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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새천년을 연 영예의 수상자들 : 플라스틱도 전기 통할 수 있다

2000 화학상 히거, 맥더미드, 시라카와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의 앨런 맥더미드.


우리 주변에서 많이 사용되는 플라스틱은 고분자(polymer)의 일종이다. 플라스틱은 열을 가해 형체를 만든 다음 식히면 변형된 모양이 유지되는 열가소성(thermoplastic)을 갖기 때문에, 이 유용한 성질이 마치 이름처럼 붙여졌다. 고분자란 구슬이 꾀어져 목걸이가 만들어지듯이 작은 단량체(monomer)가 계속 연결돼 기다란 줄과 같은 형태를 갖는 거대한 분자를 말한다. 대부분의 고분자는 강한 결속력을 가진 탄소-탄소 단일결합을 주축으로 이뤄졌다. 따라서 단일결합에 사용된 전자는 외부 전기장에 따라 쉽게 움직이지 못하기 되므로 부도체, 즉 절연체의 성질을 갖는다.

전자제품의 내부 기판이나 겉통, 전기 스위치통, 전선의 표면 등은 전기가 통하지 않는 플라스틱으로 만들어 졌다. 이와 같이 플라스틱 고분자의 전기절연성은 다양한 방면에서 유용하게 사용되는데, 모든 플라스틱 고분자가 절연체 성질만 갖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조건에서 합성된 고분자를 잘 처리하면 금속 못지 않은 전기전도성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이 1977년 앨런 히거(Alan J. Heeger), 앨런 맥더미드(Alan G. MacDiarmid), 그리고 히데키 시라카와 (Hideki Shirakawa)에 의해 밝혀졌다. 그들은 이 놀라운 업적을 인정받아 2000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하게 된 것이다.

오래 전부터 폴리아세틸렌은 전도성을 띨 가능성을 갖는 구조로 과학자들 사이에서 인식돼 왔다. 삼중결합을 갖는 아세틸렌(HC≡CH)을 지글러-나타 촉매로 중합시키면 단일결합과 이중결합이 반복되는 형태의 고분자가 얻어진다. 이 때 이중결합은 강한 시그마(σ)결합과 약한 파이(π)결합으로 이뤄져 있다. 단일결합과 이중결합이 동일한 모양을 가지며 연속적으로 반복되는 트란스(trans, 이중결합에 붙어있는 단일결합의 위치가 반대쪽에 있는 구조) 폴리아세틸렌의 경우 마치 벤젠(${C}_{6}$${H}_{6}$)분자에서 탄소-탄소간 세개의 단일결합과 세개의 이중결합이 서로 상호 변환돼 6개의 1.5결합 상태가 되는 것처럼 공액계(conjugated system)를 이루게 된다. 이렇게 공액계를 이루면 약한 파이결합을 이루고 있는 전자들이 전체 고분자 속을 보다 쉽게 이동할 수 있으므로 아주 새로운 전기적, 광학적 성질을 가지리라 예상돼 온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방법(묽은 촉매 용액에 높은 압력의 아세틸렌을 침투시키면서 중합하는 것)으로 만들어진 폴리아세틸렌은 어떤 용매에도 녹지 않는 검은색 분말 형태로 트란스와 시스(cis, 이중결합에 붙어있는 단일결합의 위치가 같은 쪽에 있는 구조)가 섞여 있어 기대했던 새로운 성질이 발견되지 못했다.

순수한 트란스 형태의 폴리아세틸렌을 만드는 방법은 1970년 초 일본의 화학자 시라카와 교수의 연구실에서 일어난 우연한 실험 덕분이었다. 지글러-나타 촉매가 들어 있는 용액의 농도를 수천배 진하게 아세틸렌을 중합시켰더니 용액의 표면에서 은색 광택을 내는 고분자 박막이 만들어진 것이다. 분석 결과 이 고분자 박막은 모두 트란스 구조를 갖는 폴리아세틸렌인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전도도가 크게 측정되지는 않았다.

