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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아기예수의 탄생

원근법 일부러 무시한 그림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작품은 하나같이 반듯하고 정확해서 그림을 보고 있으면 마치 수학의 전당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눈금자와 먹줄을 퉁겨 한치의 어긋남도 없는 공간을 지었기 때문이다. 더없이 완벽하고 명료한 원근법을 구사하던 그가 나중에 가서는 알쏭달쏭한 그림들을 쏟아내기 시작하는데….

아기 예수의 탄생. 옛 화가들은 아기 예수가 세상에 처음 났을 때의 장면을 어떻게 상상했을까. 먼저 눈을 감고 오래 전 베들레헴 한 외양간에서 있었던 그날 밤의 일을 머리 속에 그려봤을 것이다. 또 뛰어난 다른 화가들이 어떻게 그리는지 비교하면서 연구하고, 성서의 내용을 잘 아는 성직자나 성서 연구가들에게 궁금한 부분을 물어보거나, 작품을 주문한 사람의 의향은 어떤지 떠봤을 것이다.

아기 예수가 정말 주인공일까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가 그린 아기 예수의 탄생은 그런 점에서 좀 생소한 그림이다. 무엇보다 등장인물들이 너무 많다. ‘예수 탄생’이 대개는 어두운 외양간 안에 아기와 어머니 마리아가 앞쪽에 나오고 한쪽 구석에 아버지 요셉, 그리고 뒤편 어둑한 곳에 가축 두어 마리가 있는 게 전부인데, 여기서는 아기 예수가 너무 작게 그려져서 정말 주인공이 맞나 의심스럽다. 더군다나 누추한 외양간 대신 시원하게 트인 공간을 크게 펼쳐놓아서, 보는 사람이 아기 예수에게 집중이 잘 되지 않는 것도 문제다.

탄생 장면에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대목이 있기는 하다. 멀리서 찾아온 동방박사들이 엄마 품에 의젓하게 안겨 있는 아기에게 준비한 선물을 차례로 바치면서 머리를 숙이는 ‘동방박사의 경배’가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는 근사하게 차려 입은 박사들과 긴 여행길을 따라왔던 많은 시종들과 짐꾼들이 낙타나 우마를 부리며 분주하게 움직이기 마련이다. 그런데 델라 프란체스카의 그림 오른쪽 뒤에서 지키고 있는 사람들은 행색이 수수하고 시종들이 달려 있지 않은데다,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를 대표하는 백인, 황인, 흑인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으니까 동방박사들이 아닌 건 틀림없다.

누가복음 2장을 보면 이들 말고도 아기 예수를 경배했던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근처에서 밤새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이었다. 여기서 하나 짚어둘 게 있다. 성서 기록을 보면 베들레헴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은 건 목자들이었고, 동방박사들은 나중에 ‘집으로’ 찾아갔다고 한다. 하지만 미술 전통에서는 이스라엘의 영도자를 발견하는 극적인 장면에 감동적인 계기를 보태려고 동방박사들이 직접 구유를 찾는 것처럼 그리는 게 관례가 됐다. 그러나 목자들은 어두운 밤에, 동방박사들은 밝은 낮에 성(聖) 가족을 찾는 차이를 두었다.

성녀의 꿈이 그림에 펼쳐진다
 

|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아기 예수의 탄생’| 1472-74년. 런던 국립 미술관. 126x123cm


델라 프란체스카는 목자들의 경배를 밝은 낮에 재현했다. 보는 이가 그림 주제를 얼른 파악하지 못하고 당황하는 건 그 때문이다. 왜 그랬을까. 그리고 목자들은 뒤로 밀어두고 음악을 연주하는 천사 다섯을 크게 내세웠다. 아기 예수의 탄생에서 천사들은 대개 하늘을 맴돌며 별빛을 뿌리거나 어둠 속에서 신비로운 자태를 드러내기 마련인데 이것도 좀 새롭다. 그림 주제를 굳이 분류하자면 ‘예수 탄생’‘천사의 경배’ ‘목자의 경배’가 모두 조금씩 섞인 걸로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이렇게 여러 주제를 한꺼번에 요리해서 버무린 솜씨도 놀랍지만, 다른 화가나 주문자의 눈치를 보지 않고 새로운 표현 형식을 실험하는 델라 프란체스카의 자세도 칭찬할만하다.

