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속에서 1피코초(${10}^{-12}$초) 간격으로 일어나는 생명현상을 한편의 드라마처럼 감상할 수 있다면 어떨까. 물론 꿈같은 일이다. 하지만 그 꿈에 희망을 건 사람이 있다. 순수한 호기심에서 출발해 다차원 진동분광학 이론을 제시한 조민행 교수가 그 주인공이다.
“아주 간단한 이유 때문에 저는 지금 이 일을 하는 것 같아요. 매번 나름대로 재미있게 느껴지는 일을 선택하다보니까 여기까지 오게 됐어요. 그러니까 미래를 예측해서 내가 뭐가 되겠다, 그런 목표를 세우지 않았던 게 오히려 저 개인적으로 제가 관심있는 분야를 찾게 만든 동기인 것 같아요.” 분자의 3차원적 구조 변화를 밝혀낼 수 있는 다차원 진동분광학의 이론을 제시해 이 분야의 프런티어로 주목받는 과학자 조민행 교수(36, 고려대 화학과)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다. 좋아하는 것을 하는 일은 어찌보면 당연하지만 그것을 찾고 또 그렇게 이루기란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 그는 행운아인 셈이다. 물 흐르듯이 자신이 재미있어 하는 것을 찾아온 결과가 지금의 일이라니 말이다.
DNA 이중나선의 밑그림 X선 회절법
인간 게놈 연구의 서막을 연 DNA의 이중나선 구조는 왓슨과 크릭의 공로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 구조의 밑그림을 제공한 인물은 바로 영국 런던대학 킹스칼리지의 물리학자 로잘린드 프랭클린과 모리스 윌킨스였다. 그들이 DNA의 X선 회절 사진을 제공하지 않았다면 왓슨과 크릭이 오늘날의 명성을 얻었을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X선 회절 사진은 눈으로 보기 어려운 분자의 구조를 파악하는 제1세대 역할을 톡톡히 해냈으며 현재에도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그런데 X선 회절법을 사용하려면 시료를 크리스털로 만들어야 한다. 즉 일정한 격자구조를 가진 결정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단백질 같은 분자의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선 단백질을 격자구조를 가진 결정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그 일이 그리 만만치 않다. 온도, pH, 화학약품 등 수많은 변인들을 통제해가며 단백질을 결정화하는 조건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재 단백질의 결정화 과정은 자동화된 시스템에 의해 이뤄진다. 이러한 시스템에 의해 만들어진 결정은 비로소 X선 회절에 의해 그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여전히 단백질 분자를 결정형태로 만든다는 것은 X선 회절법의 단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결정으로 만들지 않고도 분자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는 핵자기공명(Nuclear Magnetic Resonance, NMR)법이다.
NMR은 주로 분자를 구성하는 수소원자에 주목한다. 수소원자핵의 스핀이 자기장에서 어떤 에너지를 나타내는지 보면서 수소원자 주변에 어떤 원자가 배열돼 있는지에 대한 정보를 얻는 방법이다. 이때 에너지 차이는 스펙트럼으로 분석된다. 이것이 1차원 NMR이다. 그런데 단백질 분자 하나에는 수소원자가 수백, 수천개가 있다. 따라서 그 수소원자로부터 얻어지는 스펙트럼을 해석하기란 매우 어렵다.
제2세대 분자 구조 결정법 NMR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이 양성자와 양성자가 가까이 있으면 나타나는 스펙트럼 상의 독특한 피크를 해석하는 2차원 NMR이다. 이것은 한마디로 단백질 분자내 양성자간의 거리에 대한 지도를 얻는 것이다. 주변의 양성자들이 쌍으로 묶여 보다 정확한 구조에 대한 정보가 스펙트럼을 통해 나타나기 때문이다. 가장 큰 특징은 1차원 NMR의 경우 단백질 구조가 바뀌어도 스펙트럼은 크게 변화하지 않는데 비해 2차원 NMR은 단백질 분자의 구조가 조금만 바뀌어도 스펙트럼의 모양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점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생물학적 현상이 액체 속에서 일어나므로 액체 속에서 일어나는 단백질 구조의 변화를 그대로 읽는 일이 더할나위 없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2차원 NMR에도 문제가 있다. 생물학적 반응을 수행하는 단백질 분자들은 구조를 수시로 바꿀뿐 아니라 특정 분자를 떼어냈다 붙였다 하면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리고 이런 일들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짧은 시간 동안에 일어난다. 그런데 NMR은 단백질 분자의 시간에 따른 변화를 보여주지 못한다. 한마디로 1초에 24프레임이 지나가는 영화를 봐야하는데 1초에 3-4 프레임만 지나가는 영화를 보는 셈이다. 즉 중간 장면이 빠진 영화를 본다는 말이다. 이것이 시료를 결정화시키지 않고도 구조를 파악할 수 있다는 NMR의 피할 수 없는 단점이다. 현재 연구자들은 해상도가 좋은 X선 회절법과 NMR을 모두 사용한다. 하지만 이 둘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론 탄생의 산파 호기심
그렇다면 이제는 분자의 3차원적인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 X선 회절법도 NMR도 아닌 제3의 그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 시간의 변화에 따른 구조의 변화를 파악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 그것이 바로 조민행 교수가 제안한 다차원 진동분광학 이론이다. “X선 회절법과 NMR의 장점을 모두 살리는 것은 어렵지만 다차원 진동분광학이 가지는 장점을 X선 회절법이나 NMR이 가지고 있지는 못해요.” 다차원 진동분광학이 X선 회절법, NMR과 상보적으로 쓰일 수 있다는 조교수의 말이다.
