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이라는 한 우물을 파는 사람들의 모습은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이는 경우가 많다.또 당시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던 과학자라 하더라도,지금 우리의 상식을 벗어난 사람도 많다.현재 과학문명을 이룩하기까지 노력한 지난 시대의 엽기과학자들을 만나보자.
에라토스테네스(기원전 276년경-194년경)는 처음으로 지구의 둘레를 계산해 유명한 그리스의 천문학자다. 그는 이 연구를 위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시에네라는 도시에서 하지날 정오의 태양 고도를 측정했다. 그런데 두 도시의 고도 차이를 이용해 지구 둘레를 계산하기 위해서는 두 도시 사이의 거리가 필요하다. 결국 에라토스테네스는 자신의 노예에게 몇발자국인지를 세도록 시켰다. 그의 발상도 엽기적이지만, 8백km나 떨어진 거리를 걸으면서 발자국을 정확히 센 노예도 보통은 아니다.
우주가 불·물·흙·공기로 이뤄져 있다는 4원소설을 주장한 그리스의 엠페도클레스(기원전 490년경-430년경). 그는 불을 연구하기 위해 시칠리아섬에 에트나 화산을 찾아갔다. 그런데 화산을 관찰하던 엠페도클레스는 돌연 분화구 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 이유에 대해 다양한 설이 존재하지만, 혹시 그는 분화구 속을 떨어지면서 무엇을 관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자연과학이 발달한 그리스 시대에 비해 중세는 과학 분야의 암흑기였다. 이 시기에는 과학을 연구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으며, 한편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연금술에 매달렸다. 연금술은 납처럼 값싼 금속을 갖고 금을 만들겠다는 목적을 가진 분야다.
아랍의 자비르 이븐 하이얀(721년경-815년경)은 ‘아랍 화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유명한 연금술사다. 그는 무려 2천권 이상 되는 책의 저자로 알려져 있는데, 정말 이 책들을 그가 모두 쓴 것이라면, 그는 엽기적인 저술가로 기네스북에 오를 만하다. 책의 진위는 어찌됐건 자비르의 가장 위대한 발견은 조금 비위가 상한다. 소변을 가열하면서 관찰하다가 암모니아를 발견한 것이다.
1903년 라이트 형제가 최초의 비행을 성공하기 무려 8백년 전에 비행을 꿈꾸던 선구자가 있었으니, 그는 11세기 영국 윌트셔 대수도원의 수도사였던 에일머다. 에일머는 하늘을 날기 위해 새의 깃털로 된 날개를 만들었다. 그리고 수도원의 높은 탑에서 비행을 시도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고 땅과 정면으로 충돌해 두다리가 모두 부러져버렸다. 너무 무모한 시도여서 엽기적이지만, 사실 인간이 하늘을 나는 꿈을 실현하기 전까지 용감한 사람들의 희생은 계속 됐다.
뉴턴, 나에게 함부로 질문하지 마라
덴마크의 티코 브라헤(1546-1601)는 방대한 천체 관측자료를 남겨 유명한 천문학자다. 그의 자료들은 제자이자 조수였던 케플러에게 넘겨졌고, 케플러는 후에 뉴턴에게 영향을 준다. 그런데 브라헤는 한 귀족과 칼싸움을 하다가 코를 베어 평생 가짜코를 매달고 다녔다고 하는데, 싸움의 원인이 더욱 가관이다. 한 수학문제에 대해 서로 자신이 구한 답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브라헤의 엽기적인 고집 덕분인지, 그는 중세 우주관을 무너뜨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영국의 유명한 정치가이자 철학자였던 프란시스 베이컨(1561-1626)은 자연을 이해하는데 경험과 실험을 강조해 과학발전에 큰 도움을 줬다. 그런데 이 위대한 정치가의 최후는 정말 엽기적이다. 한겨울날 눈을 이용해 고기를 보존할 수 있는지가 갑자기 궁금해진 베이컨. 그는 추운 눈보라 속에서 암탉 한마리를 묻어두고 밤새 떨며 관찰했다. 베이컨이 어떤 결과를 상상했는지는 모르지만, 추위는 그의 생명을 보존해주지는 않았다.
아이작 뉴턴(1642-1727)은 더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유명한 영국의 물리학자 겸 수학자다. 근엄한 얼굴 표정을 지닌 이 과학자도 엽기과학자 대열에서 빠질 수가 없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 ‘프란키피아’는 도무지 알기 어려운 공식들이 나열돼 있다. 당시 과학자 중에서도 이 책을 이해하는 사람은 정말 손에 꼽기도 어려웠다. 그 이유에 대해 뉴턴은 자신의 이론을 잘 모르는 사람들 질문을 받는게 귀찮아 일부러 더 어렵게 썼다고 한다.
