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가에 앉아 모래성을 쌓아본 적이 있는가.놀이터에서 모래산을 만들어 본 적은?어린 시절을 함께한 모래에 이 세상의 탄생 비밀이 숨겨 있을 수도 있다.
공사 현장에 가면 시멘트 가루에서 자갈을 골라내는 기구가 있다. 가는 철망이 드리워진 네모난 프레임에 시멘트 더미를 올려놓고 약간씩 위로 쳐주면서 옆으로 흔들면, 자갈들은 위로 올라오고 고운 시멘트는 아래로 내려가 철망 사이로 빠져나간다.
해변가 모래사장에 주저앉은 아이들도 비슷한 놀이를 한다. 모래 한줌을 콜라 병에 집어넣고 흔들어주면, 고운 모래는 아래로 내려가고 굵은 모래나 조개 부스러기들은 위로 올라온다. 콜라 병을 한참 동안 흔들다보면, 모래 알갱이들이 크기 순서대로 차곡차곡 쌓여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물리학자들은 이 현상을 ‘브라질 땅콩 효과’라고 부른다. 여러 종류의 땅콩들을 한데 섞어놓은 땅콩 믹스 캔을 사서 뚜껑을 열어보면, 가장 큰 브라질 땅콩이 항상 맨 위에 올라와 있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아이들에겐 신기하기만 한 이 ‘브라질 땅콩 효과’는 제약 회사들에겐 오래 전부터 골칫거리 중의 하나였다. 잘 섞어놓은 가루약을 차로 장시간 운반하다보면, 크기별로 층이 생겨 낭패를 보게 되기 때문이다. 아침 식사로 우유에 타먹는 시리얼이나 시멘트 재료를 운반할 때도 마찬가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기업들은 장거리 운반 후에 다시 골고루 섞는 작업을 해야만 한다. 브라질 땅콩 효과 때문에 기업들이 추가로 부담해야 하는 돈만 해도 연간 66조원. 이 작은 현상 하나로 생산 원가의 40%를 차지하는 돈이 지출되고 있다.
고체나 액체, 기체에 관한 연구는 물리학 분야에서 오랜 역사를 갖고 있지만, 알갱이에 관한 연구는 그다지 물리학자의 관심을 끌진 못했다. 최근 들어 알갱이가 고체와 액체에서는 볼 수 없는 풍부한 특성을 가진다는 점이 알려지면서, ‘알갱이 역학’이 물리학 분야에서 새롭게 각광받고 있다. 산사태나 지진을 연구하는 지질학자들도 이 분야에 각별한 관심을 쏟고 있으며, 땅콩 회사와 제약 회사를 비롯해 가루 분말을 다루는 기업들의 연구비 지원도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물리학자들은 알갱이 역학을 통해 산사태가 일어나는 이유와 브라질 땅콩이 위로 올라오는 까닭에 대해 어떤 해답을 찾은 것일까? 그들은 과연 모래 알갱이와 땅콩들 속에서 무엇을 발견한 것일까?
물리학자를 해변가에 주저앉히다
현재 브룩헤이븐 국립 연구소에서 근무하는 퍼 박 박사는 한줌의 모래가 만들어내는 패턴 속에서 ‘스스로 짜여진 고비성’(Self-organized criticality)이라는 현상을 발견해 일약 스타가 된 덴마크 물리학자다. 이 현상은 많은 물리학자들을 어린이들마냥 해변가에 주저앉게 했다.
바닥을 깨끗이 정리한 후 모래를 일정한 속도로 조금씩 쏟아 부어보자. 그러면 모래들은 자신이 처음 떨어진 곳에 그대로 멈춰 조금씩 쌓이면서 산 모양의 작은 모래더미를 만든다. 시간이 흘러 모래더미가 어느 정도 경사를 이루게 되면, 모래 알갱이들은 경사면을 타고 조금씩 흘러내리게 된다. 규모가 작은 산사태가 일어나는 것이다. 모래를 더 많이 부을수록 흘러내리는 모래의 양은 많아지고 산사태의 규모도 커진다.