사실 다차원 진동분광학에 대한 생각이 제시된 것은 약 7년 정도밖에 안됐다. 모든 분자들은 고유한 진동을 하고 있다. 여기에 분자의 진동과 공명을 일으키는 적외선을 이용하면 분자들의 진동에 대한 정보를 스펙트럼으로 얻을 수 있다. 이것이 NMR과 유사한 1차원 진동분광학이다. 이것을 보며 조교수는 “아주 짧은 적외선 펄스로 분자를 진동시키면서 서로 다른 진동 모드간의 상관관계를 이해한다면 시간에 따른 단백질 분자의 3차원 구조를 이해할 수 있을텐데 왜 그런 연구는 안돼 있을까?”라며 궁금해했다. 그러면서 이 분야에 들어온 것이 1997년의 일이라고 덧붙였다.
“과거에는 적외선 레이저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분자의 3차원 구조를 이해하는 진동분광학에 대해 그리 깊이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적외선 레이저가 등장하고 컴퓨터의 성능도 좋아져 엄청난 정보를 해석하게 되면서 예전에는 상상할 수 없던 일을 하는 사람들이 생겨난 거죠. 저도 그 중 하나예요.” 그러나 현재까지는 2차원 진동분광학에 대한 실험만 이뤄진 상태다. 그것도 아주 작은 단백질 분자에 대해서다. 하지만 조교수는 2차원은 물론 3차원 진동분광학도 가능해진다고 전망한다.
생명현상 실시간 중계하는 다차원 진동분광학
몸 속에서 일어나는 생명현상을 주도하는 단백질 분자들은 각각의 기능을 수행할 때 매우 역동적으로 움직인다. 인슐린 분자의 3차원 구조를 알고 있다고 하지만 사실 인슐린 분자가 기능할 때의 분자 구조는 현재 알려진 것과 다르다. 이것은 한사람의 사진을 보고 그 사람의 성격과 능력을 예측하는 것과 같은 얘기다.
그런데 다차원 진동분광학을 이용하면 10-12초의 시간간격에서 이뤄지는 분자 구조의 변화를 읽을 수 있다. 어찌보면 꿈같은 얘기일 수도 있다. “펨토초(10-15초) 레이저 기술을 이용해 기체들의 동역학적인 반응을 시간적으로 기술하려고 했던 아메드 즈웨일 교수(1999년 노벨 화학상 수상)의 생각도 30년 전에는 꿈같은 얘기였죠. 이것도 같은 것이라고 봐요.” 다차원 진동분광학의 가능성에 자신만만한 모습이다.
조민행 교수의 이론이 실험으로 서서히 그 존재가치를 드러내면 그 파급 효과는 상상할 수 없다. 생명현상의 드라마를 누락된 장면없이 볼 수 있게 되면서 인류는 생명현상의 비밀을 풀 수 있다는 말이다. 현재 미국과 네덜란드를 비롯해 해외의 과학자들은 조교수의 이론을 실험으로 검증하고 있다. 그리고 조교수와 함께 실험 결과를 해석한다. 엄청난 숫자로 이뤄진 정보를 제대로 해석해내는 것이 이론의 또다른 역할이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그의 이론은 가설의 껍질을 벗고 견고한 과학적 이론으로 거듭날 것이다.
서둘러서 좋을 것 없다
사실 조교수는 미국에서 교수직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국내로 들어오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가족을 위해 국내로 들어와야 한다고 생각했고 자신의 연구가 국내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조교수는 결정을 하는데 큰 고민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대학을 결정할 때도 그러했다. “단순하게 자연과학을 하는 것이 공학을 하는 것보다 좋아보였어요. 아버지도 공학보다는 순수학문을 하는 것이 낫겠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형이 생물학을 했기 때문에 같은 것은 하기 싫었던 면도 있었던 것 같아요”라면서 그래서인지 동생은 선택의 여지없지 물리학을 전공했다며 웃는다. 대학원때는 유기화학을 했지만 유학가서는 이론물리화학이 더 재미있어 자연스럽게 전공을 바꾸게 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래서 조교수는 학생들에게 재미있는 것을 찾으라고 한다. 연구실에 학생들이 들어오면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라는 말도 같은 이유다. 제자인 곽경원씨는 “선생님이 이미 뭔가를 하라고 했으나 학생들은 구체적인 과제를 받지 않았다고 생각한 경우도 있어요”라며 주어지는 과제에 익숙한 학생들에겐 그것이 더 어려운 모양이라고 말끝을 흐린다. “연구에 관한 한 서둘러서 좋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교수의 압력에 의한 연구가 얼마나 좋은 결과를 맺겠어요?” 학생 스스로 연구의 길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는 뼈있는 한마디다.
