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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여신 아르테미스의 신전

에덴 동산에 세워진 전설의 건축물

아르테미스 신전은 그리스 시대에 가장 큰 신전이자 대리석으로 만든 최초의 신전이기도 하다. 높이 18m의 기둥 1백27개를 사용했으며 길이 1백20m, 폭 60m의 대형 건축물이다. 현대인에게 위압감을 주는 그리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의 길이가 69m, 폭 30m, 높이 10m 정도이며, 대리석 기둥을 58개 사용했다는 사실을 볼 때 이 신전이 얼마나 큰 규모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신전의 자재는 가장 아름답고 순도 높은 백색 대리석만을 사용했으며, 중앙의 넓은 홀에 네방향으로 대리석 계단을 딛고 올라갈 수 있게 했다.

그리스 신화에서 아르테미스는 제우스와 레토의 딸로 아폴론과는 쌍둥이 남매다. 아폴론이 태양의 신인데 반해 아르테미스는 달의 여신이자 처녀 사냥꾼이다. 한편 에페수스 사람들이 추앙하던 아르테미스는 다른 지역의 아르테미스와는 다소 다르다. 우선 외형부터 매우 다르다. 풍부함을 표시하는 듯 살이 찌고 가슴에 무수한 유방을 갖고 있는 등 다소 기괴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또한 사냥꾼이었기 때문에 주변에는 항상 기묘한 동물들이 따르고 있다.


신전가상도^아르테미스 신전은 파르테논 신전의 4배규모다.또 신전의 자재는 가장 아름답고 순도 높은 백색 대리석만을 사용했다.


거대한 돌의 운반방법

일반적으로 아르테미스 신전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부자라고 알려져 있던 리디아의 왕 크레수스가 자신의 명성에 걸맞게 그리스 전역에서 가장 유명한 조각가들을 동원해 고대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신전을 만들라고 지시했다고 알려졌다. 특히 거대한 기둥에도 화려한 조각을 새기도록 했으며, 리디아어와 그리스어로 문장을 쓰게 했다.

그러나 이 건물은 착공된지 무려 1백20년이 지나 완성된다. 신전 건설의 총 책임자는 세르시프론이다. 학자들은 그가 이집트를 방문해 나일강 연변에 있는 거대한 신전들이 수많은 기둥을 갖고 있는 것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믿는다. 신전에 사용되는 대리석은 12km가 떨어진 채석장에서 운반했는데 40t이나 되는 돌들도 있었기 때문에 이것들을 운반하는 것이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단순한 마차로는 이같이 무거운 돌을 운반할 수 없게 되자 세르시프론의 아들인 메타지네스가 대안을 제시했다. 돌의 형태에 따라 두가지의 이동방법이 고안됐는데 장방형의 돌을 운반하는 경우 돌의 양끝에 커다란 원형바퀴를 설치했다. 원형의 돌을 운반하는 경우 돌에 황소가 끌기에 편한 사각대를 설치했다. 마치 거대한 롤러가 굴러가게 한 것이다.(그림) 고대나 현대나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임을 확인시켜 주는 좋은 예다.

신탁과 최후 피난처 역할

고대 신전의 역할은 원래 신탁의 장소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전이 현대로 볼 때 은행 역할을 했고, 신에 관계되는 물건을 판매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록에 따르면 아르테미스 신전에서 매년 열리는 행진과 의식에 참여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돈을 융자해 줬는데 이자는 일년에 9%였다고 한다. 신전의 승려들은 이자를 계산하고 중개에 대한 수수료를 정하고 교환하는데 경험이 많았다. 자금이 많은 사람들은 신전에 돈을 맡기고 이자를 받았다. 이자의 지급일은 여신의 생일로 학자들은 그 날짜를 5월 25일경으로 생각한다.

아르테미스 신전은 에페수스 사람들의 최후 피난처로도 유명했다. 페르시아인들이 도시를 공격하자 주민들은 신전으로 달려갔다. 그들이 신전의 기둥에 자신을 매고 “성역이다”라고 외치기만 하면 모두 구원될 수 있었다. 페르시아인들도 이 여신을 존경했으므로 신전 안에 있는 어떤 사람도 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뿐이 아니다. 범인이나 탈주자는 물론 왕위에서 쫓겨난 사람들도 신전에만 도착하면 합법적인 망명의 장소로 인정받았다. 신전의 모든 땅은 신성하게 여겨졌으므로 동물과 물고기, 새들도 같은 대우를 받았다. 고대에서 에페수스는 모든 생물들에게 최후의 피난처였던 것이다.

