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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가두는 반복의 굴레 -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불길한 생각 떨치지 못하는 강박증

문단속을 했는지, 전등을 껐는지 아무리 확인해도 안심되지 않는다. 손은 몇번씩 반복해 씻어야 한다. 불합리한 줄 알면서도 같은 행동을 반복할 수 밖에 없는 정신 질환, 바로 강박증이다. 현대인은 누구나 한번쯤 강박적인 행동을 경험한다고 하는데….

운동선수들에겐 징크스라는 것이 있다. 시합 전엔 수염을 깎지 않는다거나 왼발부터 양말을 신어야 그날 경기가 잘 풀린다는 등 징크스의 종류도 다양하다. 무심결에 오른발부터 양말을 신기라도 하면 집을 나섰다가도 도로 들어가 양말을 벗고 왼발부터 다시 신는 사람도 있다.

어떤 야구선수는 아침에 아내가 설거지를 하다가 접시를 깨면 그날은 어김없이 홈런을 친다고 해서 아내가 일부러 접시를 떨어뜨리기도 한다는 얘기를 TV에서 들은 적이 있다. 운동선수 본인들도 징크스가 그저 ‘심리적 위안’일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경기에 대한 스트레스를 덜고 자신감을 얻기 위해 이런 행동을 반복적으로 하는 것이 아닐까.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에서 잭 니콜슨은 강박증 환자 멜빈 역할을 완벽히 소화해 1998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1백명 중 두세명 경험

운동선수가 아니더라도 특정 행동을 몇번씩 반복적으로 하지 않으면 참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외출하기 전에 가스 밸브는 잘 잠궜는지 전등은 잘 껐는지 몇번씩 확인해야 하거나, 화장실에서 손을 씻을 때 ‘비누로 3번 씻고 맑은물에 10번씩 헹군다’는 식의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못견디는 사람들이 있다. 또 경사진 길을 걷다가 ‘우리 아이가 이 길로 오다가 넘어져 다치지는 않을까’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면 하루종일 그 생각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엄마들도 있다.

이처럼 불합리한 줄 알면서도 특정 행동을 하려는 반복적인 욕구에 저항할 수 없을 때 이것을 ‘강박적 행동’이라고 부른다. 물론 운동선수들의 징크스나 엄마가 외출할 때 여러번 문단속에 신경 쓰는 것을 정신질환이라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증세가 지나쳐서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어떤 생각이나 행동을 반복적으로 수행해야 하며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더욱 불안해지는 노이로제 상태에 이르면, 이것은 ‘강박증’이라는 심각한 정신장애가 된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강박증은 매우 드문 병으로 여겨졌다. 정신과 병동에 입원한 사람들 1백명 가운데 강박증 환자는 한명 정도 있을까 말까 할 정도로 희귀한 질환이었다. 그러나 ‘정상인’을 상대로 한 최근 역학 조사에 따르면, 보통 사람 1백명 중 두세명 정도는 일생에 한번쯤 강박증을 경험한다는 보고가 있을 정도로 결코 드문 장애가 아니다.

강박증 환자의 전형적인 증상은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에서 잭 니콜슨이 열연한 소설가 멜빈 유달의 행동에서 찾을 수 있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는 미국 정신과에서 일반인을 상대로 한 대중 강연에서 ‘강박증 증세’의 예로 자주 보여줄 정도로 환자의 증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영화 속 주인공 멜빈은 길을 걸을 때 절대로 보도블록의 금을 밟지 않으며, 항상 같은 식당 같은 자리에서 같은 종업원에게 같은 음식을 주문한다. 전화를 받을 때는 헛기침으로 시작해야 하고, 어떤 행동이든지 5번씩 반복하는 습관이 있다. 물건은 항상 말끔히 정돈돼 있어야 하며, 세수 후에 쓴 수건도 흐트러짐 없이 제자리에 놓아야 한다. 더러움에 대한 공포가 심해서 다른 사람의 몸이 닿는 것을 일체 싫어하며, 장갑이나 비누는 한번 쓰고 버린다. 식당에서 식사를 할 때도 식당에 있는 식기를 쓰지 않고 자신이 가져온 일회용 수저와 접시를 쓸 정도다.

