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새롭게 밝혀진 피라미드의 신비5

큰곰자리와 작은곰자리 이용해 정북결정

이집트 고대문명의 상징 피라미드. 일부에서는 외계인이 만든 것이라는 주장이 나올 정도로 정교하고 거대한 미스터리 건축물이다. 최근 피라미드에 대한 과학적인연구결과가 속속 나오고 있다. 새롭게 밝혀지는 피라미드의 신비를 만나보자.

피라미드는 왜 만들었을까. 이 거대한 건축물을 정말 이집트인들이 만들었을까. 모양은 왜 사각뿔일까. 밑변의 방향은 어떻게 정확히 북쪽에 일치시켰을까. 그동안 이집트 피라미드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이 제기돼 왔다. 하지만 피라미드 건설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이 부족하기 때문에 여태까지 엉뚱한 추측과 주장이 무성했을 뿐 뾰족한 해답을 얻지 못했다.

최근 이집트 피라미드에 대해 과학적인 시각에서 새로운 연구가 잇따르고 있다. 피라미드의 모양은 사하라사막 서쪽에 많이 나타나는 자연지형으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주장이 미국 고고학전문지 ‘아키알러지’ 3·4월호에 제기됐고, 피라미드 방향을 북쪽에 맞출 때는 밤하늘의 별자리를 이용했다는 천문학적인 연구결과가 지난해 11월 16일자 영국 과학전문지 네이처에 발표됐다.

피라미드의 미스터리를 과학으로 풀어낸 이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보자.

1 사각뿔 아이디어의 출처 사하라사막의 자연지형에서 힌트
 

놀랍게도 사하라사막에는 원 추형이나 피라미드형 지형이 많이 발견된다.


피라미드의 모양은 왜 사각뿔일까. 정육면체나 직육면체도 아니고 스타디움(경기장) 모양도 아니다. 그렇다고 이집트인들이 자기들만의 세계를 상상하며 만들었을지 모를만한 특별한 모양도 아니다.

미국 보스턴대 파룩 엘바즈 교수는 미국 고고학전문지 3·4월호에 기고한 글에서 피라미드를 ‘사막의 선물’이라고 주장했다. 엘바즈 교수는 이집트 서부사막으로 지질학 답사 여행을 여러차례 떠났다. 나일강의 서쪽에 위치한 이 사막지역에서 그는 피라미드 모양을 한 인상적인 언덕들을 수없이 많이 만났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피라미드 제작자들이 이런 자연지형에서 영감을 받아 피라미드를 디자인했다는 것이다.

이들 피라미드 모양 지형은 원추형이 기본이고, 원추형 지형 중에 여럿이 실제 피라미드처럼 깎아지른 면을 갖는다. 어떻게 이런 모양을 갖게 됐을까. 정상이 평평한 탁자형 고지가 출발점이다. 탁자형 고지는 침강지형에서 커다란 급경사면이 생기면서 분리됐다. 이어 탁자형 고지의 윗면과 옆면이 물에 의해 침식됐다. 결국 계속적으로 침식이 일어나, 크기는 작아지고 모양은 피라미드형(또는 원추형)이 됐다.

분명 고대 이집트인들도 피라미드의 형태를 선택할 때 이런 사막지형을 연구했을 것이다. 이를 입증할 만한 두가지 사실이 남아있다. 하나는 이들이 사막을 탐험해 금광을 표시한 지도(현재까지 알려진 세계 최초의 지도)를 남겼다는 점이고, 또하나는 쿠프 왕(기원전 2589년-2566년)의 아들인 카프라 왕(기원전 2558년-2532년)의 동상을 만들기 위해 특별한 암석(현재는 카프라의 그리스어인 케프렌을 따 케프렌 섬록암이라 불린다)을 찾아냈다는 점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사막을 탐험하는 방법을 알았을 뿐만 아니라 사막에서 그들이 만났던 지형이 우연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다. 다름아닌 사막에서 원추형이나 피라미드형 지형이 바람에 의한 침식을 피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즉 피라미드형 지형에서는 바람이 경사면을 따라 위쪽으로 부는 경우 위로 갈수록 바람은 지형의 더 작은 부피를 쓰다듬는다. 이때 바람의 침식력은 정점에 집중되는데, 정점에서는 이 힘이 공기중으로 사라진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이집트 기자에 있는 피라미드가 오랜 바람에 끄떡없이 견딘 이유다. 또한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에서 다른 것보다 2천여년이나 더 오래전에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남아있는 이유이기도 하다.스핑크스도 사막지형에서?