한편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화학자 맥더미드 교수와 물리학자 히거 교수는 이와 비슷하게 금속 광택을 내는 무기고분자 질화황((SN)x)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일본에서 개최중인 학술회의에 참석한 맥더미드 교수가 휴식 시간에 시라가와 교수로부터 자신이 연구하고 있는 물질과 유사하게 금속 광택을 갖는 유기고분자 이야기를 전해듣고는 즉시 시라가와 교수를 미국으로 초청해 공동 연구를 시작했다.

이들은 트란스 형태의 폴리아세틸렌을 요오드(I₂)로 처리하면 전도도가 약 1백만배 증가되는 것을 발견하고 1977년 영국의 화학학술지에 발표했다. 폴리아세틸렌을 합성할 때 트란스와 시스 형태의 양을 조절하는 방법을 발견한 시라가와는 모두 시스 형태를 갖는 폴리아세틸렌을 오불화비소(As${F}_{5}$)로 처리하면 더 좋은 결과가 일어나 약 수백억배의 전도도 증가할 수 있음을 보고했다.


일본 쓰쿠바 대학의 히데키 시라카와.


종이처럼 돌돌 말 수 있는 TV 가능

도대체 어떻게 이런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일까? 우리들이 대표적인 반도체로 알고 있는 실리콘을 예로 들어 생각해보자. 실리콘은 상온에서는 큰 전도도를 나타내지 못한다. 전자가 채워져 있는 에너지 준위(VB, valence band)와 전자가 채워있지 않은 에너지 준위(CB, conduction band) 사이의 에너지 차가 커서 상온에서는 VB에 있는 전자가 CB로 이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리콘보다 최외각 전자를 하나 더 갖고 있거나 덜 갖고 있는 다른 물질을 불순물로 첨가해 주면 새로 형성되는 에너지 준위를 통해 전자가 잘 전달된다. 이러한 조작을 도핑(doping)이라고 하는데, 전자가 하나 적은 불순물을 넣는 경우 양의 전하가 생긴다고 해서 p-도핑(positive doping)이라 부르고 전자가 하나 많은 불순물의 경우 n-도핑(negative doping)이라 부른다.

폴리아세틸렌의 변화도 이와 비교해 설명할 수 있는데, 중성 상태에서는 공액계를 이루는 파이(π)전자의 이동이 활발하지 못하지만 요오드와 반응해 전자를 잃어 양의 전하를 갖는 솔리톤(positive soliton)상태가 생기게 된다.

이 솔리톤은 VB와 CB의 중간에 위치하는 새로운 솔리톤 에너지 준위를 이뤄 VB로부터 전자가 쉽게 이동할 수 있게 되므로 금속과 같은 높은 전도도를 나타내게 한다. 요오드나 오불화비소와 같은 산화제와 반응하면 양의 전하를 갖는 솔리톤을 형성하므로 p-도핑이라고 하고, 나트륨과 같은 환원제와 반응하는 경우는 음의 전하를 갖는 솔리톤을 형성하므로 n-도핑이라고 부른다.

이처럼 전기가 통하는 고분자들은 유기고분자가 갖고 있는 가용성과 다양한 모양을 쉽게 만들 수 있는 장점이 있기 때문에 차세대 디스플레이 소자로 각광받는다. 머지않아 종이처럼 돌돌 말아서 지니고 다니는 TV를 보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또한 전도성 고분자는 다른 고분자들과 잘 섞이기 때문에 기존의 고분자들로 만들어진 자동차 타이어나 합성섬유 옷 등이 갖는 정전기의 문제를 쉽게 해결하고 있다.노트북 컴퓨터나 핸드폰과 같은 휴대용 전자 기기를 위한 가볍고 충전 용량이 큰 축전지의 개발 또한 전도성고분자를 이용해 가능해지고 있어 앞으로 새로운 응용분야가 더 개척될 수 있는 화학의 한 분야로 자리잡을 전망이다.


미국 산타바바라 소재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의 앨런 히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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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11월 과학동아 정보

  • 이진규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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