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에도 계속해서 인류의 빛나는 지적 유산으로 남게될 책, '과학혁명의 구조'.여기서 저자는 한 시대의 과학은 당대의 과학자들이 공유하는 인식체계인 패러다임에 의해 규정되며,기존의 패러다임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대체될 때 과학은 그 근본부터 완전히 바뀌는 혁명적 변화를 경험한다고 설명한다.
흔히 15세기를 르네상스의 시대, 16세기를 종교개혁의 시대, 17세기를 과학혁명의 시대, 18세기를 산업혁명의 시대라 부른다. 여기에서 17세기의 과학혁명이란 이전의 아리스토텔레스 과학으로부터 뉴턴 과학으로의 전환을 말하는 것이며, 이러한 과학의 전환을 ‘혁명’이라는 과격한(?) 사회과학적 용어로 표현하게 된 것은 바로 쿤(Thomas Samuel Kuhn, 1922-1996)의 ‘과학혁명의 구조’(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의 영향 때문이다.
본래 ‘과학혁명의 구조’는 20세기 전반에 크게 활약했던 과학철학자인 노이라트와 카르납 등이 기획한 ‘통합과학의 국제적 백과사전’(Inter-national Encyclopedia of Unified Science)의 일부분으로 준비됐다가, 1962년 시카고 대학 출판부에 의해 단행본으로 출판됐다. 1969년에는 초판 발행 이후 촉발된 찬반논쟁에 대한 저자의 ‘후기’가 첨가돼 개정증보판으로 출간됐다.
과학과 혁명의 만남
‘과학혁명의 구조’의 본문은 총 13개의 장으로 나뉘어져 있다. 1장은 서론으로서 과학론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위한 새로운 과학사를 이야기하는 역사적 의미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2장에서는 패러다임이 출현해 정착되기 이전의 과정인 소위 ‘전과학’의 단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어지는 3-5장에서는 패러다임의 특징과 기능에 대해 과학사적 사례들을 통해 설명하면서 수수께끼 풀이로서의 정상과학(normal science)의 성격과 역할에 대해서 기술한다. 6-8장에서는 기존 패러다임과 그것으로 규정되는 정상과학으로는 잘 설명되지 않는 이상현상(anormaly)의 출현과 이에 수반되는 기존 과학이론의 위기 그리고 새로운 과학이론의 출현 과정에 대한 많은 역사적 사례들을 설명한다. 마지막으로 9-13장에서는 혁명으로서의 과학사의 중요 사건들에 대한 예시를 통해서 세계관의 변화를 수반하는 과학혁명이 어떻게 촉발되고 진행되며 정착돼 가는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쿤의 과학관의 핵심은 과학 지식의 변천과 발전이 혁명적이라는 데 있다. 즉 과학 지식이 관찰과 실험의 검증을 통해서 누적적이고 점진적으로 진보한다는 종래의 귀납주의적이고 실증주의적인 과학관에서 벗어나, 한 시대의 과학은 당대의 과학자들이 공유하는 인식체계인 패러다임에 의해 규정되며, 기존의 패러다임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대체될 때 과학은 그 근본으로부터 완전히 바뀌는 혁명적 변화를 경험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과학이 누적적 지식의 점진적 발전이라는 당시 생각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아인슈타인 같은 혁명가가 나타나 뉴턴체계의 과학에서 드러난 모순을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시킨 과정이 그 예다. 따라서 과학은 더 이상 객관적 자연과 이성적인 개별 과학자의 만남이 아니고, 끊임없이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역사적 과정이며 동시에 수많은 가치선택이 내재하는 과학자 사회의 심리적이고도 사회적인 과정인 것이다.
핵심개념 패러다임은 언어학 용어
‘과학혁명의 구조’의 핵심 개념인 ‘패러다임’은 본래 언어학에서 빌려온 용어로서 어형변화에 대한 표준이 되는 예(例)란 의미의 말이다. 쿤에 따르면 한 시대의 과학적 사고와 연구는 당대의 개념적 세계관에 해당하는 패러다임에 의해 정의되고 규정되며, 패러다임에는 형식적 이론, 고전적 실험, 신뢰받는 방법론, 기호적 일반화, 모형, 범례(exemplar) 등의 요소들이 모여있는 집합체이다.
쿤이 사용한 ‘패러다임’과 ‘패러다임 변환’(paradigm shift)이라는 용어와 아이디어는 이제 과학사·과학철학 분야를 넘어서,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경영학 등 거의 모든 학문 분야에서 사용되는 매우 보편적인 개념이 됐다. 쿤은 한 개인에게 일어나는 패러다임 변환은 세계관의 변환을 수반하는 것이기에 종교적 개종과 같이 어려우며 형태심리학에서 말하는 형태전환(gestalt shift)만큼 획기적인 것이라고 설명한다.
사실 이런 의미에서 혁명성으로 대표되는 과학 발전에 대한 그의 파격적인 역사 해석은, 그 자신의 용어를 빌리자면, 진정 과학사학에서의 패러다임적 변환이 아닐 수 없다.
'과학혁명의 구조'가 출판되자마자 이 책은 과학자와 과학사학자들 사이에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켰으며,이내 과학사의 가장 중요하고도 영향력 있는 이론으로 자리잡았다.오래지 않아 만인의 필독서가 됐으며 1969년에는 미국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책이 되기도 했다.또 과학에 대한 철학적 접근에서 과학사적 사례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과학사에 관심을 가진 쿤
쿤은 1922년 7월 18일 미국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서 출생해 하버드 대학에서 1943년 학부를, 1946년 석사과정을, 그리고 1949년 박사과정을 마쳤다. 이후 그는 하버드, UC 버클리, 프린스턴, MIT등 미국의 여러 유명 대학들을 두루 옮겨 다니면서 과학사 및 과학철학 분야의 교수직을 맡았다.
'과학혁명의 구조'이외에도, 1957년에는 그의 최초의 저술인 '코페르니쿠스 혁명'을, 1977년에는 논문집 성격의 '본질적 긴장'을, 1978년에는 보다 전문가를 위한 '흑체이론과 양자불연속'등을 발표했다. 그리고 공저로는 197년 '양자물리학사 자료집'등이 있다.
본래 물리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쿤은 화학자이면서도 과학사에 조예가깊었던 당시 모교의 코넌트 총장이 개설한 자연과학개론 강좌에 참여하면서 과학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코넌트는 과학사를중심으로 한 비과학 전공자를 위한 교양과학강좌에 큰 관심이 있었다. 그리고 코넌트의 영향아래, 1950-60년대 하버드 대학이 HPP(Harvard Project Physics)와 같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과학사 중심의 교양 과학 교육프로그램들을 개발하는데 기여했다.
'과학혁명'으로 대표되는 쿤의 파격적이고도 심오한 학문적 성취는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 사이의 활발한 학문적 교류가 가능했던 하버드 대학의 자유로운 지적 분위기가 큰 영향을 미쳤다. 1948년부터 대학의 신진 연구원으로 있었던 3년 그리고 1951년 부터 교양과정 및 과학사의 강사와 조교수를 거치는 동안, 쿤은 과학사및 과학철학은 물론 철학, 심리학, 언어학, 사회학 등 다양하고 폭넓은 분야에 걸친 학자들과 학문적으로 교류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