스핑크스의 기원도 피라미드만큼 흥미를 자아낸다. 어떤 학자들은 대피라미드를 만들기 위해 채석하다가 남은 돌덩어리로 만들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보다 더 그럴듯하고 자연스런 설명이 있다. 바로 사막에 나타나는 지형이다.

1890년 스웨덴의 탐험가 스벤 헤딘이 아시아 내륙을 여행했을 때 낯선 지형을 만났다. 1905년 자신의 책에 중국 북서지방의 타클리마칸 사막 동쪽에서 만났던 모습을 “협곡 사이에 줄지어 있는 작은 봉우리가 수없이 펼쳐졌다”고 묘사했다. 그의 가이드는 이런 봉우리를 야르당(yardang)이라고 불렀는데, 투르크어로 야르(yar)는 가파른 언덕이란 뜻이다. 이런 야르당은 이집트 서부사막에서 많이 나타난다. 이곳에서 발견되는 야르당은 선체를 뒤집어 놓은 모습인데, 뱃머리가 바람방향을 향한다.

스핑크스가 바람이 깎은 둔덕인 야르당과 꽤 다르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1909년 영국의 지질학자 비드넬은 이집트사막의 야르당이 “바람방향으로 나란한 긴 축을 가졌다”고 표현했고, 1924년 독일의 지형학자 요한네스 발터는 “스핑크스를 닮았다”고 묘사했다. 더욱이 1939년 영국의 탐험가 랄프 바그놀드는 이집트의 야르당을 “진흙사자”라고 표현했다.

그렇다면 스핑크스의 누운 사자 몸체는 바람에 의해 자연적으로 깎인 모양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 아닐까. 거친 석회암으로 이뤄진 야르당이 기자 고원 동쪽에 우뚝 솟아 있었을지도 모른다. 고대 기술자들은 바람방향으로 불쑥 솟아있는 부분을 파라오의 머리 모양으로 다시 다듬고, 터번을 씌웠을 것이다. 그리고 사자 몸체 주위에 참호를 파 사자의 다리를 조각했을 것이다. 바로 기자의 스핑크스다.

2 사막의 지혜를 전달한 사람 가뭄 피해 이주해온 유목민

피라미드 디자인의 원형이 자연지형이라는 말은 너무 단순한 결론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아이디어를 얻은 과정은 그리 단순치 않다. 현재 이집트 고대문명이 발생한 지역은 사막이 아니었고, 나일강변 농민들이 강물을 잘 다룰 줄 알았지만 사막의 자연지형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기 때문이다. 대신 누군가가 사막의 지혜를 나일강변 거주자들에게 전달했다는 얘기다. 도대체 그들은 누구이고, 왜 그랬을까.

이집트 고대문명은 나일강변을 따라 탄생했다. 하지만 나일계곡과 삼각주의 기름진 토양을 경작하던 초기 거주민들만의 힘으로 문명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이 농민들이 강변에 정착한지 2천여년 후에야 이집트 문명은 건설되기 시작했다. 5천여년 전인 이때는, 고고학적 증거를 보면 나일강 서쪽 북아프리카의 사하라 지역이 사막화되기 시작하던 때와 일치한다.

미국 애리조나대의 반스 하인즈 교수팀은 동위원소 연대측정법을 이용해 사하라사막지역이 건기와 우기였던 시기를 알아냈다. 연구 결과, 지난 30만년 동안 4번의 건기와 우기가 교대로 나타났고, 마지막 우기는 1만1천년 전에서 5천년 전 사이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사바나기후와 비슷한 환경인 마지막 우기에는 여러 호수 둘레에서 키가 큰 풀과 나무가 자랐다. 현재에는 타조알 껍질조각이 풍부하게 발견되고, 인공위성을 통한 레이더 영상을 보면 당시에 물이 흘렀을 강줄기들이 모래에 묻힌 채 드러나기도 한다.

