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시칠리아섬의 팔레르모천문대에서 있었던 일이다. 망원경을 들여다보고 있던 천문대의 대장인 주세페 피아치(1746-1826)의 속눈썹이 겨울밤 찬 공기 속에서 파르르 떨렸다. 피아치가 이끄는 천문대에서는 수많은 별들의 위치를 이전보다 정확하게 관측하던 중이었는데, 우연히도 배경별들 사이에서 낯선 ‘별’ 하나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8등급이나 되는 이 ‘별’은 이미 알려진 별지도에도 나타나지 않는 천체였다. 20여년 경력의 베테랑 관측천문학자인 피아치는 직감적으로 뭔가 새로운 천체를 발견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자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 자그마한 흥분이 물결처럼 일렁거렸다. 이때가 지금으로부터 꼭 2백년 전인 1801년 1월 1일이었다.
다음날 다시 밤하늘의 똑같은 지역을 망원경으로 살피자 새로운 천체가 약간 움직인 것처럼 보였다. 진짜 움직인 걸까 하는 약간의 의문이 생겼지만 그 다음날 이런 의심은 말끔히 사라졌다. 문제의 천체가 실제로 배경별들 사이에서 자신의 위치를 옮겼기 때문이다. 이렇게 큰 위치의 변화를 일으킬 만한 것은 태양계 내에 있는 천체밖에 없었다. 태양계 내의 새로운 천체! 피아치는 처음에 윌리엄 허셜이 천왕성을 발견했을 때처럼 새로운 혜성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1월 24일 그는 자신의 믿음대로 새로운 혜성을 발견했노라고 다른 학자들에게 알렸다. 하지만 사실 이것은 보통 행성보다 작은 소행성이었다. 그것도 최초의 소행성인 세레스!
지금은 1801년 1월 1일 최초의 소행성을 발견했다고 쉽게 말할 수 있지만 피아치가 만났던 미지의 천체가 다름아닌 소행성이었음이 밝혀지기까지는 피아치 전후에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다. 이제부터 세레스 발견의 비화에 귀기울여보자.
행성의 거리를 나타내는 수열
현재는 수많은 소행성들이 화성과 목성 사이에서 띠(소행성대)를 이룬 채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하지만 케플러시대만 하더라도 이곳은 미지의 공간이었다. 독일의 요한네스 케플러(1571-1630)는 행성의 궤도가 타원이고 행성들의 공전주기와 거리 사이에 일정한 관계가 있음을 밝혔지만 행성들의 거리가 어떻게 결정됐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케플러도 무언가를 직감했던지 1596년 이곳에 새로운 행성이 있어야 한다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후 1751년 독일의 다니엘 티티우스가 태양으로부터 행성들의 거리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를 자세히 연구했다. 티티우스는 행성들의 거리 사이에 재미있는 관계를 발견했으며 화성과 목성 사이에 중요한 공백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런 연구는 티티우스와 동시대를 살던 독일 베를린천문대의 대장인 요한 보데(1747-1826)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보데는 티티우스가 발견한 이런 관계를 자신의 기본천문학교과서에 담아 출간했다. 이 관계는 ‘티티우스-보데의 법칙’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일종의 수열로서 행성들의 거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먼저 0, 3, 6, 12, 24, 48… 순서로 숫자배열을 만든다. 이들은 0을 제외하면 바로 앞의 수를 두배하면 그 다음 수가 나오는 관계를 가진다. 이런 배열에서 각각의 수에 4를 더하고 다시 10으로 나눈다. 그러면 0.4, 0.7, 1.0, 1.6, 2.8, 5.2…의 수열이 탄생한다. 놀랍게도 이 수열은 지구에서 태양까지의 거리(1AU)를 1.0으로 보았을 때 순서대로 태양에서부터 행성들까지의 거리와 일치했다(표). 단 태양으로부터 2.8AU 떨어진 곳에는 그때까지 알려진 행성이 없었다. 이런 점은 티티우스-보데 법칙의 맹점이기도 했다. 하지만 오히려 미지의 행성이 그곳에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게끔 유도해 수많은 천문학자들이 새로운 행성을 찾아 밤하늘을 헤매게 만들었다.
발견 후 6주만에 잃어버린 새 천체
1781년 3월 독일계 영국 천문학자인 윌리엄 허셜이 천왕성을 발견하자 이 숫자배열은 다시금 주목을 받았다. 토성 밖에서 태양을 돌고 있던 새로운 행성 천왕성이 바로 이 수열이 예측하는 바로 그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티티우스-보데 법칙은 보데의 육감 차원을 넘어 정말 타당성이 있는 사실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미스터리한 배열에 아무런 이유없이 행성들의 거리가 맞아 들어간다는 점이 더욱 미스터리했던 탓이다.
