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스틱이 강철만큼 강하고 5백℃에 견딘다? 폴리머의 가장 큰 장점은 가볍지만 강하다는것이다. 심지어 엔지니어링 플라스틱의 경우 강철만큼 강해지고 5백℃에 견딜 수 있다. 최근 자동차, 항공기, 우주왕복선에 금속재료 대신 고성능 폴리머를 사용한다. 가벼워질 뿐만 아니라 상당량의 연료를 절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회용 라이터, 쇼핑백, 음료수 용기, 컴퓨터, 텔레비전, 그리고 자동차.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플라스틱’이 사용된다는 점이다. 플라스틱은 다양한 형태로 우리 일상생활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인류가 사용한 재료의 발달사 측면에서 보면, 현대는 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를 거쳐 고분자(플라스틱)시대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고분자 재료의 역사는 1백년도 안됐지만,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고분자 재료가 차지하는 비중이 다른 소재에 비해 월등히 크다.
플라스틱 제품은 고분자로부터 만들어진다. 물질의 성질을 나타내는 가장 작은 구성요소는 분자다. 고분자란 이런 작은 분자들이 수백에서 수백만개가 화학적으로 결합해 거대한 분자를 형성한 것이다. 영어로는 폴리머(polymer), 또는 거대분자(macromolecules)라고 불린다.
자연현상에서는 분자들이 서로 모여서 거대분자를 형성하기보다는 무질서하게 서로 흩어지려는 경향이 일반적인데, 고분자 재료의 합성과정은 이런 자연현상과 상반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1920년 독일의 과학자인 슈타우딩거(H. Staudinger)가 작은 분자들이 다수 결합해 고분자로 존재할 수 있다는 획기적인 이론을 제안했을 때, 당시의 저명한 과학자들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15년 후인 1935년 고분자에 관한 슈타우딩거의 이론이 공인됐고, 슈타우딩거는 1953년 영예의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고분자 재료가 일상생활에서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38년 미국 듀퐁사의 캐로더스(W. H. Carothers)가 실험실에서 최초로 합성한 고분자가 상업적으로 생산돼 시판되면서부터다. 이 합성고분자가 바로 당시의 상품명이기도 했던 ‘나일론’(NYLON)이다. 나일론의 개발은 의생활에 큰 혁명을 일으켰으며, 1960년대에는 ‘질기다’라는 말 대신에 ‘나일론 같다’는 말이 흔히 쓰일 정도로 고분자는 우리와 친숙해졌다.
현재 한국은 고분자 생산량이 2000년도에 약 1천만t으로 미국, 일본, 독일에 이어서 세계 4위를 차지했으며, 국민 1인당 1년 동안 소비하는 고분자는 1백kg 정도다. 즉 한국의 고분자산업은 반도체산업, 자동차산업과 더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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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분자 수백만개의 사슬구조
고분자 제품은 열이나 압력을 가해 다양한 형태로 쉽게 만들 수 있고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어 가격이 저렴하다. 뿐만 아니라 녹슬지 않고 전기가 통하지 않아(물론 전기가 통하는 고분자도 있다) 광범위한 분야에 사용된다. 하지만 무엇보다 고분자의 가장 큰 장점은 금속이나 유리에 비해 가볍다는 점이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은 1백10여 가지의 원소로 구성돼 있는데, 고분자는 주로 탄소, 수소, 산소와 같은 가벼운 원자로 이뤄지기 때문에 가볍다.
물론 고분자가 가볍기만 하다면 별로 쓸모가 없을 것이다. 아울러 고분자는 질기고 강한 특성을 갖는다. 왜 그럴까. 고분자를 형성하는 화학구조를 살펴보자. 고분자는 가벼운 원자로 구성된 작은 분자(단량체, monomer)가 기본단위가 된다. 이 작은 동일 분자가 수백에서 수백만개나 사슬처럼 길게 이어져 고분자를 형성한다. 이런 구조 때문에 고분자는 작은 분자보다 강도가 크고 열에도 강하다.
이것은 마치 밀가루 하나하나는 잘 부서지지만, 밀가루를 반죽해서 국수를 만들면 밀가루보다 질기고 강해지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 예를 들어보면 작은 분자인 프로필렌(CH3CH=CH2)은 액화석유가스로 쓰이는 기체지만, 수많은 프로필렌으로 합성된 폴리프로필렌(-(CH3CHCH2)n-)은 각종 파이프로 사용될 정도로 강해진다.