프랑스의 장 안토니 놀레(1700-1770)는 삼투현상을 처음으로 발견한 화학자다. 그는 전기분야에도 큰 관심을 보였는데, 전기를 모으는데 사용되는 ‘라이덴병’(오늘날의 충전지)은 그가 명명한 용어다. 수도원장이기도 했던 놀레의 실험은 엽기적으로 잔인했는데, 한 예로 프랑스 왕과 신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1백80명의 근위병들이 서로 손을 잡고 원을 만들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병사 두명에게 충전된 라이덴병을 잡게 했다. 당연히 모든 병사는 전기 때문에 심한 쇼크를 받고 하나같이 하늘로 펄쩍 뛰어올랐다. 놀레가 이 실험 결과에 만족했음은 물론이다.
미국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미국 헌법의 기초를 닦은 사람 중 한명인 벤자민 프랭클린(1706-1790). 그는 번개를 연구하고 피뢰침을 발명해 유명한 과학자이기도 하다. 그런데 번개의 성질을 밝히기 위한 그의 실험은 엽기의 한계를 보여주는 듯하다. 하늘의 번개를 끌어들이기 위해 철사로 만든 연을 들고 손에 번개가 떨어지기를 기다린 것이다. 결국 그는 실험에 성공해 번개가 전기와 같은 성질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그런데 프랭클린은 천운을 지녔던 과학자니 괜히 흉내내지 말 것. 사실 이런 실험에서 살아날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
캐번디시, 연구는 나 혼자만 한다
헨리 캐번디시(1731-1810)는 영국의 물리학자 겸 화학자로 공기의 조성을 밝히고, 수소를 발견했으며, 물의 조성과 물질의 비열, 그리고 전기의 다양한 특성도 발견했다. 다양한 업적을 남긴 이 과학자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캐번디시는 모든 학식 있는 사람 중 가장 부자이며, 모든 부자들 중 가장 학식 있는 사람이라고 평가받기도 한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저택에 틀어박혀 연구에만 몰두했다. 거의 말도 하지 않았는데, 캐번디시는 80년을 살았던 그 누구보다도 말을 적게 했을 것이라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 여성 혐오증이 대단해 평생 독신으로 살았는데, 하녀들에게 자신의 눈에 절대 띄지 않도록 했으며, 일을 시킬 때도 일일이 편지를 썼다고 한다.
캐번디시는 연구에서도 엽기를 보인다. 그는 연구가 성공해 논문을 쓰고도 발표하지 않고 자신이 보관하기 일쑤였다. 때로는 출판하지도 않은 자신의 연구 결과를 다른 논문에서 인용해 동료과학자들을 당황시키기도 했다. 그의 논문 3/4이 사후에 발견돼 놀라움을 주었다. 사실 캐번디시는 쿨롱의 법칙과 옴의 법칙도 훨씬 먼저 발견했지만, 그의 엽기적인 성격 덕에 명성을 얻는데는 실패했다.
스웨덴의 카를 셀례(1742-1786)는 가난과 빈약한 실험장치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투지와 노력으로 성공한 화학자다. 산소를 발견한 업적은 억울하게 프리스틀리에게 빼앗겼지만, 염소의 발견 등 여러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셸레는 꼼꼼한 성격 탓에 화학물질을 직접 맛을 보고 확인해야 만족했다. 비산, 염화제이수은, 시안화수소와 같은 독극물까지 직접 맛을 보는 엽기적인 행동을 했으니, 한창 나이에 세상을 등질 수밖에 없었다.
대수학 분야 형성에 기여한 프랑스의 수학자 에바리스트 갈루아(1811-1832). 갈루아는 한 여인을 둘러싼 말다툼 때문에 결투를 하다가 20살의 나이에 목숨을 잃고 만다. 이미 결투하기 전 죽음을 예측했던 이 엽기적인 천재 수학자는 자신의 생애 마지막 몇시간 동안 그의 이론을 쓰기 바빴다. 상당한 악필로 산만하게 적은 이 메모가 대수함수론을 발전시키는 시작점이 됐지만, 결투 준비를 하던가 도망가는게 그에게는 더 낫지 않았을까.