천왕성의 발견으로 태양계의 행성의 숫자는 7개로 늘었다. 이에 대해 유명한 독일의 철학자 게오르크 빌헬름 헤겔은 다른 사물, 예를 들어 인간의 머리에 존재하는 구멍의 수가 7개뿐이기 때문에 행성의 숫자도 7개뿐이라고 주장했다. 헤겔은 약간 황당해 보이는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화성과 목성 사이에 행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1801년 1월 이탈리아의 피아치가 새로운 혜성을 발견했다고 공표하자 많은 논란이 일어났다. 새로운 천체의 발견자인 피아치 본인은 새로운 혜성이라고 발표했지만 보데와 같은 천문학자는 새로운 행성이 출현했다고 굳게 믿었다. 드디어 화성과 목성 사이에 존재하는 미지의 행성이 모습을 드러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새 천체를 계속 관측할 필요가 있었다. 당시에는 충분히 여러 날을 관측해야 새 천체의 궤도를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아치는 새 천체를 2월 11일까지밖에 관측하지 못했다. 너무 과로했던 탓인지 심하게 아파서 관측을 중단해야 했다. 북유럽의 천문학자들도 새 천체의 발견 소식을 접하고 이 천체를 찾아보려 했지만 문제의 천체는 이미 태양 가까이 자신의 모습을 숨기고 있었다(물론 이런 사실은 나중에야 알게 됐다). 피아치의 발견이 허사가 돼버리는 순간이었다. 잃어버린 새 천체를 다시 찾기 위해서는 온하늘을 다시 뒤지거나 새 천체가 태양 둘레를 도는 궤도를 계산해 현재의 위치를 찾아야 했다. 온하늘을 다시 뒤지는 작업은 요원한 일이었고, 피아치가 발견할 때부터 관측을 중단할 때까지의 기간, 즉 6주의 관측기간은 당시로서는 궤도를 계산해내기에 턱없이 부족한 자료였다.
그곳에 존재했던 행성
이때 23살의 젊은 나이인 독일의 천재 수학자 칼 프리드히 가우스(1777-1855)가 구세주로 나타났다. 가우스는 한 신문에서 새 천체의 발견과 실종에 대한 기사를 읽고 큰 흥미가 생겼다. 그는 자신의 일은 제쳐두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해결사로 나섰다.
우선 가우스는 피아치가 관측한 6주간의 관측자료를 가장 큰 단서로 삼았다. 다음 전체 궤도(보통은 타원모양)에서 조그만 호에 대한 정보만으로도 전체 궤도를 계산해낼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냈다. 이것은 가우스법이라고 해서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그는 11월에야 자신의 계산을 끝냈고 문제의 천체가 6주 동안 처음 위치에서 3° 정도 이동했음을 구해냈다. 곧바로 독일의 폰 자크에게 결과를 알려줬다.
폰 자크는 피아치보다 먼저 새로운 행성을 찾으려고 국제협력을 주도했던 인물이었다. 즉 여러나라의 학자들에게 하늘의 일정부분을 할당해 서로 협력 하에 새 행성을 찾아 나서고자 했다. 물론 이탈리아의 피아치에게도 할당부분을 알리려 했는데, 바로 그 시기에 피아치의 발견이 이뤄졌던 것이다.
결국 폰 자크는 12월 마지막날 밤에 가우스가 정확히 예측했던 지점에서 문제의 천체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피아치가 처음 발견한지 1년만이었다. 물론 화성과 목성 사이에, 티티우스-보데 법칙이 예측하는 그곳에 위치한 미지의 행성 자격으로 말이다. 이때 새로운 행성의 이름은 피아치의 제안에 따라 세레스로 지어졌다. 세레스는 로마 농업의 여신이자 시칠리아 수호의 여신이었다.
한편 가우스는 세레스의 문제를 해결한 노력 덕분에 큰 명성을 얻었다. 1807년에는 괴팅겐천문대 대장에 임명돼 여생을 보내게 됐다.