고분자 재료는 또한 세라믹과 같은 무기재료나 금속재료처럼 어떤 구조물의 재료로 쓰이기에 충분히 강하다. 화학결합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세라믹이나 금속이 각각의 원자가 응집된 형태인 반면, 고분자는 강한 이온결합이나 공유결합을 통해 긴 사슬로 연결돼 있다. 고분자는 이런 화학결합을 통해 서로 아주 단단하게 결합해 길게 이어지므로 강하고 질긴 성질을 나타낼 수 있다. 이 때문에 고분자는 극단적인 경우 강철만큼 강하게 만들 수도 있다. 물론 사용 목적이나 조건에 따라 고분자의 강도는 조절이 가능하다. 생활 전반에서 다양한 종류와 형태의 고분자 제품을 만날 수 있는 것도 이런 이유 탓이다.
고분자는 크게 천연 고분자(천연고무, 녹말, 단백질 등)와 합성 고분자로 나눠진다. 다시 합성 고분자는 쓰이는 용도에 따라 플라스틱(합성수지), 합성섬유, 합성고무로 나눌 수 있다. 이 중 플라스틱이 가장 많이 이용된다. 이런 이유로 고분자라는 말을 플라스틱이라는 말과 혼용해 사용하기도 한다.
끓는 물에도 견디는 플라스틱
일반적으로 ‘플라스틱은 열에 약하다’는 사실이 상식처럼 알려져 있다. 하지만 열에 강한 고분자(플라스틱)를 얼마든지 만들 수 있고 현재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물이 펄펄 끓는 온도에서 견딜 수 있는 특수고분자인 엔지니어링 플라스틱이다.
고분자는 크게 범용고분자와 특수고분자로 나눌 수 있다. 범용고분자는 사용할 수 있는 온도가 물의 끓는점인 1백℃ 미만인 고분자를 말하며, 우리가 흔히 ‘비닐’이라고 말하는 부류가 이에 속한다. 이에 반해 특수고분자, 다시 말하면 엔지니어링 플라스틱은 통상 1백℃ 이상의 열에도 견딜 수 있고, 강도가 강철에 버금갈 정도로 강한 고기능성 고분자 수지를 칭한다.
이들의 차이는 왜 생길까. 간단히 말하면 이것은 범용고분자와 특수고분자의 구조적 차이에서 온다. 범용고분자에는 사슬처럼 연결된 각 원소나 원자들이 나름대로 움직일 수 있는 여지가 있다. 비유하자면 이것은 마치 손에 손을 잡은 여러 사람이 파도타기 응원을 펼치는 상황과 비슷하다. 이 때문에 폴리에틸렌, 폴리프로필렌, PVC와 같은 범용고분자는 유연성을 가진다.
반면에 특수고분자의 구조는 이와는 다르다. 즉 특수고분자는 범용고분자 사슬 내에 있는 각 원소나 원자들을 잘 움직이지 못하도록 만든 것이다. 사슬 중간에 부피가 크면서도 잘 움직일 수 없는 분자를 끼워 넣거나, 사슬과 사슬 사이에 그물구조를 만들어 넣어 잘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 또는 원래 아무런 작용이 없는 사슬 사이에 전기적 인력을 발생시켜 움직임을 막을 수도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특수고분자는 범용고분자보다 훨씬 더 강하다.
특수고분자인 엔지니어링 플라스틱으로 쓰이는 대표적인 예로 폴리아미드(상품명은 나일론)의 경우를 살펴보자. 폴리아미드는 나일론 사슬 사이에 아미드라는 그룹을 결합시켜서 강도를 높인다. 이때 나일론 사슬 사이에는 수소결합이 들어가 전기적 인력이 발생하고 폴리아미드는 범용 고분자인 폴리프로필렌보다 더 강해진다.
특수고분자에는 일반 엔지니어링 플라스틱보다 한층 높은 1백50℃ 이상의 고온에서 장기적으로 사용이 가능한 것도 있다. 이를 슈퍼 엔지니어링 플라스틱이라고 한다. 슈퍼 엔지니어링 플라스틱은 제품의 소형화, 고성능화에 필수적인 소재다. 필름, 접착제, 성형품, 섬유 등 다양한 형태로 항공·우주, 전기·전자, 자동차, 정밀기계 등 광범위한 산업 분야에 사용된다.
