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7일부터 11일까지 4박5일동안 15개 시·도에서 참가한 과학교사들과 함께 과학동아는 제주도의 나비를 탐사했다. 이번 탐사의 목적은 나비의 종류, 생태, 채집방법, 표본 등을 배우는데 두었다. 그러나 남색남방공작나비와 같이 우리나라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희귀한 나비를 채집하는 등 예상밖의 성과도 거두었다.
이번 제주도 탐사는 감회가 남다르다. 매년 여름과 겨울에 2회씩 과학동아가 꾸준히 실시해온 자연생태계 탐사가 어느덧 10년째를 맞이했다. 10년 전의 출발지가 바로 제주도였다. 또 제주도는 ‘나비박사’ 석주명선생이 나비를 관찰했던 곳이다. 우리나라 나비들은 매우 아름다운 이름들을 가지고 있는데, 이 이름들을 대부분 석주명선생이 지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번 탐사는 나비 연구의 중심지역에서 이뤄졌다고 할 수 있다.
'나비 관찰' 에서 '나비 존경' 으로
7일(수) 12시 10분. 포충망, 삼각지, 삼각통, 독통, 카메라, 나비도감 등을 들고 제주공항에 도착했다. 시내로 접어드는 길에는 협죽도가 분홍빛 꽃을 피우며 탐사대를 마중했다. 협죽도의 잎은 버드나무잎과 같고 꽃은 복숭아꽃과 같아 ‘유도화’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대원들은 협죽도를 보면서 한라산으로 달려갈 기분으로 설레이기 시작했다.
먼저 민속자연사박물관과 과학교육원을 찾았다. 민속자연사박물관 수장고에는 제주도에서 채집된 여러가지 동식물들이 매캐한 방부제 냄새를 풍기며 전생의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었다. 또 과학교육원에서는 4박5일 동안 대원들과 숨바꼭질할 나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 4시. 경희대 신유항교수의 나비특강. 우리나라 나비는 2백50여종(북한지역을 빼면 2백여종)이다. 종수가 많지 않고 화려하기 때문에 ‘곤충 배우기’ 에 입문하는 사람들이 처음 공부하기에 좋은 것이 나비다.
나비의 날개는 종류와 암수, 그리고 생태를 보여준다. 밝고 화려한 날개를 지닌 나비들은 주로 초원에 살고, 어두운 색을 지닌 나비들은 숲속에 산다. 이것은 보호색과 관계가 있다. 나비의 앞면과 뒷면이 다른 것도 보호색 때문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햇빛의 양이다. 어두운 곳에서 사는 것들은 햇빛을 많이 받기 위해 검은 색을 많이 띤다. 나비는 햇빛의 양을 조절해 체온을 일정하게 유지하려고 날개를 펴고 앉기도 하고 접고 앉기도 한다.
제주도에서 사는 나비는 90여종. 이 중에는 한반도 전역에서 볼 수 있는 것말고 독특하게 제주도나 남해안 일원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청띠제비나비, 남방노랑나비, 극남노랑나비, 산굴뚝나비 등으로 과학교육원에서 눈에 익혔던 것들이 머리에 떠올랐다.
“나비는 1억5천만년-2억년 전에 나타났다. 인류의 역사가 1백만년인데 비하면 매우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나비는 미물이 아니라 존경해야 할 대상이다.” 신교수의 강의는 ‘나비 관찰’ 에서 ‘나비 존경’ 으로 이어졌다.
자연과학사진협회 이강채회장의 사진특강은 살아있는 경험 그 자체였다. 강의 요점은 곤충과 나비 사진을 찍을 때 제일 먼저 눈에 초점을 맞추고 가능한 크게 찍으라는 것이었다. 눈이 살아 있을 때 사진의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또 이회장은 “가끔 먹거나 앉지도 않는 꽃이나 나뭇잎 위에 나비를 얹어 사진을 찍는 사람들을 본다” 며, “단순히 나비를 찍지 말고 나비의 생태를 찍는 것이 중요하다” 고 말했다.
오후 8시 한라산 중턱 성판악에서 야간채집이 실시됐다. 수은등을 켜놓고 뒤에 하얀 천을 설치해 놓자 여기저기서 주광성 나방들이 모여들었다. 처음 해보는 야간채집이라서 대원들은 천막 주위를 떠나지 않았다.
스핀제주나방은 천막에 붙어 기묘하게 생긴 생식기를 내둘렀고, 박각시나방, 하늘나방, 가죽나방 등은 수은등 주변을 맴돌다 대원들에게 잡혔다. 야간채집장에는 초청장없이 찾아온 다른 곤충들도 있었다. 천둥풍뎅이, 땅강아지 등은 요즘 좀처럼 보기 힘든 것들이다. 특히 여왕개미가 등장해 짝짓기를 함으로써 대원들의 눈을 즐겁게 했다.