마지막 우기가 끝난 5천여년 전 북동아프리카가 극도로 건조해졌기 때문에 가뭄에 찌들었던 이곳 거주민들은 삶의 원천인 물을 찾아 나일강변으로 이주해야만 했다. 이 유목민들이 사막을 떠나 나일강변 농민들과 통합했던 것은 물론 사막의 지혜를 가져왔다. 이들 두 민족의 역동적인 통합은 고대이집트에 문명의 씨앗을 뿌렸다. 인구는 증가했고 더 많은 식량을 생산하기 위해 사회 조직이 더 나아져야 했으며, 사회가 복잡하고 풍요해지자 다양한 아이디어가 넘쳐났다. 결국 유목민들의 이주는 피라미드를 비롯한 이집트 고대문명을 꽃피웠고, 그들이 가져온 아이디어는 피라미드 디자인의 기본이 됐던 것이라고 엘바즈 교수는 주장했다.

기존 역사서에는 기원전 3100년경 메나(메네스 또는 나르메르) 왕이 흩어져 있던 이집트를 통일하면서 이를 계기로 해서만 고대문명이 부흥했다고 적고 있다. 이에 비해 가뭄으로 인한 유목민의 이주를 고대문명의 씨앗으로 본 견해는 재미있는 해석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기원전 3100년경 메나 왕이 이집트를 통일한 후 3백20여년만에 조세르 왕이 최초의 피라미드라고 할 수 있는 계단형 피라미드를 사카르에 건설했다. 최초로 돌로 만든 계단형 피라미드는 옆면이 평평하진 않지만, 여러 단을 쌓고 각 단이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전체모습이 사각뿔과 비슷한 형태를 보여준다. 실제 옆면이 매끈한 사각뿔 피라미드의 전형은 이로부터 1백20여년 후에 세워진 기자의 대피라미드다.

3 채찍질 당하던 노예의 삶이었을까 파라오의 카리스마, 일꾼의 신뢰
 

이집트 사카라 피라미드의 인근 무 덤에서 발견된 3천3백여년 전의 음각 벽화. 이집트인들이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피라미드를 건설하던 이들 에게도 나름대로의 삶이 있었다는 증거가 최근 발견됐다.


피라미드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미국 할리우드 영화 제작자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은 피라미드를 건설하는 모습에서 노예들을 강요하는 폭군, 채찍을 내리치는 사악한 군인, 그리고 커다란 바위를 수없이 옮기는 노예를 머릿속에 그린다. 이런 관점은 기원전 450여년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가 쓴 책 ‘역사’에 쓰여진 기록에 바탕을 둔다. 만일 2천년이나 지난 이집트 피라미드를 헤로도투스가 관광하던 당시 그의 가이드가 이야기를 꾸며냈거나 이를 전해들은 헤로도투스가 흥미진진한 내용으로 새롭게 바꿨다면, 현재 우리가 아는 사실은 진실과 거리가 있을 것이다.

헤로도투스는 기자의 대피라미드에 대해 10만명의 인원이 3개월씩 교대로 20여년에 걸쳐 건축했다고 기술했다. 이 기간 동안 매일 작업했다고 해도 하루에 평균 2.5t짜리 돌을 3백여개나 채석하고 깎고 옮겨 적당한 지점에 쌓아올려야 했을 것이다. 대피라미드가 건설되던 쿠프 왕의 시대에 사용가능한 노동력은 거의가 인력이었다. 도르래나 바퀴와 같은 도구가 발명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건설중인 피라미드 옆면에 맞닿는 비탈길을 만들고 이 길을 따라 여러 사람이 돌을 담은 썰매를 끄는 것이다.

대피라미드의 가장 큰 특징은 거대한 규모에 버금가는 건축의 정밀성이다. 밑면의 네변 길이가 모두 2백30m로 소수점 첫째자리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고, 네변이 각각 정확히 동서남북을 가리키며, 밑변의 각모서리는 무시할 정도의 오차범위에서 90°를 이룬다. 그런데 거대하고 정밀한 대피라미드를 만드는데 참여한 일꾼들에게 유일한 자극제가 살벌한 채찍뿐이었다면, 이런 정밀성을 달성하지 못한 것은 물론 건설 초기에 반란이 일어났을지 모른다.