일정한 속도로 모래를 계속 부어주면 쏟아지는 모래와 산사태로 떨어지는 모래의 양이 평균적으로 균형을 이루면서 모래더미가 지면과 일정한 각도를 가진 더미를 이루게 된다. 이때 만들어진 각도를 ‘멈춤각’이라 부른다. 흥미로운 것은 멈춤각이 모래더미의 크기와는 상관없이 모래의 특성에 따라 항상 일정한 값을 가지며, 모래를 아무리 더 부어도 모래더미는 스스로 일정한 각도의 모래더미를 계속 유지하려고 한다는 사실이다. 멈춤각보다 작으면 모래가 계속 쌓이고, 멈춤각보다 크면 옆으로 흘러내려서 일정한 각도의 모래더미를 계속 유지한다는 것이다. 이 상태를 ‘고비상태’(critical state)라고 부른다.
시카고 대학 하인리히 재거 교수와 그 동료들이 전자현미경을 이용해 모래더미의 경사면을 촬영한 결과, 모래더미가 위치에 따라 서로 다른 성질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모래를 계속 쏟아 부으면, 모래더미 경사면의 얇은 위층은 마치 액체처럼 흘러내리고, 안쪽은 고체처럼 고정된 상태를 유지한다. 이것은 알갱이들이 쌓여있는 경우 ‘정적인 마찰력’(static friction)에 의해 고체처럼 형태를 유지하려는 특성 때문인데, 이 현상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약 1백50년 전 과학자 쿨롬이었다. 재거 교수가 찍은 모래더미가 흘러내리는 사진은 1996년 4월 물리학 저널 ‘피직스 투데이’의 표지를 장식해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사진은 물리학자들에게 모래시계의 수수께끼를 푸는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주었다. 기원전 3세기경부터 사용됐다고 추정되는 모래시계는 일정한 속도로 떨어지는 한 줌의 모래 속에 덧없는 시간의 흐름을 담아내는 장치다.
알갱이 하나가 산사태 초래
만약 모래시계 안에 모래 대신 물이나 다른 액체를 집어넣으면 시계로서 제 기능을 할 수 있을까? 이 경우 물의 흐름은 모래처럼 일정하지 않다. 드럼통에 구멍을 뚫어 물줄기를 밖으로 흐르게 하는 경우, 구멍을 중간에 뚫었을 때보다 바닥에 뚫었을 때 물줄기의 흐름은 더 세다. 이처럼 액체는 위에서 누르는 압력에 따라 물줄기의 속도가 달라진다. 따라서 모래시계를 물로 채울 경우 물줄기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가늘어질 것이다. 또 물이 거의 다 떨어질 무렵, 마지막 남은 한방울은 표면 장력에 의해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맺혀 있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모래시계는 모래를 사용했기에 가능할 수 있었던 발명품인 것이다.
그렇다면 모래는 어떻게 위에서 누르는 모래의 양에 상관없이 일정한 흐름을 만들 수 있는 것일까? 재거 교수의 실험에서 본 것처럼, 모래더미의 경우 바깥 경사면만 액체의 성질을 띠며, 모래더미의 중심부는 대부분 고체의 성질을 나타낸다. 모래시계의 경우 유리면에 닿는 경사부분의 모래는 액체처럼 미끄러져 내려가지만, 위에서 누르는 모래는 고체처럼 고정돼 있다. 따라서 밑으로 흘러 내려가는 모래에 압력을 가하지 않기 때문에 모래가 일정한 속도로 내려갈 수 있는 것이다.
