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5일 오전 9시 필자의 도예마을 탐방은 시작됐다. 한시간여 동안 버스를 타고 달려 도착한 곳은 경기도 이천. 예전부터 도자기 마을로 유명한 곳이다. 특히 예술도자기를 많이 생산한다.
가장 먼저 들린 곳은 해강도자미술관. 도자기 전문 박물관이다. 여기에서는 도자기 종류 중 특히 청자문화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이 미술관은 청자의 재현에 심혈을 기울인 청자 명인의 작품과 그가 수집한 작품으로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의 호 ‘해강’을 본 따 박물관 명칭도 붙여진 것이다.
열효율 높이기 위한 가마 구조
해강도자미술관에서는 한국 도자기의 발달사와 그릇을 빚는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예를 들어 토기, 도기, 그리고 자기를 어떻게 구분하는지를 알 수 있다.
토기는 보통 손톱으로 긁어지고 물을 넣으면 물이 스며서 밖으로 번져 나온다. 6백-7백℃의 낮은 온도로 굽는다. 도기는 토기보다는 굳고, 쇠칼 같은 것으로 자국을 낼 수 있다. 그리고 유약을 발라서 1천-1천1백℃의 온도로 굽는다.
보통 우리나라에서는 토기와 도기를 구분하지 않고 사용했고, 20세기에 와서 쓰게 된 명칭이다. 하지만 이 구분은 엄격하지 않다. 토기와 도기는 일단 사용하는 흙이 같고, 유약을 토기에서도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들과는 달리 자기는 자토라는 희고 고운 찰흙으로 만든다. 굽는 온도도 토기와 도기보다 높은 약 1천3백℃에서 굽는다.
토기, 도기, 그리고 자기를 구분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온도. 따라서 도자기를 만드는데 가장 중요한 기술은 불을 다루는 능력이다. 열을 다루는 기술이 도자기의 발달을 이끌었다고 말할 수 있다.
선조들의 불에 대한 노하우를 살펴보기 위해 전통가마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전통가마는 해강도자미술관 야외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 선조들은 어떻게 온도계 없이 적정온도를 맞췄을까. 눈으로 불의 색을 보고 맞췄다고 한다. 온도가 불의 색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 토기는 자주빛이 나는 붉은색 불꽃, 도기는 노란색 불꽃, 그리고 자기는 거의 흰색의 불꽃에서 구워냈다.
또한 적정온도를 유지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전통가마의 안팎을 살펴봤다. 입구에서 굴뚝까지 몇개의 칸으로 나눠져 있다. 재미있는 것은 굴뚝으로 갈수록 위치가 점점 높아진다는 사실이다. 왜 선조들은 이같은 모양으로 가마를 만들었을까.
우선 가마가 굴뚝으로 갈수록 높아지면 열은 끝칸까지 잘 이동한다. 만약 반대로 입구 쪽이 높다면 열은 제대로 굴뚝까지 이동하지 못하고 첫번째 칸에 머물고 만다. 뜨거운 열기는 밀도가 낮아 위로 올라가기 때문이다.
가마 모양의 또다른 특징은 천정이 원형이 아니라 뒤쪽으로 약간 기울어진 타원형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가마에서 오랫동안 열기를 머물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이처럼 전통가마에서 우리 선조들이 불을 어떻게 다뤘는지를 엿볼 수 있다.
도자기 빛깔의 비밀
도예마을 탐방에서 가장 큰 즐거움은 직접 도자기를 만들어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를 위해 해강도자미술관 맞은편에 위치한 ‘동해도요’라는 곳을 찾아갔다. 물레로 도자기를 빚어보고 직접 글과 그림을 그려 넣어 봤다.
그러고 나니 벌써 점심시간. 점심을 먹고 유약의 성분을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도자기의 색은 흙의 성분, 유약, 그리고 가마 속 온도 등 삼박자에 의해 결정된다. 특히 유약 성분이 결정적이다.
유약은 금속성분을 포함하고 있다. 유약을 도자기에 바르고 가마에 넣고 구우면 금속성분이 남아 빛을 내는 것이다. 따라서 금속의 종류를 달리하면 도자기에 다른 빛깔을 낼 수 있다.
이것은 금속마다 독특한 불꽃색을 내는 것과 같다. 오늘날 우리는 나트륨은 노란색 불꽃을, 칼슘은 주황색, 리튬은 붉은색을 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선조들은 유약에 어떤 성분이 있는지를 모르는 상황에서 어떻게 자신이 원하는 빛깔을 얻을 수 있었을까. 어떤 노력이 필요했을까. 선조들은 도자기에 원하는 빛깔을 내기 위해서 많은 실험을 했다. 깨진 자기 조각에 유약을 발라서 가마 속에 넣고 굽는다. 이를 통해 어떤 색이 나오는지를 확인하고 그 뒷면에 바른 유약의 종류를 적어놓았던 것이다.
유약성분을 알아본 다음 영릉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세종대왕 시대에 나왔던 수준 높은 천문관측 도구에 대해서 과학적으로 탐구했다. 그리고 세종전에 들러 서책류, 악기류, 기록화, 화포, 과학기구 등을 관찰하는 것으로 탐방을 끝내고 서울로 다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