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생존을 위한 먹는 행위마저 혐오하게 되는 심각한 정신질환. 바로 거식증과 폭식증이다. 날씬한 몸매를 강요하는 남성 위주의 사회분위기 속에서 여성은 피해자가 되고 있는데….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 음식은 단순히 먹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아이들은 뭔가 불만이 있거나 투정을 부릴 때 ‘나, 밥 안먹어!’라는 말을 곧잘 쓴다. 정치인들도 자신의 의지나 결백을 주장할 때 단식을 즐겨 사용한다. 누군가와 친해질 때 함께 식사를 하는 것만큼 좋은 길은 없으며, 친구와 함께 마시는 술만큼 달콤한 것도 없다. 음식이 생존에 있어서 꼭 필요한 것이니 만큼, 음식을 거부하는 행위는 강력한 의지와 결단의 표상이며 음식을 함께 하는 것은 관심과 친밀감의 상징이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현대에 와서 음식 문화는 그 사람의 생활 수준이나 생활 습관을 반영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고급 레스토랑에서 비싼 음식을 먹는 것은 경제적인 부를 상징하게 됐고, 아름다운 몸매를 위한 다이어트는 현대인의 가장 심각한 고민거리가 됐다. 이렇듯 음식은 현대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문화로 자리잡고 있다.
12년간 음식물 거의 못먹어
음식이 정신적·심리적인 요소들이 결합된 문화적인 형태로 자리잡아감에 따라 여기에 얽힌 정신 장애가 발생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음식을 먹는 행위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정신 질환을 ‘섭식 장애’(Eating disorder)라고 하는데, 거식증과 폭식증이 그 대표적인 예다. 여성들에게 날씬한 몸매를 강압적으로 강요하는 사회분위기로 인해 이러한 섭식 장애는 현대사회에서 심각한 정신 질환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 여성이 뚱뚱한 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가는 영화 ‘뮤리엘의 웨딩’이나 우리 영화 ‘코르셋’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뮤리엘의 웨딩(Muriel's Wedding, 1994)에서 여주인공 뮤리엘은 뚱뚱하고 못생겼다는 이유로 친구들에게(심지어 아버지에게도) 따돌림을 당하고 급기야 올림픽 출전을 위해 호주 국적을 얻으려는 남아프리카 수영선수와 위장결혼식까지 올린다. 코르셋(1996)에서 속옷 디자이너 공선주는 동료남성들에게 늘 웃음거리가 되며 심지어 자신의 몸을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고 믿었던 애인에게서까지 배신을 당한다. 이 영화들을 보고 있으면 뚱뚱한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멸시와 날씬한 몸매에 대한 여성들의 스트레스가 가히 여성들을 정신장애로 몰고 갈 수 있음을 짐작케 된다.
특히 모델이나 탤런트, 가수 같은 연예인들의 경우 이러한 스트레스는 보통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이다. 체중 증가에 대한 심각한 두려움이나 정신적인 상처로 인해 식사를 거부하는 질병인 ‘거식증’이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것도 인기 듀오 ‘카펜터즈’의 멤버인 카렌 카펜터가 ‘거식증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사망한 이후부터다. 카펜터즈는 ‘Top of the world’, ‘Yesterday once more’, ‘Sing’ 등 수많은 히트곡으로 1970년대 미국 팝 음악계를 휩쓸었던 남매 듀엣이다. 화려한 겉모습과는 달리 오랜 외로움과 과도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던 카렌은 다이어트를 통해 체중 조절을 하다가 그것이 지나쳐 거식증으로까지 발전하게 됐다. 1983년 2월, 옷을 꺼내기 위해 옷장을 향하던 그녀는 갑자기 찾아온 심장마비로 쓰러져 영영 깨어나지 못했다. 당시 32세였던 그녀의 몸무게는 30kg 정도였다고 하니 거식증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몇년 전 파파라치에게 쫓기다가 교통사고로 사망해 영국 국민들을 깊은 슬픔에 잠기게 했던 다이애나 비도 남편과의 불행한 결혼 생활 때문에 거식증에 시달렸다. 할리우드 영화배우 멜라니 그리피스는 남편 안토니오 반데라스의 사랑을 잃지 않기 위해 다이어트약을 과다 복용해 오다가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체조선수나 발레리나처럼 마른 몸이 요구되는 직업의 종사자들도 거식증에 걸릴 위험이 높다. 미국의 체조 영웅이자 올림픽 메달리스트 캐시 릭비 멕코이는 올림픽 출전을 위해 체중 조절을 하다가 거식증에 걸려 16살 때부터 12년 동안 거의 음식물을 먹지 못했다고 한다.