머리 빗는데 3시간

강박증 환자들이 가지는 강박적 행동 유형은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가장 일반적인 유형으로 반복 확인 유형이 있다. 앞서 설명했듯이 문단속은 잘 했는지, 전등은 잘 껐는지 반복적으로 확인하는 경우를 말한다. 수험생의 경우 시험 시간에 답안지에 답을 맞게 썼는지 자꾸 확인하게 된다. 심한 경우 1번 답을 제대로 썼는지 계속 확인하는 바람에 정작 풀어야할 문제를 못푸는 경우도 있다.

한편 더러움에 대한 지나친 두려움을 느끼는 유형이 있다. 흔히들 결벽증(강박적 청결)이라고 부르는 이 증상의 흔한 예가 바로 ‘과도한 손씻기’다. 손을 수십번씩 씻고도 여전히 깨끗하지 않다고 생각하며 이러한 생각 때문에 계속 씻지 않으면 불안해서 견딜 수 없게 된다. ‘난 1백번을 씻어야 안정이 된다’라는 식으로 횟수를 정해 놓고 씻는 사람도 있다. 심한 사람들은 버스나 택시를 탈 때 손수건을 대고 손잡이를 잡는다.

결벽증에 걸린 환자의 경우 손을 씻는데만도 몇시간씩 걸린다. 따라서 정상적인 출퇴근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직장생활이 어려워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경우가 많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에서 멜빈이 시간의 굴레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소설가’로 설정된 것도 이같은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가 만약 직장인이었다면 직장 동료들과 원만한 인간 관계를 맺기는 커녕 출근도 제시간에 못했을 것이다.

다음으로 강박적 사고를 하는 유형이 있다. 이 유형에 해당되는 환자들은 과거에 일어났던 괴로운 사건에 집착하거나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불길한 일을 미리 상상하며 괴로워하고 그 생각의 굴레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환자들은 ‘왜 해는 동쪽에서 뜰까’ 또는 ‘사람의 코는 왜 얼굴에 있을까’ 같은 문제를 -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이 나지 않을 걸 뻔히 알면서도 - 골똘히 생각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어떤 행동을 할 때 좌우대칭이나 완벽성에 지나치게 집착해서 아주 꾸물거리는 타입도 있다. 머리를 빗을 때 좌우대칭을 맞추기 위해 3시간 이상 소모한다거나 (실제로 이런 사람들이 있다!), 베개를 제자리에 놓고 자기 위해 베개 위치를 고치다가 밤새 잠 한숨 못자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된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어색한 키스

강박증에 대한 예제 화면으로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만큼 더 좋은 자료도 없지만, 약간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도 있다. 보통 강박증 환자들은 지나치게 신중한 탓에 쉽게 결정을 못 내리고 우유부단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어떤 일을 할 때 다른 사람들보다 능률적이지 못하고 생산성이 현저히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에서 소설가 멜빈은 62번째 소설을 탈고할 정도로 소설가로서 왕성한 활동을 보인다. 소설을 쓸 때도 주저함 없이 여성의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하며, 결정도 쉽게 내리는 편이다. 이것은 일반적인 강박증세와는 다소 맞지 않는 편이다.

강박증 환자에게서 종종 발견되는 감정 상태 중 하나로 ‘섹스에 대한 혐오감’이 있다. 이것은 때론 ‘의처증’이라는 편집증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영화 ‘적과의 동침’(Sleeping with the enemy, 1991)에 등장하는 남편이 대표적인 예다. 이 영화는 매맞는 아내 사라(줄리아 로버츠 분)가 의처증과 강박증에 사로잡힌 남편으로부터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이야기인데, 남편 마틴은 수건 한장이라도 비딱하게 놓인 날에는 날벼락이 떨어지는 심한 강박증 환자로 나온다.

