 조립하려는 연구도 진행중이다.
하지만 STM을 이용한 리소그래피는 몇가지 한계가 있다. 원자들을 모아 수백만개의 회로로 이뤄진 컴퓨터 칩을 만들자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 때문에 실제 반도체 공정에는 쓰이지 않고 있다. 또한 이 기술은 공기 중 습기에서 오는 물분자나 작은 기온변화에 아주 민감하기 때문에 진공이나 극저온을 요한다. 반면 생명체에 관계된 많은 물질들은 습기가 없는 진공상태나 극저온에서는 쉽게 망가지기 때문에, 생화학물질을 위한 리소그래피로도 많이 쓰이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AFM을 사용한 리소그래피는 어떨까. AFM을 사용한 리소그래피 기술은 크게 2종류다. 그 중 하나는, 나노미터 크기의 AFM 탐침으로 직접 반도체 표면을 긁어 선을 그리는 것이다(나노새김, nano-indentation). 이 경우에는 단단한 다이아몬드 탐침을 이용한다. 나노새김 기술은 반도체 칩 표면에 잘못 연결된 도체 선을 끊어 회로를 고치거나, 사진 리소그래피 중 감광재료의 일부분을 긁어서 없애는데 사용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도체로 만들어진 AFM 탐침으로 전기를 흘려 특정 반도체 표면을 산화시키는 것이다(나노산화, nano-oxidation). 이렇게 표면의 특정 영역만을 산화된 반도체로 덮음으로써, 사진 리소그래피에서 반도체 표면의 일부만을 감광재료로 덮는 과정을 대신할 수 있다.
잉크펜처럼 찍어 쓰는 나노프린터
최근에 필자는 AFM을 이용한 새로운 리소그래피 기술을 고안했다. 일명 ‘나노펜’ 기술(dip-pen nanolithography). 오늘날 볼펜과 같이 다양한 필기구가 보편화되기 전에 사람들은 잉크통에 찍어 쓰던 습자연습용 펜을 사용했다. 나노펜 기술은 이와 비슷하다.
나노펜 기술은 AFM 탐침을 펜으로 삼아, 화학이나 생화학물질 용액 잉크를 찍어서, 고체표면에 글씨를 쓰거나 선을 그린다. AFM을 마치 가정에서 많이 쓰는 프린터처럼 사용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단지 종이 대신에 반도체 같은 고체표면에 인쇄를 할 뿐이다. 기존 프린터의 해상도가 1천4백40DPI 정도인데, 나노펜을 이용한 프린터의 해상도는 2백만DPI에 이른다.
실제로 나노펜 프린터을 이용해 금 표면에 문장을 썼다. 여기에 쓰인 문장은 잘 알려진 물리학자인 고 리처드 파인만이 1959년에 한 연설(1960년에 책으로 발표됨)의 한 부분이다. 이 연설 내용은 놀랍게도 파인만이 2000년대 나노과학기술의 눈부신 발전상황을 예견하는 것이다. 당시에는 SPM조차 발명되기도 전이었으니, 그의 과학자로서의 선견지명이 놀랍다고 할 수 있다. 이 실험에서는 물을 좋아하는 성질을 가진 물질이 잉크로 사용됐고 전체 문장의 크기는 기존의 프린터로 찍을 수 있는 점 하나보다 작다.
보통 AFM 탐침은 STM 탐침보다 크기 때문에, 이 기술의 해상도는 현재 10nm 정도로, STM을 이용한 원자단위 리소그래피보다 떨어진다. 하지만 모든 공정을 진공장비 없이 공기 중에서 할 수 있기에 비용이 싸고, 상대적으로 넓은 영역을 빠르게 처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사용된 잉크물질들은 후에 반도체공정에 쓰일 수도 있다. 한가지 특기할만한 점은 나노펜 기술이 DNA 같은 생화학 물질을 위한 리소그래피로 쓰일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 생명공학의 눈부신 발전에 힘입어, 사람들은 새로운 종류의 집적회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기존의 반도체칩에 생화학물질을 결합시켜 바이러스 경보기 같은 장치를 만들려는 노력도 진행되고 있다. 올 9월 네이처 바이오테크놀러지는 영국 캠브리지대 데이비드 클레너만 교수가 바이러스의 감염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진단장치를 개발했다는 흥미로운 소식을 전했다. 아마도 멀지 않은 장래에 집집마다 화재경보기와 함께 감기 바이러스 경보기가 쓰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러한 응용분야를 위해서는 생화학물질을 다룰 수 있는 나노펜 같은 기술이 필요할지 모른다.
이러한 다양한 연구 개발에도 불구하고, SPM을 이용한 리소그래피의 가장 큰 약점은 느린 속도에 있다. 작은 탐침 하나로 넓은 영역을 처리하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많이 걸린다. 가장 간단한 해결방법은 여러개의 탐침을 동시에 사용하는 것이다. 실제로 여러 연구소에서 이 분야에 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비록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다양한 종류의 SPM을 이용한 리소그래피 기술들이 개발돼 다양한 응용분야에 쓰이고 있다. 특히 다른 어떤 기술도 따라올수 없는 고해상도와 다른 리소그래피에 비해 값싼 시설 비용 때문에 SPM을 이용한 리소그래피는 앞으로도 활발히 연구가 진행되리라고 생각된다. 비록 대량생산에 이용되려면 아직 속도를 비롯한 몇가지 문제점을 해결해야 하지만, 그 이전이라도 나노펜처럼, 소규모 시제품 개발용으로는 머지 않은 장래에 상용화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