성욕과 식욕을 동일시
그렇다면 과연 거식증이란 어떤 질병인가. ‘신경성 식욕 부진증’(Anorexia nervosa)이라고 불리는 이 질병은 체중 증가에 대한 심각한 두려움이나 정신적인 상처로 인해 식사를 거부해 체중이 극도로 감소하는 정신 장애를 말한다. 주로 사춘기 또는 20대에 발병하며 여성이 남성에 비해 발병할 확률이 10-20배 가량 높다. 특히 강박적, 완벽주의적, 지적, 이기적인 젊은 여성에게서 자주 발병한다.
거식증에 걸리면 마른 체형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음식에 대한 극도의 혐오를 보이고 음식물을 보기만 해도 구토를 일으킨다. 또 설사제나 이뇨제를 쓰면서까지 체중을 줄이려고 노력하며, 심한 우울증이나 불안 장애에 시달리기도 한다. 과다한 체중 감량으로 인해 월경이 멈추기도 한다.
앞서 설명한 날씬한 몸매를 강조하는 사회적인 분위기 외에도, 거식증을 일으키는 원인은 다양하게 찾아볼 수 있다. 먼저 정신적인 요인을 들 수 있는데, 어떤 거식증 환자들은 동물적인 욕구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 때문에 음식 먹기를 거부한다. 섹스와 식사를 동일시하면서 음식을 먹을 경우 임신을 할지도 모른다는 환상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성욕이나 식욕을 억제하려는 금욕적인 성향 때문에 거식증으로부터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301 302’의 여주인공 윤희(황신혜 분)는 어린 시절 겪은 성적 학대와 그로 인한 정신적인 충격으로 거식증에 걸린 경우다. 강박적이며 이지적인 그녀는 다이어트에 관한 글을 기고하며 생활하는 자유기고가다. 어린 시절 정육점을 하는 의붓아버지에게 상습적으로 성폭행을 당했던 그녀는 고기와 섹스를 떠올리기만 해도 아버지가 연상된다. 음식을 먹는 행위를 섹스와 같은 것으로 보기 때문에 음식물이 자신의 몸으로 들어오는 것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을 드러낸다.
일반적으로 영화에서는 종종 거식증이 섹스 혐오증을, 폭식증이 섹스 탐닉증을 상징하는 코드로 사용된다. 301 302에서 301호에 사는 주부 송희(방은진 분)는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을 즐기는 여성으로서 섹스에도 탐닉하는 모습이 묘사돼 있다. 피터 그리너웨이 감독의 ‘요리사 도둑 그의 아내 그리고 그녀의 정부’에서는 음식과 섹스에 대한 연결 고리가 좀더 노골적인 형태로 나타나 있다. 성적인 욕구와 권력욕이 강한 도둑은 폭식을 즐기며, 아내와 정부의 혼외정사는 주로 식당이나 요리를 앞에 놓은 자리에서 벌어진다.
아편과 같은 중독 성분
정신분석을 하는 임상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거식증에 걸린 젊은 여성들은 심리적으로 엄마로부터 독립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자신을 이해하지 않고 강요만 하는 엄마가 신체에 내재돼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래서 음식을 먹지 않음으로써 엄마가 내재돼 있는 신체의 성장을 막고, 심지어 이를 파괴하려는 무의식적인 시도로 거식증을 해석한다.