1백만개 소행성의 우두머리
세레스는 티티우스-보데 법칙이 예측했던 바로 그 행성으로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행성으로 밝혀진지 얼마 안된 1802년 3월에 자격을 의심받게 됐다. 독일의 하인리히 올베르스가 별처럼 생긴 움직이는 천체를 또하나 발견했던 것이다. 이 천체는 다름아닌 소행성 팔레스였다. 학자들에게는 큰 충격이었지만 세레스는 최초의 소행성이라는 자격을 획득하는 순간이었다. 두개의 소행성이 발견되자 또다른 소행성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천문학자들은 열심히 새로운 소행성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1804년에 주노, 1807년에 베스타의 발견이 이어졌다. 그 다음 소행성을 발견하는데는 시간이 좀더 걸렸다. 칼 헹크가 15년 동안 찾아 헤맨 끝에 1845년 다섯번째 소행성을 만났다. 이렇게 발견되기 시작한 소행성들은 이후 가속적으로 발견돼 1890년이 되자 개수가 3백개를 넘었다.
한편 티티우스-보데 법칙은 점차 힘을 잃어갔다. 최초의 소행성 세레스의 크기가 지름이 9백km 정도로 다른 행성에 비해 크기도 작지만 이렇게 소행성 숫자가 늘어가자 행성 거리를 나타내는 법칙으로서의 지위를 의심받게 됐다. 더욱이 1848년 독일의 요한 갈레(1812-1910)가 해왕성을 발견하자 용도 폐기 직전까지 갔다. 해왕성까지의 거리가 티티우스-보데 법칙이 예측하는 수치와 큰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1930년 미국의 클라이드 톰보(1906-1997)가 발견한 명왕성의 거리와는 엄청난 차이를 보였다. 티티우스-보데의 수열이 행성들의 거리와 비슷했던 점은 단순한 우연의 결과였던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행성천문학자 제라드 카이퍼(1905-1973)는 행성의 질량과 거리를 고려해서 물리적인 근거로 이 수열을 설명하려고 애를 쓰기도 했다.이탈리아 시칠리아섬의 팔레르모천문대에서 있었던 일이다. 망원경을 들여다보고 있던 천문대의 대장인 주세페 피아치(1746-1826)의 속눈썹이 겨울밤 찬 공기 속에서 파르르 떨렸다. 피아치가 이끄는 천문대에서는 수많은 별들의 위치를 이전보다 정확하게 관측하던 중이었는데, 우연히도 배경별들 사이에서 낯선 ‘별’ 하나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8등급이나 되는 이 ‘별’은 이미 알려진 별지도에도 나타나지 않는 천체였다. 20여년 경력의 베테랑 관측천문학자인 피아치는 직감적으로 뭔가 새로운 천체를 발견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자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 자그마한 흥분이 물결처럼 일렁거렸다. 이때가 지금으로부터 꼭 2백년 전인 1801년 1월 1일이었다.
다음날 다시 밤하늘의 똑같은 지역을 망원경으로 살피자 새로운 천체가 약간 움직인 것처럼 보였다. 진짜 움직인 걸까 하는 약간의 의문이 생겼지만 그 다음날 이런 의심은 말끔히 사라졌다. 문제의 천체가 실제로 배경별들 사이에서 자신의 위치를 옮겼기 때문이다. 이렇게 큰 위치의 변화를 일으킬 만한 것은 태양계 내에 있는 천체밖에 없었다. 태양계 내의 새로운 천체! 피아치는 처음에 윌리엄 허셜이 천왕성을 발견했을 때처럼 새로운 혜성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1월 24일 그는 자신의 믿음대로 새로운 혜성을 발견했노라고 다른 학자들에게 알렸다. 하지만 사실 이것은 보통 행성보다 작은 소행성이었다. 그것도 최초의 소행성인 세레스!
지금은 1801년 1월 1일 최초의 소행성을 발견했다고 쉽게 말할 수 있지만 피아치가 만났던 미지의 천체가 다름아닌 소행성이었음이 밝혀지기까지는 피아치 전후에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다. 이제부터 세레스 발견의 비화에 귀기울여보자.
