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물이 한나라의 흥망성쇠를 좌우한다는 말이 내려온다. 그런데 이 말은 현재에도 적용돼 유엔은 21세기가 물 분쟁 시대가 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이렇게 중요한 물을 깨끗하게 관리하기 위해 10여년 넘게 매달려온 과학자가 있다. 석유나 다이아몬드보다 물을 더 소중히 여기는 환경공학자 박종문 교수를 만나보자.
기원전 6세기 경 만물의 근원을 물로 파악한 철학자 탈레스의 논의는 올해 들어 더욱 사람들의 가슴에 다가간 듯하다. 생명의 근원이라고 불리는 물의 중요성이 구체적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물의 해’인 올해 극심한 봄 가뭄으로 전국이 몸살을 앓으면서 금수강산과 더불어 풍부하고 깨끗한 물이 자랑거리였던 우리나라는 ‘물부족 국가’의 신세를 절감하게 됐다. 그로부터 매스컴은 연일 1인당 하루 물 사용량이 3백88L로 일본, 영국, 프랑스에 비해 과소비되고 있으며, 공급 중심의 물관리 정책이 문제라고 비판했다. 여기에 바이러스가 검출된 수돗물은 사람들을 더욱 불안하게 했다. 또 올봄에는 레바논이 이스라엘의 갈릴리 호수로 들어가는 하츠바니강의 일부를 끌어들여 펌프공사를 시작하자 곧 중동지역에는 전쟁의 조짐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 밖에도 현재 지구촌 인구의 절반 가량이 물부족과 수질오염 문제에 시달리고 있고, 물이 없거나 오염된 물 때문에 매일 5천명의 어린이가 숨진다는 믿기 어려운 유엔의 보고서를 보면 21세기가 물 분쟁의 시대가 될 것이라는 예측이 억측이 아님을 느낄 수 있다.
아랫물이 맑아야 윗물이 맑다
예로부터 치수(治水)가 국가의 중요한 정책이었듯 이것은 현재에도 변함이 없다. 이러한 물관리는 수량 관리와 수질 관리로 구분되는데, 이 중 수질 관리의 중요성에 목청을 높이며 “아랫물이 맑아야 윗물이 맑다”고 주장하는 과학자가 있다. 바로 10여년 넘게 폐수 처리에 매달려온 포항공대 박종문 교수(43)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말은 이제 옛말이다. 만약 매일 엄청나게 쏟아지는 하수를 처리하지 않는다고 가정해보자. 아마도 모든 종류의 전염병이 창궐하고 사람들은 생존의 기반을 잃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하루 약 2천만t의 오폐수가 발생하고 있는데 이 중 생활하수가 약 78%로 가장 많고 산업폐수는 21%, 축산폐수는 1%를 차지한다. 이러한 하수는 여러 단계의 정화과정을 거쳐 다시 우리에게 상수로 돌아온다. 즉 우리가 버린 물을 다시 먹는 셈이다. 박교수가 아랫물 관리의 중요성을 지적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폐수에서 생활하수의 비율이 높다는 것은 우리가 많은 양의 물을 사용하고 버린다는 이야기이다. 하수에는 유기물질이 매우 많은데 처리가 제대로 안될 경우 이런 유기물질을 먹고사는 미생물들이 득세해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이러한 미생물들은 유기물질을 분해하면서 많은 양의 산소를 소비하므로 수중의 용존산소 농도를 떨어뜨리고 심할 경우 물이 썩게 만든다. 그러나 이러한 유기물질만을 제거했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식물과 같이 일부 미생물은 유기물질이 없어도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고정시켜서(탄소동화작용) 자랄 수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조류(algae)다.