엘바즈 교수는 대장정의 피라미드 공사에 지도자인 쿠프 왕과 일꾼들 사이의 신뢰와 조화가 중요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한 근거로 일꾼들이 피라미드 벽면에 남긴 ‘쿠프의 친구들’이라는 서명을 제시했다. 또한 엘바즈 교수는 쿠프가 카리스마와 지도력이 남다른 왕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상징적인 통일을 이뤘던 메나 왕 때와 달리 쿠프 왕이 남북에 흩어져 있던 국민들을 불러모아 대피라미드를 건설했다. 실제 대피라미드는 상(上)이집트와 하(下)이집트의 중간지점에 위치한다. 상·하 이집트의 국민들은 대피라미드 건설을 통해 서로를 알고 도우며 나아가 결혼하기도 했다. 엘바즈 교수는 대피라미드 건설은 그야말로 이집트의 실질적인 통일을 가져왔다고 평가했다. 대피라미드가 완성됐을 때 이집트 국민들이 하나로 맺어졌고, 이들의 마음 속에는 대단한 민족적 자긍심이 스며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최근 이집트학자 자하이 하와스 팀이 발굴한 이집트 유적을 보면 피라미드 건설 장정 동안 일꾼들이 기자 고원 기슭에서 지냈던 삶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발굴 결과 6백명의 일꾼이 안치된 공동묘지가 발견됐다. 안치된 시신의 일부에서는 척추가 눌린 모습이 보였는데, 이는 피라미드 건설 과정에서 무거운 돌을 옮기는 중노동자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일꾼들 무덤 일부에는 진흙벽돌로 만든 2m 정도 높이의 미니 피라미드가 장식돼 있었다. 이것은 일꾼들의 죽음을 애도하며 세운 것으로, 일꾼들을 단순한 노예로만 여기지 않았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또한 발굴 결과 피라미드 건설자들이 먹었던 음식이 밝혀졌다. 당시 기본 식료품은 이중 낟알을 갖는 밀인 에머밀로 구은 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빵을 야채와 함께 먹었고, 맥주를 곁들여 마셨다. 무덤 묘비를 보면 일꾼 1인당 매일 배당됐던 빵과 맥주의 적정량이 나와 있다. 이런 사실은 당시 일꾼들이 살벌하게 부림을 당하던 노예가 아니라 기본적인 대우는 받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4 정북 방향 찾은 비결 북극 둘레 돌던 별자리 이용

이집트 피라미드의 미스터리 중 하나는 바로 방향성이다. 즉 피라미드의 밑변이 각각 동서남북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여러 피라미드 가운데 기자 대피라미드의 방향성은 놀랍다. 북쪽을 향하는 면이 정북에서 벗어난 정도가 서쪽으로 3′도 되지 않는다. 오늘날 가장 정밀한 건축물로 알려진 파리와 그리니치의 천문대도 하늘의 자오선(어떤 지점에서 정북과 정남을 따라 천구에 그은 선)과 일치하도록 설계됐다. 하지만 이들도 각각 6′과 9′의 오차를 보인다는 사실을 보면 대피라미드의 정밀한 방향성은 미스터리라 할 수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어떻게 이 정도로 정확한 방향을 결정했을까. 지난해 11월 17일자 영국의 과학저널 ‘네이처’에 실린 케임브리지대 케이트 스펜스 교수의 연구 결과를 보면 이 비밀을 확인할 수 있다. 스펜스 교수는 피라미드 건축자들이 정북을 결정할 때 작은곰자리와 큰곰자리의 두별을 이용했다고 주장했다.

먼저 기원전 2640년-1850년 사이에 건설된 피라미드의 방향성을 알아봤다. 그러자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다. 기원전 2600년-2430년 사이에 건설된 피라미드의 북쪽면과 정북 사이의 차이가 연도에 따라 규칙적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즉 쿠프 왕의 대피라미드를 전후해 정북과의 오차가 커졌는데, 대피라미드보다 더 오래된 피라미드들은 서쪽으로 오차가 크게 나타났고, 대피라미드 이후, 예를 들어 쿠프 왕 이후 두번째 파라오였던 멘카우레 왕(기원전 2532년-2503년)의 피라미드 북쪽면은 정북에서 동쪽으로 13′이나 차이가 났다. 왜 그랬을까.