1993년 저명한 물리학 저널 ‘피지컬 리뷰 레터’에는 ‘모래시계가 일정한 속도로 내려가기 위해서는 모래 알갱이의 크기와 모래시계 목(neck)의 지름이 적당한 비율로 이뤄져야 한다’는 논문이 발표됐다. 저자인 샤오-룬 워 교수에 따르면, 모래시계의 목을 중심으로 위쪽과 아래쪽의 기압이 1만분의 1이라도 차이가 나면 일정하게 떨어지지 않고 불규칙적으로 똑똑 떨어지는 현상을 만들어낸다고 한다.
유럽의 농경지에서는 곡물이나 사료를 저장하는 ‘사일러’라는 원탑 모양의 창고가 있다. 이곳에서도 곡물이 한꺼번에 무너지지 않고, 필요한 만큼 일정하게 떨어지게 하는 것이 상당히 중요한 문제여서, 모래시계의 연구는 농업 관련 학자들의 큰 관심을 끌었다.
모래들이 만들어내는 패턴이 복잡성을 연구하는 물리학자들에게 주목을 받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다. 우선 첫째는 모래 알갱이들이 만들어내는 패턴은 주변 조건이 조금만 바뀌어도 전혀 다른 형태의 패턴으로 변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모래 알갱이들의 패턴이 비선형방정식으로 기술된다는 얘기다. 아직 모래 알갱이들을 기술할 수 있는 일반적인 방정식은 존재하지 않지만, 제안된 물리적인 모델들은 모두 비선형방정식의 형태를 띠고 있다.
두번째는 모래더미 스스로가 일정한 각도의 모래더미를 유지하려는 ‘자기 조직화’의 특성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복잡계’의 가장 중요한 특성인 ‘창발 현상’(구성요소(모래 알갱이)의 특성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특성을 전체 시스템(모래더미)이 갖게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스스로 자기 조직화하려는 성질에도 불구하고 그 상태가 상당히 ‘불안정한 상태’라는 점이다. 대부분의 경우 모래 알갱이들을 모래더미에 떨어뜨리면 경사면을 타고 흘러내려 모래더미는 자연스럽게 제 형태를 유지한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한 알의 모래 알갱이가 큰 산사태를 만들 수 있다. 이것은 ‘연쇄 반응’ 때문이다. 한 알의 모래 알갱이는 경사면을 타고 흘러내리면서 다른 알갱이들을 건드리게 된다. 이 알갱이도 따라 흘러내리면서 주위의 알갱이를 건드리게 되고, 이런 연쇄 반응은 큰 산사태를 초래하게 된다.
만약 모래더미가 멈춤각보다 큰 각도로 쌓여있을 경우 한알의 모래 알갱이가 큰 산사태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은 컴퓨터 시뮬레이션이나 정교한 실험으로 여러 차례 증명된 바 있다. 이를 이용해 지질학자들은 산의 모양이나 지형만으로 산사태의 가능성을 점칠 수도 있게 됐다.
‘사상누각’은 잘못된 표현
그렇다면 만약 모래에 물이 첨가되는 경우, 모래의 성질은 어떻게 바뀔까? 미국 노트르담 대학 혼베이커 교수와 그의 동료들은 수분을 조금씩 첨가할 경우 모래더미의 멈춤각이 어떻게 바뀌는지 측정해보았다. 이들의 실험에 따르면, 아주 적은 양의 수분이 첨가되기만 해도 모래더미의 멈춤각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지고 알갱이들은 서로 응집하게 된다. 미세한 수분이 모래 알갱이들을 서로 고정시켜주는 본드 역할을 해서 모래더미가 뾰족하게 쌓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이 연구는 작은 양의 수분이 알갱이의 성질에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가를 정량적으로 측정한 실험일 뿐 아니라, 어떻게 해변가 모래사장에 모래성을 쌓을 수 있는지에 대한 과학적인 설명을 제공해 주었다.
흔히 기초가 부족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탑을 ‘사상누각’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실제로 모래사장에 쌓여있는 모래성들을 보면 아주 튼튼할 뿐 아니라 어떠한 장식이나 디자인도 표현이 가능할 만큼 모래들의 접착력이 대단하다.