이러한 조류들은 수중의 질소와 인의 농도가 높을 경우 활발하게 자라면서 마실 물을 만드는데 문제를 일으킨다. 하수 중의 유기물질을 완전히 제거했다고 해도 질소와 인 성분이 많이 남아있을 경우 조류가 곧 번성한다. 그런데 탄소동화작용을 위해 햇빛을 필요로 하는 조류는 물의 표면을 장악한다. 그렇게 되면 물 속으로 햇빛이 투과하지 못해 물 속에 산소를 공급하는 수생식물(예를 들어 수초)을 죽게 만든다. 그러면 물 속의 산소가 고갈되면서 물은 순식간에 썩어버린다. 그리고 이런 조류들은 독을 내뿜기도 하고 냄새가 고약한 물질을 내놓아 물에서 냄새가 나도록 한다. 즉 먹는 물로서의 가치를 상실하도록 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최근의 오수와 폐수 처리에서는 유기물질뿐 아니라 질소와 인을 제거하는 것이 강조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조류에게도 약점은 있다. 사람이 밥 외에 고기와 야채 같은 반찬을 먹어야 살 수 있듯이 조류에게는 이산화탄소 외에도 질소와 인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일부 조류는 질소를 공기로부터 고정할 수도 있으므로 조류의 생장을 저지하는데 중요한 것은 인이다. 이 점에 착안해 박교수는 하수에 포함된 인을 제거하는 방법을 찾게 됐고 이를 위해 미생물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폐수 처리와의 인연
사실 박교수의 전공은 식물조직 배양이다. 고추의 세포를 키워 이로부터 매운 맛 성분을 얻어 식품이나 파스와 같은 약품에 쓰이도록 했고, 충치를 예방하는 식물의 뿌리 조직을 대량으로 배양해 치약 성분을 만들기도 했다. 이렇게 세포나 조직을 대량으로 배양하기 위해서는 반응기(reactor)를 설계하고 유지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 작업이다. 세포나 조직이 잘 자랄수 있도록 온도, pH, 산소, 영양분을 잘 맞춰줘야 한다는 말이다. 하수처리에서도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는 하수가 통과하는 반응기 속의 미생물이 잘 활동할 수 있도록 일정한 상태를 유지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박교수의 초기 연구경험은 하수에 포함된 인을 제거하도록 하는데 기초 공사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즉 조류의 득세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해 인을 먹어치우는 미생물이 자랄 수 있는 반응기를 설계해 하수를 처리하도록 한 것이다. 이로부터 하수에 포함된 인은 제거되고 인을 과량으로 함유한 미생물은 따로 모아 비료로 만들면서 하수처리 중 큰 과정이 해결됐다.
현재 박교수는 미생물이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 인을 제거하는지 밝히려고 한다. 왜냐하면 아직까지는 어떤 미생물이 어떤 반응을 해서 인이 제거되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박교수는 “최근에 인을 먹는 미생물을 찾아냈어요. 그리고 그 미생물 사진까지 찍었어요.
이제 그 놈만 따로 키울 수 있으면 아주 좋겠는데 그게 잘 안되요”라면서 못내 아쉬움을 감추지 못한다. 하지만 “참 재미있는 문제 같아요. 이것이 해결되면 정말 큰 문제가 풀리는 거예요”라며 어린 아이와 같은 미소를 짓는다.
박교수가 하수 처리와 관련된 환경공학에 매달리게 된 것은 포항공대로 부임한 인연 때문이다. 1989년 포항공대로 오면서 포항제철의 코크스 공장에서 나오는 폐수를 생물학적 방법을 이용해 처리하면서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반응기를 실험실에서 설계하고 컴퓨터를 이용한 시뮬레이션 작업을 통해 문제점을 보완하고 실제로 작은 규모로 만들어 반응기를 동작시키는 지난한 작업이 이뤄졌다. 여기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다. 실제로 폐수처리 현장에서 사용되는 90t 규모의 반응기에서는 실험실에서 작게 만들어본 반응기와는 또다른 문제점이 드러났다. 이런 과정을 거쳐 실제로 폐수가 완전히 처리되는 시설이 동작하는데 걸린 시간이 바로 5년여의 세월이었다.
