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들은 어린아이가 마치 레고 블록으로 집을 만들듯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물질을 만들어서 나노세계를 탐색하고 있다. 이 속에는 어떤 비밀이 숨어있는 것일까. 현재의 기술 한계나 환경 문제를 풀 열쇠가 있을지도 모른다.
어렸을 때 미술시간에 조각칼로 목판화에 집, 나무, 그리고 사람얼굴을 그렸던 적이 있다. 더러 손재주가 좋은 친구는 빨래비누로 비행기, 새 등을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비행기나 새를 어렵게 만드는 것 같지 않다. 사탕을 사면 그 속에 조립식 로봇이 딸려 있고, 장난감 가게에서 흔히 살 수 있는 레고 블록으로 비행기, 새는 물론 커다란 집도 만든다. 심지어 보물섬이나 우주정거장과 같은 영화의 한 장면을 연출하기도 한다.
요즘 과학기술 분야에서도 이와 비슷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과거 반도체나 트랜지스터 기술은 주로 커다란 실리콘 결정에 금을 긋거나 잘라서 사용하는 것이었다. 마치 빨래 비누를 깎았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원자나 분자를 화학적으로 조립해 작은 크기의 나노물질을 만들어내는 방식(bottom-up)이 기존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방법으로 제시되고 있다.
색깔은 물질 고유 특성 아니다
bottom-up 방식에 특히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는 분야는 화학. 이미 화학자들은 원자가 수십-수천개 이하로 구성된 분자, 즉 nm 크기에 가까운 작은 물질과 수십억개 이상의 원자들로 구성된 ㎛ 이상 크기의 물질(일반적으로 벌크 물질이라고 한다)을 만들어 실생활에 유용하게 사용하는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화학자들은 이 새로운 방식으로 어떤 나노물질을 만들었을까. 이를 통해 어떤 새로운 특징을 발견할 수 있었을까.
1993년에 미국 MIT 화학과 바웬디 교수 연구팀이 카드뮴(Cd)와 셀렌(Se)으로 구성된 수nm 크기의 반도체 나노입자가 크기에 따라 색깔이 변화하는 현상을 발견했다. 이것은 색이 물질 고유의 특성이라는 기존의 과학상식을 벗어나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둥근 모양을 갖는 반도체 입자의 크기를 1.2nm에서 12nm로 크기를 달리함에 따라 빨간색에서 파란색까지 무지개색이 변화하는 순서로 색깔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왜 나노물질은 이처럼 신기한 특성을 가지는 것일까. 나노물질은 입자의 수가 수억개 이상으로 이뤄진 벌크 물질과 몇개의 원자로 구성된 분자의 중간 형태라는 점을 생각하면 쉽게 설명될 수 있다. 원자나 분자 내의 전자는 연속적인 에너지 값을 가지지 않는다. 즉 띄엄띄엄하게 불연속적인 전자 궤도를 가진다. 그러나 원자나 분자가 많이 모이면 궤도간의 간격이 점점 작아지면서 결국 ㎛ 정도가 되면 연속적인 에너지 값으로 변한다. 한편 약 1-20 nm 정도의 크기를 갖는 나노물질의 경우에는 분자와 벌크물질의 성질을 동시에 갖게 돼, 불연속적인 에너지 준위와 연속적인 에너지 준위를 동시에 가지게 된다. 이때 나노물질의 크기가 점점 작아질수록 에너지 준위는 분자를 더욱 닮게 돼, 더 큰 불연속적인 에너지 준위를 갖게 된다. 결국 나노물질의 크기가 작아지면서 불연속적인 에너지로 변화해, 에너지 준위 간의 차이(밴드갭)가 증가한다. 물질이 빛을 흡수한다거나 발광하는 것은 전자가 채워져 있는 준위와 전자가 비어 있는 에너지 준위 간의 전자 이동에 의해서 나타난다. 따라서 나노물질에서 발광하는 색은 크기가 작아짐에 따라 더 큰 에너지 영역인 푸른색 영역으로 변화하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크기에 따라 밴드갭의 크기가 바뀌는 것을 ‘양자크기효과’라고 한다.