얼마 전 개봉한 영화 ‘로망스’(Romance, 1999)에서도 남자 친구 폴은 마리에게 늘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섹스에 대한 강박증으로 인해 언제부터인가 섹스를 거부한다. 폴과의 진정한 인간적 교감을 갈구하던 마리는 결국 시내를 배회하다 술집에서 만난 남자 파올로와 관계를 갖게 되면서 성적 방황을 하게 된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에서도 멜빈은 동성애에 대해 심한 혐오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심지어 사랑하는 여인 캐롤과의 키스에서도 어색함을 감추지 못한다.

지나친 책임감 때문?
 

섹스에 대한 혐오감 때문에 생긴 강박증을 소재로 한 영화 '로망스'


그렇다면 강박증 환자들이 이렇게 강박적인 행동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문제에 대해 다양한 주장들이 제기되고 있는데, 그 중 몇가지만 알아보자.

첫번째 주장은 1960년대 미국의 심리학자 마우러 박사가 제기한 이론으로 ‘2단계 학습 이론’이다. ‘파블로프의 개 실험’(개에게 먹이를 주면서 종을 치면 나중에는 종소리만 들어도 개가 침을 흘리게 된다는 실험)으로 잘 알려진 고전적인 조건반사형성 외에 ‘조작적 조건형성’이 있다.

미국의 행동주의 심리학자 스키너는 비둘기를 상자 안에 가두어두고 흥미로운 실험을 했다. 어떤 비둘기는 부리를 치켜들고 천장을 쳐다보기도 하고 어떤 비둘기는 벽이나 바닥을 부리로 쪼기도 한다. 날개짓을 하며 부산을 떠는 놈들도 있다. 이때 한 방향의 벽을 골라 그 벽을 부리로 쫄 때마다 모이를 주는 것이다. 아무 것도 모르는 비둘기는 신나게 받아먹고 이리저리 움직이겠지만, 이러한 과정이 반복될수록 비둘기가 특정 벽을 쪼는 횟수는 점차 증가하게 된다. 이처럼 ‘모이’라는 강화 자극이 특정 표적행동(한쪽의 정해진 벽을 쪼는 것)을 강화하는 것을 조작적 조건형성이라고 부른다.

마우러는 강박증 역시 고전적 조건형성에 의해 공포반응이 획득되고 조작적 조건형성에 의해 공포반응이 지속되는 과정이라고 주장했다. 예를 들면 역겨우리만치 더러운 공중화장실에 들어갔다가 충격적이고 혐오스러운 경험을 하게 됐다고 치자. 그후로 당연히 공중화장실 사용을 꺼리게 되고, 점차 자극이 일반화되면서 모든 화장실을 꺼리게 되고 어쩔 수 없이 사용한 경우 과도한 손씻기로 이어진다. 여기까지가 화장실이라는 자극에 대한 공포반응이 형성되는 ‘고전적 조건형성’이라고 한다면, ‘과도한 손씻기가 더러움에 대한 불안감(혐오감)을 일시적으로나마 감소시켜주고 그로 인해 끔찍한 일을 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경험이 강화 자극이 돼 이러한 행동을 지속, 강화시켰다는 것이다(조작적 조건형성). 이 이론을 2단계 학습이론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 이론은 강박증의 발생 과정과 증상의 내용에 대해 포괄적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어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1980년대 들어 살코프스키스와 라크만은 인지행동적인 관점에서 강박증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독립적으로 시도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문득 불길한 생각이 드는 것은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인데, 강박증 환자들은 그것을 잘못 해석하고 평가하는 바람에 과도한 책임감을 느끼게 된다고 지적했다. 수십번씩 반복적으로 확인하는 강박증 환자에게 “무엇이 두려워서 그렇게 확인하는 거죠?”라고 물어보면 “확인을 안하면 실제로 나쁜 일이 일어날 것 같다”고 말한다.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나쁜 일이 일어날 것 같고, 그것을 예방하지 못하면 다 내 책임인 것 같다’는 강박장애 환자들의 ‘책임감에 대한 역기능적인 신념’이 강박증의 주된 요인이라는 것이다.