연날리기에서 얻은 힌트
박교수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포항제철 폐수 처리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생활하수 처리에서 골칫덩이 취급을 받던 하수 속의 질소와 인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실질적인 일도 중요하지만 학문적인 연구를 해야겠다고 느낀 것이 솔직한 이유라고 했다. 이렇게 새로운 문제를 찾는데 주저하지 않는 것은 그의 장점이기도 하다. 이것은 지도교수였던 최차용 교수(서울대 응용화학부)가 “박종문 교수는 늘 열심히 하면서도 새로운 도전을 하는데 주저하지 않는 적극적인 사람이예요”라고 말한 것에서도 드러난다.
그러고 보면 박교수가 자신의 관심거리를 찾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은 셈이다. 그리고 재미있는 문제에 매달려온 것이 벌써 10년이 지났다. 안될 것 같은 일에 매달리지 않는다지만 가능성 있는 일을 보면 누구보다도 강한 집착력을 보이는 것이 그의 특징이다. 이 점은 그가 지도하고 있는 대학원생들도 모두 인정하는 부분이다. 박교수는 심지어 꿈속에서 문제를 해결한 적도 있다고 했다. 박사학위 논문을 위한 연구를 할 때는 연날리는 모습을 보고 반응기 속에 식물세포를 담고 있는 플라스크를 고정시킬 수 있는 방법을 떠올려 큰 고비를 넘긴 적도 있다.
이에 대해 박교수는 “번득이는 아이디어가 아무렇게나 나오는 것은 아니예요.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어야 해요.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아이디어가 나오는 것은 아니거든요”라며 주변에서 보여지는 사소한 움직임, 현상 하나도 자신의 연구와 관련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재미있으면 열심히 하게 되잖아요. 재미없는 걸 어떻게 열심히 할 수 있겠어요?”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면서 올봄에 과학고등학교 학생 중 한명이 환경호르몬과 관련한 실험을 디자인하는 것에 관해 이메일을 통해 질문했다며, 요즘 학생들은 자신이 관심있는 부분을 명확히 표현하고 다양한 방법을 고안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적극적인 태도를 보인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포기를 잘 하는 이유
박교수는 고등학교때 대부분의 친구들이 이과를 선택해 자신도 이과로 결정했고, 또 대부분이 공대를 가길래 자신도 공대를 지원했다며 “친구따라 강남간거죠”라며 웃어버린다. 그러면서 자신은 대학교 4학년까지 구체적으로 무엇에 흥미가 있는지를 잘 몰랐다고 고백했다. 그런데 “고등학교 생물선생님이신 정완호(교원대 총장) 선생님이 상당히 잘 가르쳐주셨어요. 제 생각엔 무척 어렵게 가르쳐주신 편이었는데 상당히 깊이가 있었던 것 같아요”라며 어렸을 때 구체적으로 뭔가 되겠다는 꿈은 없었지만 고등학교 생물선생님 때문에 생물을 좋아하게 돼 대학을 이공계열로 진학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대학교때 수강한 생물학은 기대한 만큼이 아니어서 실망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대학교 4학년때 신임 교수였던 최차용 교수(서울대 응용화학부)가 생물공학에 관심있는 학생들에게 연구를 같이 하자고 제안했다. “좋아하던 생물과 관련된다는 것도 있었고 다른 강의와 달리 최교수님의 강의에서는 열정을 느낄 수가 있었어요. 그래서 이쪽을 선택하게 됐죠”라며 대학교 당시 얼마 안되는 월급을 쪼개서 시약을 사주는 최차용 교수를 얼마나 존경했는지 자랑하듯 이야기했다. 그때부터 박교수는 고기가 물을 만난 듯 자신이 재미있어 하는 일에 몰두해 왔다.