독일의 로베르트 분젠(1811-1899)은 분광분석법의 개척자이며 2개의 알칼리금속(세슘과 루비듐)을 발견해 유명한 화학자다. 그의 연구에 대한 열정은 엽기적이기까지 하다. 독일 하이델베르크대 교수였던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대학 실험실에서 살다시피 했다. 실험실 폭발사고로 한쪽 눈을 잃으면서도, 비소중독으로 생명의 고비를 겨우 넘기면서도 말이다. 그는 유기화학분야에서도 업적을 많이 남겼는데, 그가 연구하던 화합물인 카코딜(cacodyl)은 냄새가 상당히 지독하다. 참기 어려운 고약한 냄새를 따라가면 바로 분젠이 서있었다.
오스트리아의 수도사 그레고르 멘델(1822-1884)은 수도원의 작은 정원에서 완두콩 실험을 시작했다. 그런데 실험 과정은 정말 엽기적이다. 무려 2만8천 그루의 완두콩을 기르면서, 그 많은 식물의 키와 꽃의 색깔, 그리고 열매인 완두콩들을 특징에 따라 분류해 숫자를 세고 있었으니. 그런데 밤낮으로 땀흘려 만든 그의 연구결과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 현재 멘델은 유전학의 아버지로 추앙되고 있는데, 엽기적인 땀방울들이 빛을 내고 있는 셈이다.
퀴리, 방사능 물질을 갖고 다니다
토마스 에디슨(1847-1931)은 발명왕이란 영예를 간직하고 있는 미국의 과학자다. 무려 1천93개의 특허를 얻어 세계기록을 갖고 있는데, 그의 발명품 중에 사형집행에 사용되는 ‘전기의자’도 포함돼 있다. 더욱이 자신이 못마땅한 상대방을 공격하기 위해 전기의자를 사형집행에 사용하도록까지 노력했다. 에디슨은 자신의 사업을 위해 교류가 직류보다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했다. 사람들을 모아놓고 개와 고양이를 교류 전류로 태워죽이는 엽기적인 실험을 반복했는데, 이 때문에 근처의 개와 고양이의 숫자가 1/10로 줄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노벨상을 두번씩이나 받은 마리 퀴리(1867-1934)는 퀴리 부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여성 과학자다. 퀴리는 방사능에 관한 연구로 노벨 물리학상을, 그리고 방사능을 방출하는 순수한 라듐을 추출한 공로로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그런데 퀴리는 그 위험한 방사능 물질을 아무런 보호장구도 하지 않고 연구했다. 심지어 방사능 물질을 주머니에 넣어 갖고 다니면서 연구했다는 엽기적인 일화도 전해진다.
이 때문에 퀴리는 평생 동안 건강이 매우 나빴다. 항상 피로에 시달렸고, 관절과 근육의 통증을 느꼈으며, 두번째 아이는 출생후 바로 죽고 말았다. 그런데도 퀴리는 자신의 건강이 단지 과로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퀴리가 연구하고 있을 때 방사능의 위험성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지만, 퀴리는 말년에 들어서야 방사능의 위험성을 인정했다. 사실 퀴리가 그토록 오랫동안 실험을 계속했다는 사실 자체가 엽기적이다. 그녀와 일했던 많은 사람들은 그녀보다 훨씬 일찍 사망했다.
쿠르트 괴델(1906-1978)은 ‘괴델의 정리’와 ‘불완전성 정리’를 발표해 유명한 오스트리아의 수학자다. 불완전성 정리는 힐베르트나 러셀과 같은 수학자들이 공리적인 방법으로 수학의 체계를 세우려는 노력을 좌절시킨 정리로 유명하다. 세계적인 수학자로 오스트리아 빈대 교수였던 그가 나치 때문에 미국으로 망명한 후 프린스턴대에서 정교수가 되기까지 무려 13년이나 걸렸다. 그 이유는 순전히 그의 엽기적인 행동 때문이었다.
괴델을 둘러싼 해괴한 이야기가 많이 전해지고 있다. 오스트리아가 독일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들춘 미국인에게 미국에서도 독재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수학적으로 완벽히 증명하기도 했다. 그의 친구였던 아인슈타인도 “괴델이 허점을 발견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사실”이라고 인정했을 정도다. 이 천재 수학자는 음식을 먹으면 안될 이유를 발견했는지 결국 음식을 먹지 않아서 굶어죽었다.
리처드 파인만(1918-1988)은 양자전기역학 이론을 재정립하는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미국의 물리학자다. 2차대전 중에는 원자폭탄 제조를 위한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는데, 핵폭탄 제조법에 대한 기밀문서가 담긴 금고를 불과 10분만에 열어버린 금고털이 전문가이기도 하다. 원자폭탄 실험의 성공을 축하하면서 봉고라는 악기를 두드리고, 히로시마가 원자폭탄으로 아수라장이 됐을 때 뉴욕의 레스토랑에서 핵폭탄의 폭파반경을 계산하며 행복해한 엽기적인 과학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