강박증 환자들은 그런 반복적인 행동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더욱 불안해지는 노이로제 증세를 동반한다. 이처럼 특정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것을 ‘사고 억제’라고 하는데, 어떤 생각을 억제하려고 노력할수록 오히려 더욱 집착하게 만드는 역효과를 만들어내게 된다는 연구보고가 있다.

1987년 웨그너와 그의 동료들은 사고억제에 관한 연구들의 효시가 된 실험을 했다. 실험자는 한 그룹의 피험자들에게 ‘흰곰에 관한 생각을 하지 말라’고 지시한 후 흰곰 생각이 날 때마다 벨을 울리라고 요구했다. 다른 그룹에게는 흰곰에 관한 생각을 하라고 요구했다. 실험 결과, 흰곰 생각을 억제한 피험자들이 처음부터 흰곰 생각을 하도록 요구된 피험자들보다 오히려 흰곰 생각을 더 많이 했다고 한다. 특정 생각을 의도적으로 하지 않으려는 시도가 ‘역효과’를 만들어내게 된 것이다.

최근의 여러 연구자들은 강박증이 생물학적 원인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도파민의 일종인 암페타민을 투여한 고양이에서 강박적으로 냄새를 맡는 행동이 관찰된다거나 도파민 촉진제를 투여한 쥐에게서 반복적인 행동이 나타난 연구 결과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애완 동물이 도움 줄 수도

강박증을 치료하는 길은 무엇일까.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에서 멜빈은 사이먼의 개 버델을 돌보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따뜻한 면을 스스로 발견하게 된다. 또 더러움에 대한 공포와 혐오 역시 개와 생활하면서 극복하게 된다. 좀 더럽게 살아도 별탈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처럼 과민한 반응을 조금씩 줄여나감으로써 강박적인 행동에서 점차 벗어날 수 있다. 멜빈은 일종의 동물 치료 효과를 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멜빈의 가장 중요한 치료자는 캐롤이다. 그녀는 멜빈의 감정을 존중하고 받아들일 뿐 아니라 멜빈 스스로가 캐롤을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게 해주고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기다려준다. 캐롤이 밤에 찾아와 당신과 함께 자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사건은 멜빈으로 하여금 밤새 뒤척이며 비로소 자신이 캐롤을 사랑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만들었다. 그날 밤 멜빈은 처음으로 사이몬을 찾아가 대화를 시도한다.

한편 최근에는 생물학적 연구와 함께 약물치료가 새롭게 각광받고 있다. 강박증 환자가 클로미프라민(clomipramine)이라는 항우울제를 복용했더니 증상이 완화됐다는 보고가 있기 때문이다. 클로미프라민은 두뇌에 세로토닌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의 양이 감소하지 않도록 해주는 약이다. 세로토닌은 충동성, 공격성, 불안 등과 관련된 신경전달물질로서 많은 정신 장애와 연관된 물질이다. 신경과학자들은 강박증 또한 세로토닌 결핍과 관련되지 않을까 예측하고 있다.

강박증까지는 아니더라도, 현대인들이라면 누구나 강박적인 행동을 한두번씩 경험하게 된다. 크게 걱정하거나 신경쓰지 않고도 별탈 없이 살 수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위험 요소가 항상 도사리고 있는 복잡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어느 정도의 ‘강박적 행동’은 생존 습관일 수 있다. 강박적이지 않더라도 불안하거나 두렵지 않은 세상이 온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을 텐데 말이다.
 

2001년 07월 과학동아 정보

  • 동아일보사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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