물론 힘든 일도 많다고 했다. 영국에서 공부할 때 실험이 안돼 원형탈모증까지 생긴 적도 있다. 요즘에도 하루에 보통 네다섯 시간만 자면서도 늘 시간에 쫓기는 신세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 대해 “제가 낙천적이어서 포기를 잘해요”라고 평하며 “가능성이 있는지의 여부에 관한 결정을 5분안에 내려요. 물론 여기에는 그동안 쌓은 경험이 바탕이 되죠. 어떤 학생들은 제가 해보지도 않은 실험에 대해 즉각 가능성 여부를 말하는 것을 듣고는 미심쩍은 눈빛으로 쳐다보기도 해요”라며 웃는다. 포기를 잘한다는 것이 결국 판단이 빠르며 이것은 오랜 경험에서 비롯됐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에겐 풀고 싶은 재미있는 문제들이 많기 때문에 즐겁다고 했다. 사실 제자들도 지도교수인 박교수가 너무 바쁘다는 것을 불만으로 토로하지만 이해하기 때문에 목소리를 높일 수 없다고 했다. 제자인 이민우 박사도 “과제가 많고 지도학생도 많기 때문에 세세히 지도해주시기는 어렵지만 제자들에 대해서는 끝까지 챙겨주시는 의리파 교수님이세요”라며 학생들의 형편을 사려깊게 돌봐준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철저히 책임을 지워주세요”라며 자신이 맡은 분야에 소신을 갖고 연구하도록 지도한다고 했다. 박교수도 “연구 진행 상황에 제가 시시콜콜히 간섭하면 학생들은 배울게 적어져요. 물론 큰 문제가 생겼을 때는 서로 고민해보는 것이 필요하지만 우선 자신의 프로젝트에 대해선 저보다 담당하는 학생이 더 잘 알고 있어야 해요”라며 그의 지도 철학을 폈다.
‘물’을 ‘물’로 보지 않는다?
그는 요즘 동분서주하고 있다. 바로 실험실 벤처 창업 기업이 개발한 소프트웨어를 실용화시키기 위해서다. 환경(environment)을 디자인(design)한다는 의미를 가진 벤처 기업 엔비자인(envisign)이 개발한 것은 바로 하수 처리 공정을 진단, 평가하고 문제점을 제시해주는 소프트웨어. 작년 6월에 시작했으니 이제 겨우 1년 남짓된 벤처지만 소프트웨어만큼은 자신있다고 말한다.
“하수처리가 제대로 되고 있는지를 알아보려고 많은 전문 인력이 현장에 투입되고 있어요. 그런데 하수처리에 문제가 생겼을 때 어디가 그 근원인지를 알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예요. 하지만 엔비자인이 개발한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면 하수처리 과정에서 발생하는 기본 데이터(부유물질농도, pH, 용존산소농도 등)만 있으면 하수처리가 제대로 되고 있는지는 물론이고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도 드러나죠”라며 그동안 블랙박스처럼 여겨졌던 하수처리의 공정이 훤히 드러나게 됐다고 자랑을 늘어놓는다. 물론 외국에도 이와 비슷한 프로그램은 이미 개발돼 있다. 하지만 사용방법이 너무 어려워 사용자들에겐 그림의 떡과 같은 존재다. 그에 비하면 엔비자인의 소프트웨어는 사용하기 쉽고 결과가 신뢰성이 높아 실용화 가능성이 높다. 박교수가 자신있게 엔비자인의 소프트웨어를 선전하는 이유다. 그리고 박교수는 학생들의 노력이 결실을 맺도록 해주고 싶은 마음도 크다. 현재 인터넷에 올려진 소프트웨어로 하수처리 공정이 테스트되고 있다. 10여년 이상 폐수처리에 매달린 그의 열정과 제자들의 노력이 시험대에 오른 것이다.
“물로 보지마”라는 우스개 이야기를 보면 물의 존재는 미약하기 그지없다. 그렇듯 많은 사람들이 ‘물’을 그야말로 ‘물’로만 보지만 박교수에게 물은 석유나 다이아몬드보다 더 소중한 자원이다. 그러기에 그는 자신의 일을 사랑한다. 아랫물을 맑게 함으로써 윗물을 맑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 흑연으로 다이아몬드를 만드는 기쁨에 비할 수 없을 만큼 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