크기에 따라 다른 빛을 내는 나노물질의 성질을 이용한다면 한 물질로 모든 색을 내는 백색발광 디스플레이 장치를 만들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나노입자 하나가 한 비트
한편 최근에는 필자의 연구팀이 화학적 합성의 반응조건을 변화시킴에 따라 여러 가지 다른 모양의 반도체 나노결정을 얻을 수 있음을 밝혀냈다. 초기 나노물질은 구 또는 육방입체 형태를 띠었다. 그러나 연구팀은 열분해 반응으로 수소분자(H2)와 같이 선형구조를 갖고 있는 나노막대, 물분자(H₂O) 같은 굽은 형의 나노꺽쇠, 암모니아분자(NH₃)와 같은 피라미드 구조의 삼각다리, 그리고 메탄분자(CH₄)와 같은 정사면체 구조를 가진 사각다리 등 다양한 모양의 나노물질을 만들었다(그림1). 이들은 구성입자가 같지만 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모양에 따라 다른 대칭성을 갖게 되고, 이로 인해 물질의 광학적·전기적 성질이 달라진다.
또한 이런 구조의 나노물질로부터 새로운 광학 현상이 나타남을 버클리대 알리비사토스 교수 연구팀이 발표했다. 선형구조를 갖는 나노막대의 경우, 단축의 길이는 10nm 이하로 양자크기효과를 나타내는 범위에 속하지만, 장축의 길이는 수십nm 이상이기 때문에 양자크기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이로 인해 특정한 방향의 빛을 흡수하는 편광 현상이 나타난다. 이처럼 구와 달리 방향에 따라 다른 대칭성으로 인해 나타나는 현상을 이용해 미래의 초미세 양자 레이저, 광학기록매체 등으로 응용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반도체뿐만 아니라 자성금속 나노입자 또한 매우 특이한 자기적 성질을 나타낸다. 크기가 작아지면서 어떤 크기(일반적으로 10-1백nm)에 도달했을 때 자기적 성질이 최대가 되는 현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최근 필자의 연구팀, 서울대 현택환 교수 연구팀, 그리고 머레이 박사를 비롯한 IBM 연구팀은 자기적 성질이 극대화되면서 동시에 크기가 매우 작고 균일한 크기의 구 형태 자성금속 나노입자를 합성하고 이들의 규칙적인 배열을 통해 이 입자 하나하나를 각각 한개의 비트로 사용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그림2). 이런 자성 입자는 크기가 수nm로 주로 코발트나 코발트와 백금의 합금형태로 이뤄진다. 자성금속 나노입자를 규칙적으로 배열해 하드디스크 같은 저장매체에 비트로 사용할 수 있게 되면 현재의 저장기록 매체인 자성 박막의 한계를 넘어서 1백Gbit/인치² 이상, 나아가서는 테라(10³Gbit)급 정보기록매체에 획기적인 돌파구를 제공해줄 수 있다.
작아질수록 강력해지는 촉매
이처럼 반도체나 자성 나노입자는 크기에 따라 새로운 전기적, 광학적, 자기적 성질을 나타낸다. 큰 덩어리에서 작은 덩어리로 쪼갬에 따라 물질의 전체 표면적은 급격히 커지게 된다. 이것은 나노물질을 새로운 용도로 활용할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만약 물질의 표면에서만 촉매반응이 일어나는 경우라면, 물질의 표면적 증가는 촉매활성을 높일 수 있다. 이런 예로는 심각한 환경 오염물질인 유기 할로겐을 제거하는데 나노크기의 촉매가 이용되는 것.
살충제 등으로 사용되는 유기 할로겐 화합물이나 쓰레기 소각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이옥신 등은 독성이 강하고 자연분해가 어려워 심각한 환경오염원이 되고 있다. 따라서 이런 환경오염원을 산화시켜 무해한 물질인 이산화탄소와 염화수소 기체로 분해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이 이뤄졌다. 그 결과 황화몰리브덴(MoS₂)이나 산화티탄(TiO₂) 나노물질을 이용한 광촉매 분해반응이 개발됐다.