행성의 거리를 나타내는 수열
현재는 수많은 소행성들이 화성과 목성 사이에서 띠(소행성대)를 이룬 채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하지만 케플러시대만 하더라도 이곳은 미지의 공간이었다. 독일의 요한네스 케플러(1571-1630)는 행성의 궤도가 타원이고 행성들의 공전주기와 거리 사이에 일정한 관계가 있음을 밝혔지만 행성들의 거리가 어떻게 결정됐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케플러도 무언가를 직감했던지 1596년 이곳에 새로운 행성이 있어야 한다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후 1751년 독일의 다니엘 티티우스가 태양으로부터 행성들의 거리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를 자세히 연구했다. 티티우스는 행성들의 거리 사이에 재미있는 관계를 발견했으며 화성과 목성 사이에 중요한 공백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런 연구는 티티우스와 동시대를 살던 독일 베를린천문대의 대장인 요한 보데(1747-1826)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보데는 티티우스가 발견한 이런 관계를 자신의 기본천문학교과서에 담아 출간했다. 이 관계는 ‘티티우스-보데의 법칙’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일종의 수열로서 행성들의 거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먼저 0, 3, 6, 12, 24, 48… 순서로 숫자배열을 만든다. 이들은 0을 제외하면 바로 앞의 수를 두배하면 그 다음 수가 나오는 관계를 가진다. 이런 배열에서 각각의 수에 4를 더하고 다시 10으로 나눈다. 그러면 0.4, 0.7, 1.0, 1.6, 2.8, 5.2…의 수열이 탄생한다. 놀랍게도 이 수열은 지구에서 태양까지의 거리(1AU)를 1.0으로 보았을 때 순서대로 태양에서부터 행성들까지의 거리와 일치했다(표). 단 태양으로부터 2.8AU 떨어진 곳에는 그때까지 알려진 행성이 없었다. 이런 점은 티티우스-보데 법칙의 맹점이기도 했다. 하지만 오히려 미지의 행성이 그곳에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게끔 유도해 수많은 천문학자들이 새로운 행성을 찾아 밤하늘을 헤매게 만들었다.
발견 후 6주만에 잃어버린 새 천체
1781년 3월 독일계 영국 천문학자인 윌리엄 허셜이 천왕성을 발견하자 이 숫자배열은 다시금 주목을 받았다. 토성 밖에서 태양을 돌고 있던 새로운 행성 천왕성이 바로 이 수열이 예측하는 바로 그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티티우스-보데 법칙은 보데의 육감 차원을 넘어 정말 타당성이 있는 사실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미스터리한 배열에 아무런 이유없이 행성들의 거리가 맞아 들어간다는 점이 더욱 미스터리했던 탓이다.
천왕성의 발견으로 태양계의 행성의 숫자는 7개로 늘었다. 이에 대해 유명한 독일의 철학자 게오르크 빌헬름 헤겔은 다른 사물, 예를 들어 인간의 머리에 존재하는 구멍의 수가 7개뿐이기 때문에 행성의 숫자도 7개뿐이라고 주장했다. 헤겔은 약간 황당해 보이는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화성과 목성 사이에 행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1801년 1월 이탈리아의 피아치가 새로운 혜성을 발견했다고 공표하자 많은 논란이 일어났다. 새로운 천체의 발견자인 피아치 본인은 새로운 혜성이라고 발표했지만 보데와 같은 천문학자는 새로운 행성이 출현했다고 굳게 믿었다. 드디어 화성과 목성 사이에 존재하는 미지의 행성이 모습을 드러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새 천체를 계속 관측할 필요가 있었다. 당시에는 충분히 여러 날을 관측해야 새 천체의 궤도를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아치는 새 천체를 2월 11일까지밖에 관측하지 못했다. 너무 과로했던 탓인지 심하게 아파서 관측을 중단해야 했다. 북유럽의 천문학자들도 새 천체의 발견 소식을 접하고 이 천체를 찾아보려 했지만 문제의 천체는 이미 태양 가까이 자신의 모습을 숨기고 있었다(물론 이런 사실은 나중에야 알게 됐다). 피아치의 발견이 허사가 돼버리는 순간이었다. 잃어버린 새 천체를 다시 찾기 위해서는 온하늘을 다시 뒤지거나 새 천체가 태양 둘레를 도는 궤도를 계산해 현재의 위치를 찾아야 했다. 온하늘을 다시 뒤지는 작업은 요원한 일이었고, 피아치가 발견할 때부터 관측을 중단할 때까지의 기간, 즉 6주의 관측기간은 당시로서는 궤도를 계산해내기에 턱없이 부족한 자료였다.
그곳에 존재했던 행성
이때 23살의 젊은 나이인 독일의 천재 수학자 칼 프리드히 가우스(1777-1855)가 구세주로 나타났다. 가우스는 한 신문에서 새 천체의 발견과 실종에 대한 기사를 읽고 큰 흥미가 생겼다. 그는 자신의 일은 제쳐두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해결사로 나섰다.