혼베이커 교수는 모래성이 모래 사장 위에 튼튼하게 서 있을 수 있는 이유는 모래 알갱이 사이를 이어주는 수분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이런 내용을 다룬 혼베이커 교수의 논문은 1996년 세계 모래성 콘테스트 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한 작품과 함께, 영국의 과학 저널 ‘네이처’의 1997년 6월호 표지를 멋지게 장식했다.
전자현미경을 이용해 모래더미의 가장자리에서 모래가 액체처럼 흘러내린다는 사실을 발견했던 재거 교수와 그 동료들은 자기공명영상(MRI) 장치를 이용해 ‘브라질 땅콩 효과’가 일어나는 과정을 촬영했다. 유리 콘테이너에 모래를 넣는다고 해도 우리는 맨 가장자리에 있는 모래들의 운동밖에 관찰할 수 없다. 그러나 MRI 장치를 이용하면 중심에서 운동하는 모래까지도 촬영할 수 있다.
이 실험에 따르면, 수직으로 흔들리는 모래 알갱이들은 마치 끓는 냄비 속의 물처럼 대류현상을 나타낸다고 한다. 흔들리는 컨테이너 속에서 양쪽 벽면에 붙은 모래 알갱이들은 아래쪽으로 휘어져 내려가고, 가운데 알갱이들은 위로 떠올라 ‘굽은 아치형의 층’을 형성한다. 이 과정에서 가장자리의 알갱이들은 더욱 작은 아치형 층을 형성하며 계속 내려가고, 가운데 알갱이들은 대류현상에 의해 계속 떠오른다. 맨 위로 떠오는 알갱이들도 나중에는 가장자리로 밀려 아래로 내려가게 된다. 그러나 알갱이가 큰 경우 작은 아치형 층을 형성하기엔 너무 커서 계속 위쪽에 머무르게 된다. 그래서 결국 한번 위로 올라온 큰 알갱이들은 다시 내려가지 못하고 맨 위층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이 현상은 1831년 마이클 패러데이에 의해 처음 발견됐으나, 1백65년이 지난 1996년이 돼서야 그 전과정이 생생하게 기술된 것이다.
화장 분가루에도 자연법칙 담겨있어
모래 알갱이들의 운동은 모래더미에 대한 물리학자들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는데 그치지 않고, 다양한 분야에 도움을 주고 있다. 현재 알갱이 역학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모래나 곡물에 관한 연구뿐 아니라, 지진이 발생하는 원인, 흙더미의 붕괴, 크기가 다른 입자들의 혼합과정, 우주성운의 형성과정 등 다양한 분야에서 알갱이들이 만들어내는 현상에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모래 알갱이에 대한 물리학자들의 연구는 과학자들에게 세상을 새롭게 보는 시각을 제공해 주었다.모래 알갱이뿐 아니라 설탕,밥알,시멘트,심지어 화장품의 분가루에 이르기까지 알갱이들은 우리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다.그러나 이 알갱이들이 그처럼 풍부하고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인식하지 못했다.
위에서 기술한 것과 같이,빅토르 위고는 이 우주를 둘러싸고 있는 모래 알갱이들의 패턴이 혹시 우주 탄생에 대한 어떤 해답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상상했다.그는 이미 1백년 전에 모래 알갱이들이 만들어내는 패턴 속에 수많은 물리법칙들이 숨어있음을 직감했던 것일까?그의 풍부한 문학적상상력은 1백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물리학자들에 의해 사실로 증명됐고,최근 우주성운을 연구하는 천체물리학자들에게 창의적인 영감을 제공하기도 했다.이제 우리도 빅토르 위고처럼,땅에 떨어진 곡식 한톨이나 해변가의 작은 모래 알갱이 하나도 이 우주를 만들어낸 소중한 벽돌이었음을 어렴풋이 깨닫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