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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백두산에서 만나는 우리꽃 기행

가장 친숙한 산이면서도,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민족의 영산 백두산. 산 중 최고라는 의미에 걸맞게 백두산은 그만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백두산의 아름다운 우리꽃 속으로 향기로운 여행을 떠나보자

비행기가 하늘을 난다. 바다를 건너고 고작 한숨도 되지 않은 짧은 시간이 지나면 다른 세상에 도착한다. 중국의 조선족 자치주인 길림성 연길시. 타임머신을 타고 어린 시절로 되돌아간 듯한 착각이 든다.

붉은 5성홍기가 펄럭이는 공항을 빠져나가면, 떠들썩한 길거리가 나온다. 분주히 오가는 많은 사람들 속에 모든 것이 흥미롭다. 자전거를 탄 사람들의 홍수 속에서 그 사이를 잘도 빠져나가는 택시며, 경음소리 그리고 서울에서 느끼지 못했던 추위까지….

2시간 전 서울의 거리는 신록의 햇살로 가득찬 봄이었다. 그러나 여기는 아직 겨울의 끝자락에 놓인 듯한 착각이 들 정도의 추위가 느껴진다.


우리꽃 기행 경로.


수십년 찾아도 보기 힘든 깽깽이풀

차를 타고 연길시를 빠져나간다. 백두산으로 향하는 길목으로 들어선 것이다. 처음 연길시에 도착하면, 백두산에 다 온 것으로 착각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은 우리나라 남북한 전체 면적보다 34배나 크다. 백두산을 가기 위해서는 아직도 여러 시간을 차로 달려야 한다. 서울에서 대구까지의 거리쯤 될 것이다.

연길시에서 두시간을 달리면 안도현(규모가 우리나라의 군에 해당)에 도착한다. 안도현에서 오토바이를 빌려 백두산을 향하는 것도 색다른 여행의 맛이 있다. 가는 도중에 좀더 많은 야생화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안도를 벗어나 굽이 길을 돌면 커다란 저수지가 나타난다. 저수지 주위에 울창한 낙엽송 숲에 들어가면, 이른 봄 햇살을 맞으며 활짝 피어 있는 꿩의바람꽃을 만날 수 있다. 10cm 정도 되는 작은 키에 가녀린 꽃줄기를 세운 바람꽃. 아직 이른 봄바람에 하얀 꽃잎을 떨고 있는 나약한 모습은 오히려 짙은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안도를 떠나 다시 두시간이 지나면 동청이라는 조그만 시골동네에 다다른다. 동청은 낮은 구릉지대와 산으로 이루어진 조그만 분지인데 구릉지에는 군데군데 얼음이 박혀 있다. 이곳에 있는 동청소학교(우리나라의 초등학교에 해당)의 뒷산에는 작지만 아름다운 식물원이 있다.

소학교 뒷산의 양지에 있는 숲은 정신을 잃게 만들 정도다. 깽깽이풀이 지천으로 군락을 이룬 채 가득 피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멸종이 돼 수십년 동안 야생화를 찾아다니는 전문가들도 보기 힘들다는 깽깽이풀. 무엇보다 그 아름다운 보라색 꽃물결은 보는 사람의 혼을 빼앗아 버린다. 깽깽이풀 주변으로 꿩의바람꽃, 구름미나리아재비, 할미꽃 등이 각각의 아름다움을 뽐내며 피어있다.

산림이 울창한 계곡을 들어서면 노란 세상이 반긴다. 이번엔 참동의나물이 지천으로 피어 나뭇가지사이로 흘러 들어온 햇살에 노란 꽃웃음을 흘리고 있다. 별천지라는 말이 여기를 위해 만들어졌다고 생각될 정도다.

산을 내려오는 길에서 또한번 탄성을 지른다. 길가 모래언덕에 분홍할미꽃이 고개를 숙인 채로 수줍은 미소를 짓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할미꽃은 검붉은 자주색인데 반해 분홍할미꽃은 분홍색으로 키가 20cm 가량 된다. 할미꽃은 꽃잎이 떨어지고 나면 고개를 들어 하얀 머리를 풀어 헤치고 씨앗이 돼 바람을 따라 멀리 하늘로 날아오른다. 그리고 다른 장소에 내려 싹을 틔우고 번식하는 머리가 좋은 식물이다.