우선 가우스는 피아치가 관측한 6주간의 관측자료를 가장 큰 단서로 삼았다. 다음 전체 궤도(보통은 타원모양)에서 조그만 호에 대한 정보만으로도 전체 궤도를 계산해낼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냈다. 이것은 가우스법이라고 해서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그는 11월에야 자신의 계산을 끝냈고 문제의 천체가 6주 동안 처음 위치에서 3° 정도 이동했음을 구해냈다. 곧바로 독일의 폰 자크에게 결과를 알려줬다.
폰 자크는 피아치보다 먼저 새로운 행성을 찾으려고 국제협력을 주도했던 인물이었다. 즉 여러나라의 학자들에게 하늘의 일정부분을 할당해 서로 협력 하에 새 행성을 찾아 나서고자 했다. 물론 이탈리아의 피아치에게도 할당부분을 알리려 했는데, 바로 그 시기에 피아치의 발견이 이뤄졌던 것이다.
결국 폰 자크는 12월 마지막날 밤에 가우스가 정확히 예측했던 지점에서 문제의 천체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피아치가 처음 발견한지 1년만이었다. 물론 화성과 목성 사이에, 티티우스-보데 법칙이 예측하는 그곳에 위치한 미지의 행성 자격으로 말이다. 이때 새로운 행성의 이름은 피아치의 제안에 따라 세레스로 지어졌다. 세레스는 로마 농업의 여신이자 시칠리아 수호의 여신이었다.
한편 가우스는 세레스의 문제를 해결한 노력 덕분에 큰 명성을 얻었다. 1807년에는 괴팅겐천문대 대장에 임명돼 여생을 보내게 됐다.
1백만개 소행성의 우두머리
세레스는 티티우스-보데 법칙이 예측했던 바로 그 행성으로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행성으로 밝혀진지 얼마 안된 1802년 3월에 자격을 의심받게 됐다. 독일의 하인리히 올베르스가 별처럼 생긴 움직이는 천체를 또하나 발견했던 것이다. 이 천체는 다름아닌 소행성 팔레스였다. 학자들에게는 큰 충격이었지만 세레스는 최초의 소행성이라는 자격을 획득하는 순간이었다. 두개의 소행성이 발견되자 또다른 소행성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천문학자들은 열심히 새로운 소행성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1804년에 주노, 1807년에 베스타의 발견이 이어졌다. 그 다음 소행성을 발견하는데는 시간이 좀더 걸렸다. 칼 헹크가 15년 동안 찾아 헤맨 끝에 1845년 다섯번째 소행성을 만났다. 이렇게 발견되기 시작한 소행성들은 이후 가속적으로 발견돼 1890년이 되자 개수가 3백개를 넘었다.
한편 티티우스-보데 법칙은 점차 힘을 잃어갔다. 최초의 소행성 세레스의 크기가 지름이 9백km 정도로 다른 행성에 비해 크기도 작지만 이렇게 소행성 숫자가 늘어가자 행성 거리를 나타내는 법칙으로서의 지위를 의심받게 됐다. 더욱이 1848년 독일의 요한 갈레(1812-1910)가 해왕성을 발견하자 용도 폐기 직전까지 갔다. 해왕성까지의 거리가 티티우스-보데 법칙이 예측하는 수치와 큰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1930년 미국의 클라이드 톰보(1906-1997)가 발견한 명왕성의 거리와는 엄청난 차이를 보였다. 티티우스-보데의 수열이 행성들의 거리와 비슷했던 점은 단순한 우연의 결과였던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행성천문학자 제라드 카이퍼(1905-1973)는 행성의 질량과 거리를 고려해서 물리적인 근거로 이 수열을 설명하려고 애를 쓰기도 했다.
현재는 소행성이 행성에 비해 크기가 작고 자체적인 대기를 갖지 않는 천체로 보통 화성과 목성 사이에 띠(소행성대)를 이루는 것으로 밝혀졌다. 가장 큰 소행성인 세레스의 크기도 지름이 1천km에 못 미치고 나머지는 이보다 훨씬 작다. 현재 지름이 1km보다 큰 소행성의 개수는 1백만개로 추정된다. 그리고 소행성대를 벗어나 지구 근처를 기웃거리는 소행성들도 상당수가 있고 더욱이 지구와 충돌할 가능성이 있는 소행성도 발견되고 있어 인류에게 커다란 충격을 가져다주고 있다. 물론 최초의 소행성인 세레스를 발견했던 피아치가 이런 사실을 알게 된다면 더 엄청난 충격을 받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