그러나 촉매반응은 일반적으로 표면에서만 일어나기 때문에 많은 양의 오염물질을 분해시키기 위해서는 다량의 촉매가 필요하다. 이때 새로운 형태의 나노물질을 사용하면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즉 크기가 작은 나노물질을 사용하면 표면적이 더 커지기 때문에 양자크기효과에 의한 촉매의 전기적 상태가 바뀌어 촉매활성이 더욱 배가된다. 가령 입자 크기를 16nm에서 8nm로 줄일 경우에 활성이 7배 이상 증가한다. 이런 나노촉매는 현대사회의 큰 문제 중 하나인 환경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으로 부각되고 있다.
지금까지 제시한 나노기술은 나노물질을 화학적으로 먼저 제조하고, 이것들을 벽돌 삼아 조합해서 실질적인 나노장치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반해 아예 벽돌인 나노분자만으로도 극미세 나노장치를 구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시되고 있다. 즉 분자차원의 나노장치를 만들 수 있다는 말이다.
이는 특정 화학분자들이 전기나 빛과 같은 외부자극에 따라 형태와 위치 등이 바뀌는 성질을 갖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이런 특성을 이용해 미래의 분자나노장치를 만들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작은 트랜지스터
실제로 최근에 화학분자가 스위치, 도선, 트랜지스터와 같은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음이 알려졌다. 로스앤젤레스 소재의 캘리포니아대 히스 교수 연구팀은 지난해 두개의 고리형태 분자를 이용해 전기신호에 따라 열기와 닫기가 가능한 분자스위치를 개발했다.
이 분자스위치에서 한개의 고리분자는 (+) 전하를 띠고, 다른 고리분자의 일부분과 맞물려 있는 안정적인 상태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두번째 고리분자의 일부분에 전자를 빼면, 그 부분이 (+) 전하를 띠게 된다. 그러면 원래부터 (+) 전하를 띠는 첫번째 고리분자와의 전기적인 반발력 때문에 고리가 회전한다. 이때 다시 전자를 주입시켜주면, 다시 원상태로 돌아온다(그림4). 이처럼 외부에서 전자를 넣고 빼줌으로써 고리 모양이 바뀌는 것을 이용해 스위치의 열고 닫는 기능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버클리 소재 캘리포니아대 알리비사토스 교수, 맥퀸 교수, 하버드대 박홍근 교수 등 공동 연구팀이 지름이 0.7nm인 60개의 탄소로 이뤄진 축구공 형태의 ${C}_{60}$ 화합물인 풀러렌을 이용해서 트랜지스터를 개발했다. 전극간의 거리가 약 1nm로 현재 한개의 전자로 구동되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노 트랜지스터다.
구동 방식은 (+), (-) 전극 사이에 풀러렌을 고정시켜 놓는다. 그리고 게이트에 특정 전압 이상을 가하면 고정돼 있던 풀러렌이 전극 사이에서 진동하게 된다. 이때 풀러렌이 (-) 전극에 가까이 다가가는 어느 순간에 (-) 전극의 전자가 풀러렌으로 이동한다. 양자 터널링 효과가 일어난 것이다. 또한 풀러렌이 (+) 전극에 가까이 가면, 전자는 다시 (+) 전극으로 이동한다. 이러한 장치를 단일전자 트랜지스터라고 하는데, 즉 전자 하나를 조절할 수 있다는 트랜지스터이다.
현재 이 극미세 장치는 아직 영하 1백20℃의 낮은 온도에서만 구동되고 있다. 따라서 실온에서 사용가능한 트랜지스터에 대한 연구가 요구되고 있다.
앞으로 나노과학은 얼마나 발전할까. 지금까지 과학자들이 발견한 나노물질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노벨 물리학수상자인 리차드 파인만이 ‘바닥세계에 빈 공간이 많다’고 말한 것처럼 나노세계에는 아직 우리가 모르는 수많은 과학과 기술적 가치가 존재할 것이다.
나노과학은 이제 막 탐색에 들어선 새로운 분야이다. 때문에 이 분야에 대한 연구는 우리가 당장 사용할 수 있는 물질을 만들어내는 공학의 개념보다는, 좀더 기본적인 원리부터 탐구하는 물리, 화학 등 기초과학을 통해 혁신적인 발전이 이뤄지리라 생각된다. 지금까지 과학의 발전은 우리가 상상도 못했던 것을 계속해 넘어왔다. 나노과학은 새로운 미래를 여는 과학혁명을 일으킬 수 있으리라 예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