지구상에는 20만종의 나비와 나방이 있다. 이중에서 18만여종이 나방이다. 나비연구보다 나방연구가 더 어려운 이유를 이해할 만하다. 나비와 나방의 차이가 무엇일까. “더듬이 끝이 두꺼워지는 것이 나비이다. 나방은 더듬이 끝이 가늘고 날개에 비해 몸통이 크다.” 그러나 학문적으로 나비와 나방을 구별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는 신교수의 설명이다.
나비 다니는 길이 있다
8일(목). 대원들이 식사를 마치고 시원한 복장으로 모이자 대장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탐사에 반바지와 반팔셔츠라니.” 이강운탐사대장의 충고를 무시한 대원들은 햇빛에 화상을 입고 벌레들에게 헌혈하는 고통을 마지막 날까지 감수해야 했다.
해발 1천4백m에 있는 사제비동산에 오르는 길목은 숲이 우거져 하늘을 볼 수 없었다. 상큼한 숲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히고 함께 산을 오르는 대원들의 땀내도 느껴졌다. 탁 트인 사제비동산에 도착하니 노루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요즘 잘 볼 수 없는 까마귀들이 하늘을 날았다.
사제비동산과 윗세오름 사이에서 대원들은 포충망을 서툴게 휘둘렀다. 조흰뱀눈나비와 가락지나비가 눈에 띄자 카메라와 포충망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조흰뱀눈나비는 석주명선생과 함께 나비 연구로 이름을 떨친 조복성선생의 성을 땄다. 엉겅퀴꽃에 앉아 꿀을 빠는 조흰뱀눈나비는 모시옷을 차려입은 소녀와 같았다.
나비를 많이 잡지 말라는 뜻일까. 여기저기로 뛰어다니는 대원들 사이로 어느새 안개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대원들은 갑자기 뿌리는 소나기를 흠뻑 맞아야만 했다. 그러나 이 비는 사제비동산에서 내려올 때 다시 만난 장대비에 비하면 애교에 불과했다. 한라수목원에 도착한 것은 오후 3시. 날씨는 언제 비가 왔느냐는 식으로 쾌청했다. 청띠제비나비, 암끝검은표범나비, 제비나비, 호랑나비, 홍점알락나비 등이 날쌘 동작으로 포충망을 피해 다녔다. 청띠제비나비는 제주도와 남해 연안에서만 볼 수 있는 나비로 채집이 금지돼 있다. 신교수는 이 점에 대해서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서울에 사는 사람들은 청띠제비나비를 보기 힘들지만 제주도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나비이기 때문이다.
나비를 잡으려면 나비를 쫓아다녀서는 안된다는 것을 배웠다. 나비는 다니는 길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그 말이 맞았다. 기다리면 놓쳤던 나비가 다시 나타났다. 그날 밤 야간채집조는 한라수목원에서 경찰순찰차의 조사를 받았다. 학생들이 야영하는 줄로 오해받은 것이다.
희귀한 남색남방공작나비 발견
9일(금) 무인도인 지귀도로부터 탐사가 시작됐다. 제주도에 온 지 3일이 됐지만 바다구경을 한번도 못한 대원들의 기대는 그만큼 컸다. 그러나 위미항에서 오징어배를 타고 찾아간 지귀도는 삭막하기 그지 없었다. 10년 전 이곳에 와 본적이 있다는 제주중앙여고 김대호선생은 “예전에는 이곳에 풀이 우거져 나비천국이었다” 고 말했다. 하지만 지귀도에서는 나비를 거의 보기가 힘들었다.
지귀도에서 빠져나온 대원들은 중문 천체연에 도착하자 나비가 다닐만한 시원한 그늘을 찾았다. 나비 길목을 지키면 쉬면서 나비를 잡을 수 있다는 요령을 터득한 것이다. 결과는 역시 좋았다. 네발나비, 긴꼬리제비나비, 남방노랑나비 등이 대원들의 손에 익숙해진 포충망을 피하지 못하고 날개를 퍼득거렸다. 천체연에서 대원들을 즐겁게 한 것은 두점박이쌍쌍벌의 집이었다. 메추리알만한 벌집이 풀잎에 붙어 바람에 하늘거리는 모습은 정말 신기했다.
천백(1,100m)고지는 한라산에서 차로 이동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이다. 휴게소 근처에는 큰줄흰나비, 굴뚝나비, 조흰뱀눈나비가 많았다. 사람들이 버리고 간 음료수나 음식 찌꺼기의 단내를 맡고 나비가 모인 까닭인 듯했다.