또 하나. 성모 마리아도 좀 특이하다. 파란 옷을 걸친 건 자연스럽다. 그 당시 아프가니스탄에서 비단길을 거쳐 수입된 진청색 ‘울트라마린’은 황금에 버금가는 소중하고 값비싼 안료로 생각돼서 특히 마리아의 옷 색깔로 널리 사용되었으니까. 중세와 근대에 그려진 성화에서 짙은 파란색은 보는 사람에게 경건한 마음을 일깨웠다고 한다. 그래서 성모 마리아와 천사, 성자들 가운데 아주 몇사람만 진청색 옷을 입을 수 있다고 화가들 사이에 약속이 돼 있었다. 그러나 마리아의 자세는 아무리 봐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 몸을 푼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텐데, 방금 아기를 낳은 산모치곤 무척 생기가 넘쳐 보인다. 베들레헴까지 오는 먼 여행길에도 불구하고 아기 하나쯤은 거뜬한 체력이었을까. 더군다나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두손까지 모으고 있다.

마리아 뒤쪽으로 예수의 아버지 요셉이 깊은 생각에 잠겨서 안장을 의자 삼고 앉아 있다. 요셉의 자세는 고대 조각 ‘가시 뽑는 소년’과 닮았다. 화가는 고전적인 위엄과 품위가 넘치는 자세를 고대 미술에서 빌려왔다. 요셉의 안장은 몸이 무거운 마리아를 나귀에 태워 가지고 왔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 같다.

이 그림에서 이상한 점을 꼽으면 이렇다.
1. 아기 예수가 엄마 품을 벗어나 땅바닥에 누운 것.
2. 성모 마리아가 무릎을 꿇고 일어나 앉아서 두손을 모으고
아기에게 기도하는 자세.
3. 천사들이 악기를 연주하며 아기를 위로하는 것.
4. 목자들의 경배가 어두운 밤이 아니라 밝은 낮에 이뤄진 것.

이 문제들은 옛 기록에서 우연히 해결됐다. 스웨덴의 성녀 비르기타가 본 환영을 기록한 대목이었다. 성녀는 꿈에서 아기 예수가 누워있고, 성모가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두손을 모으며, 천사들이 음악으로 시중하는 것을 보고 나서 잠에서 깨어난 뒤 그 광경을 기록해두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다들 비르기타의 말에 코웃음치면서 귀기울이지 않았지만, 나중에 성녀로 인정되면서 북유럽 화가들이 먼저 예수 탄생에다 환영의 장면을 그려 넣기 시작한다. 이탈리아 화가로서는 델라 프란체스카가 일찌감치 북구 미술 전통을 배워서 선보였던 것이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그는 르네상스 화가들 가운데 누구보다 원근법 공부를 열심히 했다. 원근법의 원리를 그림에 응용하는 것만 가지곤 모자랐던지 두툼한 책을 두권 냈을 정도였다.

그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반듯하고 정확해서 그림을 보고 있으면 마치 이성의 시대, 수학의 전당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눈금자와 먹줄을 퉁겨서 한치의 어긋남도 없는 공간을 지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창 때는 더없이 완벽하고 명료한 원근법을 구사하던 델라 프란체스카가 나중에 가서는 알쏭달쏭한 그림들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일부러 그랬을까? 학자들도 왜 그렇게 갑작스런 변화가 찾아왔는지, 그 그림들을 어떻게 읽고 해석해야 하는지 의견들이 다르다.


|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성 모자와 천사와 성자들 그리고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 1472-74년, 밀라노 브레라 미술관. 248x170cm.