단아한 모습의 흰제비란은 습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수채화 물감을 뿌린 듯한 습지

멀리 뭉게 구름이 피어오른다.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하늘은 금방이라도 소나기를 뿌릴 듯하다. 계곡 물은 “쏴” 소리를 내며 기분 좋게 흐른다. 우리나라의 여름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시원한 온도지만 배낭을 둘러맨 등줄기에서 흥건한 땀이 흐른다.

삼도를 향하는 길은 비포장으로 군데군데 승용차로는 지나지 못할 정도의 웅덩이와 흙탕물이 있다. 촌락을 지나면 꼬불꼬불한 길이 나오고 다시 넓은 습지가 나타난다. 습지는 온통 야생화로 덮여있다. 파란색, 자주색, 보라색, 붉은색, 흰색으로 수채화 물감을 뿌린 듯하다. 일반 초원 같아 보이는 습지에 발을 들여놓으면, 금새 신발은 물이 흥건해진다. 풀 포기를 징검다리 삼아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가지만 울렁거리는 땅은 이내 발을 진흙뻘 속으로 빨아들인다. 다시 풀 포기를 밟고 앞으로 나간다.

“앗, 따가워!” 진흑뻘에 빠지지 않기 위해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상황에서 가는잎쐐기풀을 움켜쥔 것이다. 이내 팔목에는 붉은 반점이 일고 가려움을 동반한 따가움이 정신을 차리게 한다. 이곳 습지에는 잉크 빛의 큰 꽃무리가 피어있다. 바로 꽃창포이다. 손바닥 크기의 꽃창포가 이렇게 넓고 많이 핀 광경은 아주 드물다. 꽃창포를 이 지역사람들은 잉크꽃이라고 부르고, 짙은 보라색의 꽃잎을 염색에 사용하기도 한다. 꽃의 모양은 붓꽃과 비슷한데, 꽃이 피기 전 꽃봉오리가 먹을 쿡 찍어놓은 듯한 붓을 닮았기 때문에 잉크꽃이라 한다. 잎은 칼과 같이 생겼고 바깥쪽 꽃잎은 3장이 혓바닥처럼 퍼졌고 안쪽 꽃잎은 닭벼슬 모양으로 서있다. 특히 바깥꽃잎의 안쪽에 물들어 있는 노란 무늬가 아름답다.

또 습지에는 노란색의 큰금매화, 각시원추리, 흰색의 흰제비란, 바디나물, 자주색의 숫잔대, 보라색의 긴산꼬리풀, 붉은 색의 삼쥐손이 등이 화려하면서도 수수하게 온갖 색을 이루며 피어있다. 삼도를 향하는 길은 이렇게 꾸불꾸불한 산지와 습지 평원이 반복돼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한다.


북한 변경을 향한 길에 있는 원시림. 전나무 하나는 몇사람이 둘레를 감쌀 수 있을 정도로 크다.


특별한 사람에게만 모습을 보여준다

백두산의 아래 마을은 이도백하다. 연경을 지나 산을 돌고 구릉을 지나 도착한 이도백하에선 백두산을 찾는 한국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이미 백두산을 다녀온 사람과 오를 사람들은 저마다의 느낌과 기대를 주고받으며 반가움을 표시한다.

백두산 천지는 특별한 사람에게만 그 모습을 보여준다는 말이 있다. 어떤 사람은 한번 올라도 마침 구름이 걷혀 천지의 장관을 보고, 또 어떤 사람은 열번을 올라도 맑은 천지를 보지 못하기도 한다. 날씨가 매우 좋아 오늘은 맑게 개인 장관을 보겠구나해도 막상 천지에 오르면, 구름이 몰려와 감추는 경우가 많아 천지의 신비를 더해준다.

날씨가 좋지 않다면 맑은 날을 기다리면서, 가까운 주변을 구경해도 좋다. 한아름이 넘는 전나무 숲이 끝없이 펼쳐진 사이로 북한 변경을 향한 길이 나있다. 대체로 평지인 이 길은 간혹 엄청나게 큰 나무를 실은 트럭만 지나갈 뿐 사람의 흔적은 찾기 힘들다. 그러나 길 언저리엔 수많은 우리꽃 야생화가 찾는 이를 반긴다. 산림습지를 지날 때면 우리나라에선 볼 수 없는 산부채며 능수쇠뜨기, 물속새 등이 반기고 벌채돼 나타나는 관목지대는 월귤과 들쭉 그리고 물싸리가 모여 있다.