스펜스 교수는 하늘의 별을 이용해 북쪽을 결정하는 방법을 생각했다. 사실 대피라미드 정도의 정확성을 갖는 방향 결정법은 천문학적인 것밖에 없다. 망원경이 발명되기 전 가장 위대한 관측자였던 티코 브라헤의 관측 오차가 1-2′이었던 사실을 감안하면 말이다. 물론 피라미드를 건설할 때 사용했던 방향 결정법을 증언해주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지만, 피라미드 건설자들의 천체 관측 눈썰미도 예사롭지 않았던 것 같다.
기원전 2500년 경 당시 북쪽하늘에는 정북을 알려줄 만한 별이 없었다. 현재 정북 방향에는 북극성이라는 별이 있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못했다. 왜냐하면 천구의 북극, 즉 지구의 자전축이 가리키는 방향이 변하기 때문이다. 즉 지구의 자전축이 지구 공전 궤도면에 대해 수직으로 서있지 않고 기울어져 있어서, 지구의 자전축은 마치 팽이가 돌 때처럼 기울어져 움직이고 이에 따라 자전축이 가리키는 북극 방향도 바뀌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을 세차운동이라 하는데, 이로 인해 2만6천년을 주기로 북극의 위치가 바뀐다. 즉 현재의 북극성은 2만6천년 후에 다시 북극을 가리킨다.

대신 기원전 2500년 경 밤하늘에는 같은 거리만큼 북극을 사이에 두고 반대편에서 북극 둘레를 돌던 별이 있었다. 바로 큰곰자리의 미자르와 작은곰자리의 코차브란 별이다. 미자르는 큰 국자의 손잡이에 해당하는 별이고, 코차브는 작은 국자의 사발에 위치하는 별이다. 정확히 기원전 2467년에 이 두별을 잇는 선이 하늘의 북극을 지나갔다.

이 두별을 이용해 어떻게 정북을 결정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기원전 2467년으로 시간여행을 떠나자. 이해 어느날 한 고대 이집트의 천문학자가 추를 늘어뜨린 줄(다림줄)을 가지고 북쪽하늘을 유심히 관측했다. 그는 다림줄을 북쪽하늘로 향하고 두별 중 하나의 별이 북극 위에 또 하나의 별이 북극 아래에 위치하기를 기다렸다. 어느 시간엔가 다림줄과 두별이 일치했을 것이다. 이때 바로 다림줄과 수평선이 만나는 방향이 정북임을 알 수 있다.

5 정확한 건축연대 언제일까 5년 넘지 않는 오차로 측정
 

이집트의 파라오는 영원 히 살기 위해 미라가 됐 다. 동시에‘불멸의 존재’ 인 북쪽별에 동참하기 위 해 피라미드를 북쪽 방향 으로 건설했다.


과연 고대 이집트인들이 피라미드를 건축했을 때 미자르와 코차브란 별을 이용했을까. 이에 대해 두가지 증거를 제시할 수 있다.

첫번째는 이 방법 자체가 시간에 따라 비례하는 피라미드의 방향 오차를 설명해준다는 사실이다. 피라미드 건축자들이 큰곰자리의 미자르와 작은곰자리의 코차브란 별을 이용해 북쪽을 결정했기 때문에 기원전 2467년 전후에는 오차가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세차운동 때문에 미자르와 코차브의 위치는 약간씩 바뀌었고 당연히 이 두별을 이용해 결정된 북쪽도 정북과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기원전 2467년에서 더 오래되거나 더 나중이면 시간에 비례해서 오차가 더 커졌다.

두번째는 고대 이집트의 별자리 기록이다. 고대 이집트의 천문학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무덤 천장에도 많은 별자리 기록이 남아있지만 대부분 실제 밤하늘과 일치시키기가 힘들다. 그런데 확인된 몇 안되는 별자리 중에 이집트의 까뀌 별자리가 있다. 까뀌는 조각가가 신비한 조각상을 만들 때 사용하던, 신화 속의 강력한 도구였는데, 까뀌 별자리는 현대의 큰 국자(큰곰자리)와 일치한다. 투탄카멘의 무덤 벽화에는 이런 이미지가 쌍으로 발견된다. 아마도 큰 국자(큰곰자리)와 작은 국자(작은곰자리)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다른 곳에서는 하늘의 북극 둘레에서 서로 쫓고 쫓기는 날카로운 두개의 발톱에 대한 글이 나온다. 이 글은 하늘의 북극을 맴도는 미자르와 코차브가 반영된 이야기가 아닐까.