거식증의 생물학적인 요인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게 진행중이다. 일란성 쌍둥이의 경우 거식증에 함께 걸릴 확률이 50%가 넘는다. 거식증이 발생할 확률이 1%도 안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굉장히 높은 일치율이다. 이 연구 결과는 거식증이 유전적인 요인에 의해 발생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301 302에서 거식증 환자 송희는 거의 식사를 하지 않으면서도 정상적인 생활을 상당 기간 유지한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과학자들은 거의 정상적인 활동이 불가능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절식과 심한 운동을 계속 할 수 있는 것은 거식에 중독적인 성향이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우리 몸에는 아편과 똑같은 성분의 호르몬이 있다. 이들은 신체에 심한 고통이 가해질 경우 이를 억제하는 역할을 한다. 이 물질은 식욕을 억제하는 특성도 있다. 한 실험에서 쥐에게 밥을 하루에 한번만 주었더니 쥐가 스스로 식사를 억제하고 과도하게 운동을 하는 현상이 관찰됐다. 아마도 장기간 굶게 되면 몸안의 아편 수준이 증가하면서 일종의 도취감이 생겨 거식적인 행동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심한 운동을 하면 체내에 엔돌핀 양이 증가하기 때문에 과도한 운동을 지속할 수 있다. 이런 생물학적인 연구는 거식증에 대한 약물 치료의 길을 열어줄 수도 있어 약학 분야에서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구역질 날 정도로 먹는 지경
폭식증은 일반적으로 음식을 무조건 많이 먹는 ‘비만’과 자주 혼동되는데, 많이 먹는다고 해서 모두 폭식증은 아니다. ‘신경성 대식증’(Bulimia nervosa)이라고 불리는 이 질병에 걸리면 복통과 구역질이 날 정도로 많이 먹으면서 식욕을 통제할 수 없는 지경이 된다. 미국에서는 흔히 불리미아(Bulimia)라고 불리는데, 그 어원을 보면 그리스어 bous는 황소를 뜻하며 limos는 배고픔을 뜻한다. 즉 ‘황소처럼 많이 먹는 식욕’이라는 뜻이다. 폭식증 환자들은 자신이 뚱뚱해지는 것에 충격을 받고 이러한 습성에 대해 심하게 죄책감을 느끼거나 자기 혐오 증세를 보인다. 그래서 일부러 먹은 음식물을 토하거나 설사제를 복용하기도 한다. 우울증으로 괴로워하는 경우도 많다.
실제로 폭식증을 앓고 있는 환자의 수가 거식증 환자 수보다 더 많다. 폭식증 환자의 90% 이상은 젊은 여성이며 정상적인 체중을 가진 여성에게 자주 나타나지만 과거에 비만 경력이 있는 경우도 있다. 영화 배우이면서 미국인들에게는 에어로빅 비디오로 더욱 유명한 제인 폰다는 자신이 오랫동안 폭식증 환자였음을 고백한 바 있으며, 미국의 팝 가수 폴라 압둘도 몇년 전 자신이 폭식증 환자였음을 밝혀 화제가 됐다. 301 302에서 301호에 사는 윤희 역시 종종 폭식증적인 성격을 보인다.
폭식증에 관한 역사적인 기술을 살펴보면 과거에도 폭식증이 빈번하게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중세까지만 해도 음식 공급이 불안정하고 예상 수명이 짧았기 때문에 번영한 시기가 오면 사람들이 음식을 과도하게 많이 먹는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 이런 시기에는 대규모로 과식을 하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중세 수도자들은 참회의 한 방법으로 구토를 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문헌은 말한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대식(gluttony)을 일곱 가지 중죄 가운데 하나로 정하기까지 했다. 영화 ‘세븐’(Seven, 1997)은 단테의 ‘신곡’에 묘사된 일곱 가지 중죄를 지은 사람들을 쫓아다니며 연쇄 살인을 벌이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영화를 보면 ‘대식’에 대한 종교적인 입장이 간략하게 소개돼 있다.
최근에는 우울증 치료약이 폭식증에 효과가 있다는 연구 결과가 계속 보고되고 있어 세로토닌이나 노아에프네프린 같은 우울증 관련 호르몬이 폭식 증세와도 연관 있을 것으로 보고 한창 연구중이다.