변경에 거의 다다르면 하늘이 열리고 넓은 초원과 관목지가 나타난다. 우리나라에선 가을이나 돼야 피는 쑥부쟁이가 자주빛의 꽃송이를 바람에 나부낀다. 들쭉을 한움큼씩 따서 입안으로 가져가면 새콤달콤한 맛을 느낄 수 있다. 혓바닥은 가지색이 돼 버리지만….

아니, 이건 무엇인가? 두장의 잎 사이로 20-30cm 정도의 꽃대를 올리며 피어난 분홍색의 아름다움. 손바닥난초가 틀림없다. 사진에서만 볼 수 있는 아주 희귀한 식물이다. 손바닥난초는 그 뿌리가 꼭 아기들의 통통한 손을 쫙 편 모양이다.

또 노란 바람개비도 보인다. 약간의 습기가 있는 곳에는 큰물레나물이 피어 있다. 큰물레나물은 다섯장의 꽃잎 모양이 바람개비 또는 물레와 닮아서 이런 이름을 가지고 있다.

물 속을 기듯 자라는 개통발이는 벌레를 잡아먹는 식충식물이다. 이 식물 역시 우리나라에선 볼 수 없다. 벌목장의 풀밭에 많은 끈끈이주걱도 식충식물이다. 잎이 계란모양으로 표면에 털이 있고 끈끈한 점액이 있어 작은 벌레가 붙으면 움직이지 못하는데, 털에서 분비되는 소화액이 벌레를 소화시키는 특이한 식물이다.

나무가 없는 양지에서 잠시 쉬려 해도, 또하나의 앙증맞은 식물이 찾는 이를 가만 두지 않는다. 약간 노란색 또는 연분홍, 그리고 가끔은 흰색을 가진 이 꽃은 매발톱을 닮았다. 이 때문에 이름이 노랑매발톱이다. 바깥 꽃잎의 뒷부분이 매가 토끼를 낚아 챌 듯한 발톱의 모습으로 꽃을 피운다. 그렇게 하루가 저문다.

아직 날도 밝지 않았는데 몇번이고 백두산 쪽의 하늘을 본다. 그리고 천지의 모습을 보여 달라고 빈다. 그러나 동이 틀 무렵 천지쪽의 하늘은 검은 먹구름으로 덮여 있다. 천지를 볼 수 없다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장백폭포에서 내려오는 길을 따 라 펼쳐 있는 노란곰취의 물결.


달걀 삶을 수 있는 온천수

백두산 관광구역이 시작되는 매표소 앞이다. 대문 같은 일주문의 현판에는 장백산(長白山)이라는 한문으로 된 큰 글씨가 써있다. 백두산의 절반은 중국에 귀속돼 있다. 중국인들은 백두산을 장백산이라고 부르는데, 백두산과 의미와 비슷한 산중의 왕이란 뜻이다. 입장료를 낸 후 승용차로 한참 들어가야 백두산의 입구에 다다른다. 이미 해가 떠올라야 하는데 해는 떠오르지 않는다. 백두산의 일출을 보기 위해 새벽 일찍 올라갔다 온 사람들이 해는 못보고 소나기만 맞았다며 아쉬워한다. 사실 백두산의 일기는 매우 변덕이 심하다. 일출을 보기 어렵고, 천지도 보기 힘들 수도 있다. 날씨가 좋지 않기 때문에 장백폭포로 발을 돌린다.

장백폭포로 오르는 입구의 땅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난다. “앗, 뜨거워!” 무심결에 손을 대보면 위험하다. 온천이다. 백두산은 화산활동을 중지했지만 아직까지 뜨거운 물을 뿜어 올리는 활화산이다. 이곳에서 볼 수 있는 재미나는 광경. 물이 흐르는 곳에 달걀을 삶아 팔고 있다. 솥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흐르는 물을 막아 계란을 담그면 달걀이 자동으로 삶아진다.

아주 작게 들리던 폭포소리가 강을 건너는 구름다리에 오르면 엄청난 굉음으로 속을 시원하게 해준다. 폭포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으로 올라서 말로만 듣던 장백폭포의 위용을 본다. 더욱이 장백폭포의 위 부분은 구름에 쌓여 있어, 마치 하얀 물줄기가 하늘에서 내리는 듯한 착각을 갖게 한다.