고대 문명세계에서 가장 존경을 받았던 아르테미스 신전은 엉뚱한 일로 수난을 당한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태어난 기원전 3백56년에 화재가 일어난 것이다. 이 화재는 헤로스트라투스라는 사람이 “어차피 나쁜 일을 하려면 후세까지 알려질 수 있는 악행을 저질러야 한다”며 신전을 계획적으로 불태워서 발생한 것이다. 그는 아르테미스 신전과 같이 유명한 것을 파괴하는데 성공하면 더욱 유명해질 것이라는 생각을 가졌다고 한다. 현대인으로서도 다소 놀라운 생각이었다. 여하튼 그는 자신의 목적을 어느 정도 성취했다. ‘헤로스트라톤’이라는 말은 악명이 높다는 뜻으로 변했고, ‘미친’또는 ‘저주받은’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된다. 신전이 파괴되자 에페수스인들은 곧바로 신전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에페수스의 여인들은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보석 등을 팔았고, 인근 도시국가의 왕들은 기둥을 기증하기도 했다. 이때 22살의 젊은 알렉산더가 이 신전의 건설현장을 방문했다. 알렉산더가 페르시아와의 첫번째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지 겨우 몇달 후다.

아르테미스 신전의 웅장함에 감탄한 알렉산더는 자신의 이름으로 신전을 세운다면 모든 비용을 내겠다고 제의했다. 그러나 에페수스인들은 다른 나라의 신을 모시는 신전을 세우는 것은 좋지 않다면서 정중히 거절했다. 새로운 신전이 이전의 파괴된 신전보다 웅장하고 더 좋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에페수스의 아르테미스 신전은 이러한 관례와는 달리 새로운 것이 거의 없었다. 재건된 신전은 첫번째 신전과 동일한 장소에 거의 동일한 규모로 재건축됐다. 더구나 크레수스에 의해 착공된 신전에 대한 설계도가 모두 보존돼 있었으므로 완벽하게 복원될 수 있었다.

기원전 2천년 도자기 발견

이 신전이 여타 신전에 비해 갖는 다른 특징은 신전의 전면에 있는 36개의 기둥 하단부에 정교한 조각들이 새겨졌다는 점이다. 이런 형식은 다른 그리스 신전에서는 보기 드문 예다. 신전은 그야말로 기둥의 숲을 이뤘으므로 건설되기 전부터 불가사의로 불리는 것이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니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가 에페수스를 방문해 이 신전을 돌아보고는 기자에 있는 피라미드에 떨어지지 않는 걸작으로 묘사하며 찬탄했다.

중세시대만 해도 아르테미스 신전은 에덴의 동산에 세워졌다고 알려지기도 한 전설의 신전이었다. 따라서 유럽인들이 고대의 유적에 관심을 갖자마자 제일 먼저 발굴하려고 생각한 기념물이 바로 아르테미스 신전인 것이다. 그러나 아르테미스 신전의 발굴에 착수한 사람은 고고학에 발을 들여 놓은 전문가가 아니라 아마추어 열성가인 영국의 건축가 존 터틀 우드였다. 그는 대영박물관과 담판에 들어가서 1863년에 대영박물관으로부터 자신이 발견하는 유물들을 교환하는 조건으로 발굴을 허가한다는 승낙을 받았다.

우드의 작업은 그야말로 아마추어 수준이었지만 그의 작업은 거의 20년이나 계속됐다. 발굴지 면적은 거의 2백m2로 깊이도 6m-9m나 됐다. 신전의 돌들로 석회를 만들었던 용광로의 자리도 발견됐다. 당시 발굴된 유물이 현재 대영박물관의 특별 전시실에 있는 가장 유명한 전시품 중 하나다. 우드는 자신의 발굴을 토대로 아르테미스 신전의 복원도를 작성했다. 1884년까지 신전의 발굴에 헌신했고 70세에 심장발작으로 사망했다.

발굴은 1980년에도 계속됐다. 오스트리아 고고학팀은 신전으로부터 서쪽에 위치한 거대한 제단 근처에서 고대의 해변을 발견했고 작은 샘물도 발견했다. 발굴팀들을 놀라게 한 것은 이곳에서 발견된 도자기다. 이 도자기는 미케네인들이 사용하던 것으로 무려 기원전 2천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발굴팀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아르테미스 신전의 중앙부분에서 발견된 유물로, 크레수스 왕보다도 훨씬 오래된 시대의 층에서 발견된 것이다. 진흙 속에서 금을 정련하던 장소도 발견됐는데 그곳에서 아르테미스 여신의 수많은 보석들이 발견됐다.

학자들은 이 보물들이 발견된 경위를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홍수나 천재지변에 의해 아르테미스 여신상이 진흙 속에 파묻혔다. 이때 제작된 여신상은 목재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진흙 속에서 목재가 썩자 여신을 치장하던 보물들만 발견됐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 지역은 성스러운 곳이므로 후대의 건축가들이 이 지역을 훼손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는 것도 유물이 보존된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이들의 발굴에 의해 에페수스에서 건립된 첫번째 아르테미스 신전은 기원전 8백50년경에 건설된 것으로 추정됐다. 이 건물은 홍수와 화재에 의해 완전히 파괴됐는데 크레수스 왕이 파괴된 신전의 자리에 두번째 신전을 세웠고, 이 신전도 파괴되자 알렉산더 대왕 시대에 세번째 신전이 같은 장소에 지어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에페수스인들의 자부심과 여신에 대한 고집스러운 열정으로 볼 수 있다. 그들은 외쳤다.
"에페수스의 아르테미스는 위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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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12월 과학동아 정보

  • 이종호
  • 진행

    장미경 기자
  • 진행

    박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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