고대 이집트인들이 피라미드를 건설할 때 북쪽하늘의 미자르와 코차브를 이용해 정북을 결정한 것이 사실이라면 피라미드의 건축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피라미드의 방향이 정북에서 벗어나는 정도가 기원전 2467년으로부터 차이나는 시간과 비례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스펜스 교수는 기존보다 더 정확한 피라미드 건축연대를 알아낼 수 있었다. 예를 들어 기자의 대피라미드는 기원전 2485년-2475년 사이에 건설됐고, 오차는 5년을 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기존의 건축연대는 파라오의 목록과 제위기간이 기록된 연대기를 이용해 추정됐는데, 기록이 불완전해 오차가 1백년 정도였던 것에 비하면 놀라운 결과다.

피라미드의 건축연대에 대해 최근까지도 많은 논란이 있었다. 어떤 학자들은 피라미드의 놀랄만한 정밀함이 당시 기술로는 불가능하다고 하면서 수만년 전에 외계인이 지구에 문명을 일으키면서 피라미드를 건설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스펜스 교수의 이번 결과는 이런 주장을 반박하는 중요한 증거다. 또한 파라오의 연대기를 바탕으로 추정한 기존의 건축연대가 크게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결과이기도 하다.

한편 왜 피라미드는 정북을 향하게 건축됐을까. 이것은 고대 이집트인들의 내세관과 관련된다. 그들은 밤하늘의 별, 특히 주극성에 굉장히 큰 관심을 가졌다. 주극성은 북극 주위를 도는 별들로 언제나 지평선 위에 위치한다. 이 때문에 고대 이집트인들은 이런 주극성을‘불멸의 존재’라고 불렀다. 결국 주극성은 영원 불멸과 밀접하게 관련된다고 생각됐다. 파라오는 사후에도 이런 주극성에 동참해 영원히 살기를 원했다.
그래서 파라오를 미라로 만들었던 것처럼 피라미드를 정북 방향으로 건설했던 것이다.

스핑크스도 사막지형에서?

스핑크스의 기원도 피라미드만큼 흥미를 자아낸다. 어떤 학자들은 대피라미드를 만들기 위해 채석하다가 남은 돌덩어리로 만들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보다 더 그럴듯하고 자연스런 설명이 있다. 바로 사막에 나타나는 지형이다.

1890년 스웨덴의 탐험가 스벤 헤딘이 아시아 내륙을 여행했을 때 낯선 지형을 만났다. 1905년 자신의 책에 중국 북서지방의 타클리마칸 사막 동쪽에서 만났던 모습을“협곡 사이에 줄지어 있는 작은 봉우리가 수없이 펼쳐졌다”고 묘사했다. 그의 가이드는 이런 봉우리를 야르당(yardang)이라고 불렀는데, 투르크어로 야르(yar)는 가파른 언덕이란 뜻이다. 이런 야르당은 이집트 서부사막에서 많이 나타난다. 이곳에서 발견되는 야르당은 선체를 뒤집어 놓은 모습인데, 뱃머리가 바람방향을 향한다.

스핑크스가 바람이 깎은 둔덕인 야르당과 꽤 다르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1909년 영국의 지질학자 비드넬은 이집트사막의 야르당이“바람방향으로 나란한 긴 축을 가졌다”고 표현했고, 1924년 독일의 지형학자 요한네스 발터는“스핑크스를 닮았다”고 묘사했다. 더욱이 1939년 영국의 탐험가 랄프 바그놀드는 이집트의 야르당을“진흙사자”라고 표현했다.

그렇다면 스핑크스의 누운 사자 몸체는 바람에 의해 자연적으로 깎인 모양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 아닐까. 거친 석회암으로 이뤄진 야르당이 기자 고원 동쪽에 우뚝 솟아 있었을지도 모른다. 고대 기술자들은 바람방향으로 불쑥 솟아있는 부분을 파라오의 머리 모양으로 다시 다듬고, 터번을 씌웠을 것이다. 그리고 사자 몸체 주위에 참호를파 사자의 다리를 조각했을 것이다. 바로 기자의 스핑크스다.
 

2001년 07월 과학동아 정보

  • 이충환 기자

🎓️ 진로 추천

  • 역사·고고학
  • 천문학
  • 문화인류학
이 기사를 읽은 분이 본
다른 인기기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