강의준비에서 배우는 즐거움
조민행 교수의 제1 관심사는 연구다.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중요시하는 것이 강의다. “대학교때 화학을 공부하는 것에는 큰 재미를 못 느꼈어요. 대학원 가서 연구라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는 것인가를 알게 됐죠. 그래서 지금 학부 학생들이 화학을 공부하면서 흥미를 느끼도록 하고 싶어요.” 그는 학생들이 자신의 강의에 빠져들고 질문을 하면 행복하다고 고백한다. “강의를 준비하면서 이전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던 깊이에서 새롭게 이해를 하게 되요. 전 그것이 굉장히 인상적이예요.” 학생들을 위한 강의이지만 결국 그 자신도 배울 수 있다는 점이 그에겐 커다란 매력인 셈이다.
학생들을 위한 그의 노력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고려대로 온 이듬해인 1997년부터 학부학생들을 위해 케미스코프(Chemiscope)란 소모임을 만들어 외국의 화학교육과 관련된 논문,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같은 과학 저널을 읽고 토론하는 기회를 가졌다. 학생들이 보다 다양한 기회를 발견하고 화학이란 학문을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면서 학생들이 스스로 하고 싶은 그 무언가를 찾기 바랐다. 사실 이런 활동의 밑바탕에는 의사소통을 중시하는 그의 철학이 깔려있다. “혼자서 생각을 정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과 토론하면서 아이디어가 떠오른다는 점도 중요해요. 지금은 예전과 달리 혼자 고립된 상황에서 큰 일을 할 수 없어요. 저도 동료와 이야기하던지 이메일을 주고받던지 하면서 굉장히 많은 아이디어를 찾아내요”라며 과학자에게 의사소통은 무엇보다 중요하며 학생들에게도 강조하고 싶은 이야기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평범한 천재
이렇게 학생들에게 다가가려고 노력하지만 쉬운 일이 아닌 듯하다. 요즘은 대학원생들과 수시로 소프트볼도 하지만 학생들은 그를 천재로 생각하며 다가서기를 주저한다. 그렇다고 조교수가 기이한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고등학교 친구인 정규진씨(QN&E)는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늘 잘했죠. 나서길 싫어하고 운동도 잘했고 그래서 친구들도 좋아했어요”라고 말했다. 대학교 친구인 정덕영 교수(성균관대 화학과)도 “책을 많이 읽었던 친구인데 말수가 적고 조용한 편이었어요. 하지만 미팅, 당구, 술자리에는 빠지지 않았던 친구죠”라고 했다. 그런 점에서 조교수는 평범한 사람으로 기억된 듯하다.
실제로 그는 정리하는 것을 싫어하고 말끔하게 차려입는 것에 별로 신경쓰지 않으며 일찍 일어나는 것을 어려워하고 좋아하는 테니스를 하면서 즐거워하는 그런 평범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런 평범함 속엔 비범함이 있다. 이점은 동료인 함시현 교수도 동의한다. “조교수님은 자신이 하는 일엔 굉장히 열정적이예요. 그리고 연구를 하다보면 어려운 일이 있게 마련인데 그런 경우를 새로운 기회의 전기로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그래서 더 많은 성과들을 내는 것 같아요.” 그리고 조교수는 “하나가 중요하면 다른 것은 안 중요하게 느껴지는 그런 게 있어요. 다른 사람들한테는 좋지 않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요”라고 말하듯이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좋은 문제는 재미있는 문제
조교수의 현재 연구주제는 다차원 진동분광학이지만 그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또다른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단백질 접힘현상(protein folding). 신기하게도 단백질은 1차원적으로 배열돼 있던 아미노산들이 절묘하게 접혀지면서 독특한 구조와 기능을 만들어낸다. 만약 1차원의 아미노산들이 어떻게 접히면서 3차원적인 구조를 갖게되는지, 그리고 그 기능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면 인류가 생명현상에 다가갈 수 있는 지름길을 발견하는 것과 같다.
즉 특정한 기능을 갖는 단백질의 구조를 예측할 수 있고 동시에 그 구조를 만들어내는 1차원 아미노산 사슬을 합성할 수 있다는 말이다. 생명현상과 관련된 단백질을 인위적으로 디자인 할 수 있다는 의미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재미있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이 문제는 조교수에겐 충분히 흥미롭다. 그래서 단백질 접힘은 조교수의 아이디어 북에 좋은 문제로 올라있다.
어렸을 때부터 막연히 과학자가 되고 싶었던 조민행 교수. 순수과학을 하는 것이 좋아보였다는 세상이 지난 것이 아님을 학생들에게 보여주고 싶어하며, 자연 속에는 아직 우리가 풀지 못한 많은 문제들이 존재하기에 하루가 즐거운 과학자.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도 충분히 인생을 재미있게 살 수 있다고 믿는 그. 조교수의 희망처럼 그의 다차원 진동분광학 이론에 의해 생체내에서 기능하는 단백질 분자의 구조변화가 영화처럼 펼쳐질 날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