음식 문화에 관한 한, 현대 사회는 지금 심각한 딜레마에 빠져 있다. 한편으로는 물질적인 풍요와 서구식 식문화로 인해 비만 인구가 점점 늘어나고 있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미의 추구가 지나쳐 날씬한 몸매에 대한 동경과 비만에 대한 혐오가 극에 달하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경향이 더욱 두드러진다. 이런 사회 환경에서는 거식증이나 폭식증으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거식증이나 폭식증 환자의 90% 이상이 여성이라는 사실은 날씬한 몸매에 대한 사회적인(주로 ‘남성’들에 의한) 분위기가 얼마나 폭력적인가를 잘 보여준다. 이제부터라도 ‘날씬함’에 대한 강박증적인 시각을 버리고 다른 사람을 바라보자. 그렇지 못하면 결국 당신이 그 피해자가 될 수 있다.
거식증. 폭식증을 소재로 만든 영화들
| 301 302(1995) |
장정일의 시 ‘요리사와 단식가’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 이서군이 각본을 쓰고, 박철수가 연출을 맡았다. 방은진, 황신혜 주연. 바이오 아파트 302호에는 거식증에 시달려 더이상 음식을 먹지 못하게 된 ‘윤희’(황신혜 분)가 살고 있는데, 어느날 옆집 301호에 ‘송희’(방은진 분)가 이사 온다. 송희는 아름다운 몸매를 갖고 있었으나, 결혼 후 남편을 위해 음식 만드는 일에 집착한 나머지 남편이 늦게 귀가하면 음식을 혼자서 먹어치우다가 뚱뚱한 여자가 돼 버렸다. 그러자 남편은 바람을 피우게 됐고, 그녀는 강아지를 요리해 남편에게 먹였다가 이혼당한다. 한편 윤희는 어린 시절 정육점을 하는 의붓아버지에게 상습적으로 강간을 당했다. 어느날 그녀는 아버지를 피해 정육점 대형 냉장고에 숨었는데, 이웃집 꼬마아이가 그녀를 흉내내 냉장고에 들어갔다가 얼어죽게 된다. 이 사건 이후 윤희는 음식과 섹스를 본능적으로 거부하고 거식증에 시달린다. 이사온 날부터 301호 송희는 302호 윤희에게 요리 공세를 하고 윤희는 송희가 갖다준 음식을 버리거나 토해버린다. 그러던 중 갑자기 302호 윤희가 사라진다. 경찰의 수사가 시작되면서 영화는 엽기적인 마지막 결말로 치닫는다. 성욕이 어떻게 식욕으로 대체돼 일상에서 형상화되는가를 잘 보여준 작품. 미성년자 관람불가.
| 요리사 도둑 그의 아내 그리고 그녀의 정부(The cook, the thief, his wife & her lover, 1989) |
난해한 영화를 만들기로 유명한 화가 출신 영국 감독 피터 그리너웨이의 작품. 리샤르 보랭제, 마이클 갬본, 헬렌 미렌, 알랜 하워드 주연. 런던 한복판에 위치한 일류 식당‘홀란드’는 유명한 도둑이자 암흑가 보스인 알버트의 소유다. 자신을 위해 프랑스 최고의 요리사 리차드를 초빙한 알버트는 매일 밤 사치스런 음식 만찬을 벌인다. 어느날 그의 아름다운 아내 조지나는 식당에서 지적인 남자 마이클을 만나 첫눈에 반한다. 도둑의 아내에게 정부가 생긴 것이다. 그러나 알버트는 곧 아내의 부정을 눈치채게 되고, 마이클을 잔인하게 살해한다. 뒤늦게 마이클의 시체를 발견한 조지나는 냉혹하리만큼 무서운 복수극을 계획하고, 요리사 리차드에게 도움을 청한다. 마이클의 시체를 통째로 구워 요리로 만든 후 알버트를 초대한다. 조지나는 그에게 권총을 겨눈 채 먹으라고 강요하고, 억지로 살점을 뜯어먹다가 토하는 알버트를 향해 권총을 쏜다. 이 영화에서 도둑 알버트는 부르주아적인 절대 권력자 또는 자본가를, 요리사는 노동자 또는 피억압자를 상징한다. 도둑의 아내는 성적인 착취를 당하는 여성을, 그리고 정부는 지식인이자 사회주의자를 대변한다. 파시즘과 자본주의, 남성 우월주의를 음식과 섹스를 통해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 수작. 미성년자 관람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