이 순간 하늘이 열렸다. 햇볕이 난 것이다. 장백폭포의 떨어지는 물결이 다시 구름이 되듯 퍼지는 부분에까지 태양은 빛을 내리고 있다. 아직 위쪽에는 여전히 구름이 덮여있다. 여기 저기서 아름다움에 환성이 나온다.

지금까지 안개에 가린 초목들의 잎과 꽃에는 영롱한 이슬이 반짝이고 장엄한 폭포소리와 함께 일제히 구슬소리를 낸다. 사실 이슬이라기보다 안개비라 해야 맞다. 잎은 왁스를 바른 듯한 광택이 있고 잎 끝에 맺힌 방울방울의 구슬들….

투구를 쓴 장병의 눈에서 눈빛이 반짝인다. 각시투구꽃이 숲 가장자리를 따라 도열해 폭포를 향해 일제히 경례를 올리고 있는 것이다. 투구꽃은 로마시대 장병들의 투구모양을 하고 보라색 꽃을 피운다. 갈색의 뿌리에서 보통 한줄기를 올려 1-3개의 꽃을 피우는 아주 예쁜 야생화이다. 폭포를 내려오는 오솔길 좌우에는 잎을 채소로 이용하는 화살곰취, 곰취 등의 노란꽃이 길을 밝힌다. 그리고 나리(백합)가 우리나라가 원산지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일깨워주는 날개하늘나리가 너무도 당당히 숲 속을 지키고 있다.


장백폭포의 장관. 구름 때문에 물줄기가 마치 하늘에서 쏟아지는 듯한 착각을 들게 한다.


천지가 보이다

차를 타고 꼬불꼬불한 길을 돌아 백두산의 서쪽 능선을 넘으면, 지금까지 보지 못한 광경이 펼쳐있다. 끝없이 펼쳐진 침엽수림대 저 멀리 내두산이 보이고 온 천지가 밀림으로 지평선에 닿아 있다.

차는 한참을 굽이돌아야 천지 바로 아래에 도착한다. 천지는 구름에 싸여 자신의 모습을 쉽게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폭포 쪽에서 올라오는 바람도 구름과 섞여 함께 오르고 있다.

아! 백두산! 천지를 보지 못할 지라도 그렇게 그리던 백두산에 오른다. 장군봉에 올라 땅에 손을 대고 그 뿌듯한 백두산의 정기를 느낀다. 그리고 절을 하듯 입도 맞추어본다. 차가운 느낌의 감동.

그리고 몸을 일으켜 세울 때 누군가 외친다. “와! 보인다. 천지가 보인다.” 그렇게 천지는 자신의 속내를 보여준다. 반대편 북한쪽의 천지안쪽 병풍처럼 둘러선 기암절벽, 기슭에 난 파란 풀들 그리고 쪽빛으로 빛나는 천지의 호숫물.

차안에서 하늘이 걷히기만 기다리던 많은 사람들이 환성을 듣고 달음박질로 올라올 때쯤 다시 폭포가 있는 곳과 그 반대편으로부터 하얀 안개구름이 뱀처럼 능선을 감아 올라 천지는 이내 하늘 속으로 사라진다. 사진 한장을 남기지 못해도 아쉬워 할 필요가 없다. 구름 속에서 기념촬영을 해도 마음 속에는 그 아름다움이 뚜렷이 남겨 있기 때문이다. 걸어서 내려가는 길엔 꽃방석이 펼쳐 있다. 자주색의 하늘매발톱, 백두산에만 나는 키 작은 바위구절초, 난쟁이패랭이, 그리고 돌꽃들, 산용담, 두메용담, 오랑캐장구채, 구름국화, 가솔송, 또 이름만 들어도 예쁜 두메자운까지….

자주꽃방망이의 한무리를 지나 거의 다 내려온 곳에 좀자작나무의 잎이 바람에 뒹군다. 약간은 추운 느낌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니 하늘은 어느새 높고 푸른 가을로 와 있다.

복자기와 당단풍의 빨간 잎은 너무도 아름다워 오히려 눈물나게 한다. 나무껍질이 뽀얀 만주자작은 잎을 다 떨구고 전봇대 마냥 줄지어 서있다. 길을 오가는 소달구지와 농부들은 풍년의 가을걷이로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다. 다시 안도에 들러 나오는 길에 지나는 마을마다 옥수수며 볏가마니가 수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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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01월 과학동아 정보

  • 박공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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