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컷 혼자서 새끼를 기르는 동물, 암수가 협력하는 동물, 수컷이 맡아하는 동물 등 동물세계의 새끼기르기 방식은 각양각색.
어미는 위대하다
생물학에서는 알을 낳는 쪽을 암컷이라 하고 그 알에 정자를 주는 쪽을 수컷이라고 한다. 포유류는 거의가 알을 낳지는 않는다. 그러나 암컷의 체내에서 난자라는 단세포 처음에 만들어진다. 그 암컷의 단세포와 정자라는 수컷의 단세포가 결합하여 하나의 생명체를 이루게 된다. 그 생명체는 차츰 자라다가 어느 기간이 지나면 암컷의 몸밖으로 나온다. 그런 뒤에도 어미는 강한 본능으로 새끼를 보호하면서 기른다. 그 모습은 자연의 모습 바로 그것이다. 거기에서 인간은 사리사욕이 없는 위대한 어미모습의 이상을 느낀다.
새끼기르기에 열중하는 수컷들
동물의 세계에서는 수컷의 역할이 새끼기르기에 대해 전혀 모른척하는 것과 암수가 같이 맡는것, 완전히 수컷이 도맡아 하는 것 등 여러가지가 있다. 그러나 역시 알을 낳지 않는 수컷이 새끼를 기르는 예는 그렇게 많지 않다. 동물의 세계에서 수컷이 새끼를 기르는 것을 보면 어딘가 부자연스럽고 또 비장감마저 느끼게 되는 것은 인간의 시각에서 보기 때문일까. 그러나 인간 사회에서도 아버지가 아기기르기에 더이상 무관심할 수 없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암수가 함께 새끼를 기르는 동물
집단으로 무엇을 하면 공통된 부분에 낭비가 없어지고 에너지도 절약하게 된다. 만약 인간이 집단보육을 하게 된다면 그런 합리성이나 수고를 던다는 발상에서 시작하라 것이다. 그러나 동물은 그런 발상은 전혀 없다. 가까운 혈연이므로 힘을 모아 일한다는 본능으로 하는 것이다.
애정과 지성으로 새끼를 기르는 동물
동물전체를 보면 새끼를 기르는 스타일이 여러가지 있으나 그 속에 일정방향으로 향한 '진화'를 볼 수 있다. 그러나 개개의 종에서는 일단 스타일의 정해지면 거의 변하지 않고 몇만년이고 되풀이하여 자손들이게 전해진다. 인간은 지성이 있으면서도 이 문제에 관한 한 낮은 다른 동물에 비하여 아직 안정된 육아법이 확립되어 있지않다. 오히려 여러가지 다른 견해들이 '자연스러운' 육아를 방해하고 있다. 동물에서 배우고 동물의 수준을 초월한 육아법을 확립하기 위해 인간은 무엇을 기반으로 해야 좋을 것인가.
지금까지 테마별로 동물의 새끼기르기를 살펴 보았는데 이번에는 조류와 포유류로 나누어 살펴보자.
먼저 조류부터 살펴보면 두루미 암수의 협력체제를 보았지만 조류는 부부가 협력하지 않으면 새끼를 제대로 길러낼 수 없게 되어 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알을 낳는데 있다. 암컷이 먼저 영양분이 많은 큰 알을 낳는다. 알은 적이 항상 노리는 먹이가 되기 쉬우며 급속하게 발육시키려면 따뜻하게 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어미는 알을 낳은 장소에서 떠날 수 없게 된다. 조류는 몸이 작은 셈치고는 대개 높은 체온을 유지하고 있으므로 거의가 절식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수컷이 먹이 나르기를 전담하거나 암수가 서로 교대하거나 한다.
이에비해 포유류는 새끼를 밴어미가 이동을 할 수 있고 수컷이 도와주지 않아도 혼자서 해낸다. 그러므로 수컷은 가까이 온적을 쫓아내거나 먹이를 잡거나 하는 일을 담당한다. 이런 수컷의 일은 잠시도 떨어질 수 없는 새끼 기르기에 비하면 한가한 편이다. 또 집단이 아니고 단독생활을 하는 포유류의 수컷은 교미 때가 아니면 거의 하는 역할이 없다.
이런 여러가지 동물의 새끼기르기 스타일 속에서 공통점을 찾아보면 역시 어미의 '애정'일 것이다. 이 애정은 우리 인간의 것과는 기반이 다를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개체와 개체가 어떤 접촉을 할 경우 거기에는 자연스러운 커뮤니케이션이 있게 된다. 그것이 인간의 언어로 '애정'이라고 표현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애정은 다음 세대에도 분명히 전달되어 간다. 자연스러운 '어미의 애정'으로 길러진 동물의 새끼들은 꼭 같이 자신이 낳은 새끼를 깊은 애정으로 길러낸다.
동물이 인간과 마찬가지로 애정으로 새끼를 기른다고 하지만 거기엔 지성이 동반하고 있다고는 볼 수 없다. 들새는 자신이 낳은 알보다 배나 큰 두견새의 알이 둥지속에 있어도 그걸 분간 못하고 품어 부화시킨다. 그리고 두견새 새끼는 작은 들새새끼를 모두 둥지 밖으로 밀어내 죽게 한다. 그런 뒤에도 두견새 새끼가 제 새끼라고만 생각하고 엄청나게 먹어대는 그 두견새 새끼에게 먹이를 부지런히 날라주며 열심히 기른다.
큰개미는 검은 조팝나비의 유충을 속아서 기르는 것이 아니고 유충의 등에서 나오는 꿀을 얻기 위해 개미집으로 데려오는 것이다. 큰개미는 애정을 가지고 검은 조팝나비유충을 기르는 지도 모르지만 지성이 있는지 여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있다고 하면 곤충의 지능수준에서 지성으로 보였을 뿐인지 모른다.
영장류의 거의 대부분은 나무위에서 지내면서 나무가지에 앉았다 섰다하는 일이 많으므로 가슴 위쪽에 젖꼭지가 있는 것이 새끼에게 물리기에 편리하다. 들소나 사슴은 항상 맹수를 경계해야 하여 앞다리 쪽에서 새끼가 어정거려서는 급할 때 재빨리 행동하는데 방해가 되므로 뒷다리쪽에 젖꼭지가 있다. 박쥐는 거꾸로 매달린 어미의 가슴 위쪽에 있는 젖꼭지에 새끼도 역시 거꾸로 된 자세로 달라붙어 젖을 먹는다.
치타와 같은 육식맹수는 새끼에게 먹이동물을 사냥하는 기술을 익혀줘야 하며 지능도 어느정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본능적인 애정과 자연 상태의 것으로 지성적이라고 할 정도는 못된다.
인간은 지능이 높아져 지성이라는 것까지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지성이라는 것은 언제든지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혜 또는 지능 수준에서 수시로 정지한다. 동물은 자신의 최대 능력을 발휘함으로써 아름다우며 그런 상태라서야 살아나갈 수 있다. 인간은 지성을 발휘하므로써 아름답고 충실하게 살아나갈 수 있을 것이다. 지성을 발휘하지 않는 인간은 아름답지 않으며 언젠가는 멸절되어 버릴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의 육아는 애정을 바탕으로 지성을 충분히 발휘하여야 인간으로서의 가치가 갖춰진 인간으로 길러질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