담과 지붕을 단서로 소실점 구하기

‘아기 예수의 탄생’에서도 원근법이 딱 부러지게 잡히지 않는다. 그림에는 중앙 뒤편에 회백색 벽돌담이 서 있고, 담벼락 위에 나무판자를 켜서 얹은 간이 지붕이 눈에 띈다. 외양간을 통나무로 짓지 않고 벽돌이나 석대로 쌓는 전통은 예수가 다윗 왕의 혈통을 이어 받았다는 전승에서 비롯한다. 그래서 베들레헴의 외양간이 사실은 오래 전 다윗 왕의 궁성 터였고, 영광스런 과거의 폐허 위에 새로운 성전이 지어진다는 예언을 담고 있다. 여기서 담은 분명히 땅바닥에서 수직으로 쌓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림 복판에 시점을 고정하고 봤을 때 담하고 땅바닥에 물리는 경계를 보면 조금 비스듬하게 기울었다. 나무 지붕도 맨눈으로 경사도를 측정하긴 어렵지만 꽤 가파르게 경사가 졌다. 빗물이 고이면 썩을까봐 경사를 준 것 같다. 지붕에 올라앉은 까치는 기쁜 소식을 전하고, 목자는 손을 위로 들어서 빛의 존재가 세상에 왔다는 사실을 선포한다. 하늘은 구름 없이 청명하다.

담과 지붕. 이 두가지는 그림에서 유일하게 기하학적인 단서들이다. 이 둘을 갖고 그림에서 보는 이의 시점에 대응하는 소실점이나 그림과 눈 사이의 시선거리를 구할 수 있을까.

첫째로, 소실점은 간단하게 구할 수 있다(그림). 화가는 그림에서 분명히 중앙투시 원근법을 구사했지만, 시각피라미드의 횡단면을 이루는 화면을 눈과 대상, 곧 시각피라미드의 정점과 바닥면을 연결하는 중심부 바깥으로 밀어냈기 때문에 수직으로 선 담벼락의 상하 경계선이 비스듬히 기울게 된 것이다. 여기서 시점의 높이는 대강 천사들의 머리 높이 또는 왼쪽 배경 지평선 높이 부근이다.

둘째로, 시선거리는 정확하게 나오지 않는다. 화면과 수직을 이루는 평면 위에 화면 바닥선과 45도를 이루는 직선 또는 정사각형이 그림 안에 존재한다면 시선거리가 간단히 구해지지만,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는 그런 걸 모두 생략했다. 다만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멀고 가까운 위치에 따라 신장과 체구가 조금씩 달라 보이는 크기 비례를 감안한다면 시선거리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는 있다. 여기서는 보는 이의 시점이 화면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것 같다. 만약 시선거리를 멀리 잡았더라면 그림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의 키가 죄다 비슷비슷해 보였을 것이다.

그림은 가로 세로가 정방형에 가깝다. 크다곤 볼 수 없는 규격이지만 작품의 형태에서부터 기하학적인 원리를 숨기기 좋아했던 델라 프란체스카의 취향이 드러난다. 그런데 델라 프란체스카는 그림에서 왜 원근법적 공간구성을 짜지 않은 걸까.

혹시 주제와 재현형식 사이에 무슨 상관이 있었던 건 아닐까. 외양간 뒷담을 비켜 세워서 예수 탄생의 기적을 보는 이들에게 삼가는 자세를 취하게 하고, 간이 지붕을 아래로 젖혀서 기적의 장소에 다가서는 걸음을 늦추려는 했던 건 아닐까.
 

(그림) 담과 지붕 이용해 소실점 구하기


그림에서 기하학적 단서는 담과 지붕이다. 이 둘을 갖고 그림에서 보는 이의 시점에 대응하는 소실점을 구해보자. 지붕의 상하 경계선 ①과 ②를 오른쪽으로 연장해서 접점 a를 구하고, 좌우 경계선 ③과 ④를 위쪽으로 연장해서 접점 b를 구한다. a를 지나면서 화면의 바닥선과 평행하는 수평선 c를 긋고, b를 지나는 수직선 d를 그어서 c와 d가 만나는 접점 e를 구한다.

이때 e가 소실점이다. e가 그림 안에 들어있지 않고 화면 경계 바깥으로 빠져나가므로, 관찰자는 작품을 정면으로 보지 말고 비스듬히 봐야 원근 구조가 제대로 살아난다.

화가가 왜 이런 구도를 취했는지에 대해 해석이 구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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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04월 과학동아 정보

  • 노성두 미술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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