자동차 금속재료 대체한다
슈퍼 엔지니어링 플라스틱은 1백50℃ 이상의 높은 온도에서도 사용이 가능하므로 내열성 고분자라고도 불린다. 이처럼 슈퍼 엔지니어링 플라스틱이 높은 온도에서도 잘 견딜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전체 화학구조에 6각형의 안정한 구조를 갖는 탓에 열에 매우 강한 벤젠 고리가 대부분 들어 있기 때문이다.
고분자가 가장 널리 사용되며, 사용량이 계속 증가되는 분야가 자동차다. 최근 생활수준이 향상되고 자동차 시장이 확대됨과 동시에 소비자들의 요구 수준은 하루가 다르게 높아지고 있다. 이에 따라 각 자동차 업체에서는 외장·내장재료의 고급화, 각종 부품의 고성능화, 다양한 디자인, 그리고 대량 생산을 통한 경쟁력 강화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바로 이런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자동차용 고분자 소재다.
특히 자동차 부품을 금속재료에서 고분자로 대체해야 할 필요성은 자동차를 가볍게 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크게 부각됐다. 고분자, 특히 엔지니어링 플라스틱의 가장 큰 장점은 가볍고 강하다는 것이다. 즉 폴리프로필렌 같은 고분자 재료는 기존의 대표적 재료인 철에 비해 무게가 1/8에 지나지 않고, 금속 중 가장 가벼워 자동차용 구조재료로 널리 사용되는 알루미늄에 비해도 1/3나 가볍다. 자동차 부품 가운데 많은 부분이 고분자로 바뀐다면 자동차가 가벼워질 것은 당연하다.
금속재료를 고분자로 대체해 자동차를 경량화해야 한다는 점은 1970년대 오일쇼크로 인해 본격적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즉 자동차가 가벼워야 기름을 적게 사용하기 때문이다. 198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환경보호에 대한 인식이 전세계적으로 확대되면서 대기오염의 주원인인 배기가스를 규제함에 따라 자동차의 경량화가 본격적으로 추진됐다.
자동차의 배기가스가 대기오염의 주범으로 지목되자 연소에 의한 대기오염을 줄일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으로 연비 규제를 강화하는 방법이 떠올랐다. 연비 향상을 위해 자동차 연료의 대체 연구, 전기자동차 개발 등 많은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으나, 현재로서는 자동차의 무게를 줄여서 연소 효율을 증가시키는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다. 따라서 가벼운 재료인 고분자를 사용하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 물론 이런 고분자 재료가 폐품이 돼 쓰레기로 버려질 때 잘 썩지 않기 때문에 환경오염을 일으킬 수 있다. 이를 해결하는 것은 아직까지 과제로 남아있다.
유럽의 대표적인 자동차회사인 BMW는 차 1대당 평균 1백49kg의 고분자 소재를 사용하고 있으며, 폭스바겐사 아우디 시리즈의 경우, 클러치와 가속장치 등의 기능 부품까지도 나일론 66(Nylon 66)으로 대체했다. 서유럽의 경우 자동차산업에 사용된 고분자 재료는 1994년 1백20만t이었으나, 연평균 7.3%의 수요가 증가해 2000년에는 1백70만t 이상 사용됐다.
미국의 경우 1975년 자동차 한대의 무게는 1천8백kg 이상이었으나 최근에는 1천2백kg으로 30% 이상 경량화됐는데, 이는 내·외장 재료뿐만 아니라 엔진주변부품, 구동부품 등과 같은 핵심부품에 이르기까지 가벼운 재료인 고분자 재료로 소재의 전환이 이뤄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엔진주변부품에 사용되는 고분자 재료는 3백℃ 정도를 견딜 수 있다.
박세리 골프채에 사용된 복합재료
고분자 소재의 강도를 한층 더 높이기 위해서는 다른 소재와 복합화한 재료가 사용되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고분자 복합재료다. 고분자 복합재료는 고분자에 유리섬유나 탄소섬유와 같이 더 강한 섬유를 보강해 넣어줌으로써 강도를 높인 것이다. 이것은 철근 콘크리트에 비유될 수 있는데 콘크리트에 철근을 넣어주면 일반 콘크리트보다 더 강해지는 것과 비슷하다.
복합재료는 무게에 비해 기계적 성질이 매우 우수한 재료로서 우주·항공 분야, 자동차 분야, 그리고 스포츠·레저 분야에 이르기까지 아주 넓은 범위에서 사용되고 있다. 특히 복합재료는 낚싯대, 테니스 라켓, 골프채 등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낚싯대에는 에폭시 고분자에 유리섬유로 보강한 복합재료가 사용되고, 테니스 라켓은 에폭시 고분자에 보강섬유로 탄소섬유가 들어간 복합재료로 만들어진다. 미국 LPGA에서 활약하는 박세리나 김미현이 휘두르는 골프채의 샤프트에도 종류에 따라 탄소섬유가 포함된 고분자 복합재료가 사용된다. 이것은 고분자 소재가 가볍고 반발력이 좋으므로 공이 멀리 나가며, 또한 타구시 손에 전해지는 충격을 흡수함으로써 몸에 무리를 주지 않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1960년대에 유리섬유와 탄소섬유가 상업화됨으로써 이를 이용한 고분자 복합재료의 개발이 활기를 띠었다. 또한 1960년대 들어서 추진된 아폴로 계획을 위시한 우주개발계획, 대륙간 탄도탄을 비롯한 각종 미사일의 개발, 군용 항공기의 고성능화, 그리고 인공위성의 개발 등에는 더욱 기능이 향상된 고분자 복합재료가 요구됐다.
비행기의 경량화에 대한 연구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고분자 복합재료를 사용해 동체와 날개 부분을 허니콤(honeycomb) 구조로 제작하는 것이다. 허니콤 구조는 벌집 모양으로 6각형 구조의 가운데가 비어있는 형태다. 6각형의 벌집구조는 자연에서 가장 안정한 구조로 알려져 있는데, 고분자 복합재료를 이용해 만든 벌집구조는 가볍고도 강한 특성을 가진다. 이로 인해 비행기 운항시 30% 이상의 연료를 절약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는 보잉767 초기모델부터 고분자 복합재료의 사용부분이 점차 증가돼, 보잉757 개량모델의 경우 전체 중량의 3%를 고분자 복합재료를 사용했다. 그 결과 거의 7백kg의 중량을 줄이는데 성공했다. 나아가 동체 전체를 고분자 복합재료만으로 제작한 비치크래프트 스타쉽(Beechcraft Starship)이라는 항공기를 선보였다. 미항공우주국(NASA)으로부터 품질인증을 받을 정도로 경량화된 복합재료 구조물인 이 비행기는 날개 무게가 기존 금속 재료의 60%로 감소됐다.
또한 국내 차세대 전투기 사업인 FX사업의 선정기종인 F-18기에도 고분자 복합재료가 전체의 약 30%나 사용됐다. 최근 한국항공우주연구원과 삼성항공의 공동 연구로 개발된 8인승 쌍발항공기에도 고분자 복합재료가 쓰였다.
특히 최근에는 아주 가벼우면서도, 강인하며 높은 온도에서 견딜 수 있는 재료가 요구되는 인공위성, 우주왕복선 등에도 고분자 복합재료가 활발하게 이용된다. 특히 우주왕복선 외곽을 감싸는 실리콘 타일 안쪽에는3백71℃까지 견딜 수 있는 복합재료가 들어가고, 접착제로 사용되는 복합재료는 놀랍게도 5백℃ 정도를 견딜 수 있다. 항공기나 우주왕복선에 사용되는 첨단 복합재료에는 고분자의 보강섬유로 탄소섬유나 보론섬유가 들어간다. 또한 미국과 프랑스에서는 1990년대에 들어와 대형건축구조물에 사용되는 건축프레임으로 복합재료를 사용하고 있다. 가벼우면서 강하고 녹이 슬지 않기 때문이다.
고분자 소재는 산업 전반에 걸쳐서 널리 사용된다. 특히 가벼우면서도 강하다는, 고분자의 가장 큰 장점을 활용해 각종 제품을 경량화하고 이로 인해 에너지를 절감할 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향후에도 새로운 고분자 소재에 대한 계속적인 연구 개발과 아울러 고분자는 우리의 일상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가장 중요한 재료로서 위치를 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