오후에는 신교수의 나비특강 2탄이 준비돼 있었다. 신교수는 잡은 나비를 전시하고 표본을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나비를 잡아 놓고 잘 보관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살생이다. 나비를 잡으면 반드시 관찰한 다음 잘 보관해야 한다. 이를 위해 전시(展翅)와 표본만들기를 알아야 한다.”
이날의 가장 큰 수확은 남색남방공작나비를 관찰한 것이다. 남색남방공작나비는 한반도는 물론 제주도에서도 보기 힘든 나비다. 그래서 남쪽나라에서 바람을 타고 일시적으로 날아온 나비가 아닌가 의심을 품기도 했다. 하지만 알을 낳는 것을 보고 이곳에서 서식한다는 것을 알았다. 대원들은 남색남방공작나비를 어디서 보았는지를 말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얼마전 울산 정족산 무제치늪에서 희귀식물인 무제치란이 발견됐다는 보도 이후 난채집꾼에 의해 씨를 말렸다는 사실이 남의 일같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관음사에 진을 쳤던 야간채집조가 밤 11시반이 돼서야 돌아왔다. 손에는 나방이 잔뜩 든 채집통을 들고 있었다. 다음날 새벽 정세호연구원은 냉장고에 보관해 둔 채집통을 꺼내 한마리 한마리 소중하게 탈지솜에 얹고 연화제인 파라디클로벤젠을 뿌렸다. 표본을 만들고 분류하는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므로 우선 잘 보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10일(토). 만장굴로 이동하는 동안 비가 계속 내렸다. 문제는 비가 그치더라도 풀과 나무에 있는 물기 때문에 포충망이 젖는데 있다. 다행히 비가 30여분 내리더니 그치고 따가운 여름볕이 숲을 말려 주었다. 그래서 포획한 나비의 비늘이 상하는 일을 면했다.
대원들은 지금까지 극남노랑나비를 잡아보려고 애를 썼다. 잡은 것마다 남방노랑나비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보니 남방노랑나비라고 알고있던 것들 중에 극남노랑나비가 많았다.
극남노랑나비는 날개끝 검은 띠가 둥근 반면 남방노랑나비는 검은 띠가 요철을 이루기 때문에 구별하기가 어렵다. 그런 줄도 모르고 대원들은 검은 띠가 없는 노랑나비가 극남노랑나비인 줄 잘못 알고 찾아 헤맸던 것이다. 나비도감을 세밀히 볼 필요성을 느꼈다.
하도양어장은 맑은 지하수를 끌어올려 숭어를 기르는 곳이다. 이곳은 왜가리, 백로, 후투티 등이 찾아오는 철새도래지로 유명하다. 시원한 파인애플과 상큼한 하우스 조생귤을 먹고 활력을 찾은 탐사대원들은 큰멋쟁이나비, 호랑나비, 산호랑나비 등 아름다운 나비들을 채집할 수 있었다. 이번 탐사는 비자림에서 채집하는 것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못내 아쉬운지 대원들은 마지막 포충망을 힘껏 휘둘렀다.
첫체험 제자에게 전하고 싶어
오후 5시, 첫날 신교수로부터 나비특강을 듣던 자리. 이번에 나비탐사에 참가한 과학선생들은 거의 대부분 곤충 채집을 해본 적이 없다. 김천농공고 유창석선생은 “이번에 처음으로 포충망을 잡았다” 면서 부끄러움을 표시했다. 또 “현재의 교과서에는 이런 탐구학습 내용이 들어있지 않기 때문에 학생들과 함께 해볼 기회조차 없다” 고 말했다.
올해부터 공통과학이 실시되면서 탐구학습이 강조되지만, 일선 학교에서 이를 시행하는 곳은 거의 없다고 한다. 나비채집을 하려고 해도 선생이 해본 적이 없고, 학생들 역시 입시준비에 도움이 안되므로 달가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선생들은 이와 같은 탐사가 필요하다는 것에 동의했다. 특히 전주농림고 이종기선생은 “과학반이나 학생 탐구대회에 나비채집을 넣어 이번 경험을 살려보겠다” 고 말했다.
돌아가면서 선생들은 나름대로 보고 느낀 일들을 말했다. 수원수성고 최해순선생은 “장수풍뎅이를 잡았는데 이야기하면 잡혀간다고 해서 말하지 않았다” 고 해 모두의 폭소를 자아냈다. 장수풍뎅이, 남색남방공작나비, 청띠제비나비 등 이번에 잡은 모든 나비를 민속자연사박물관에 기증할 예정이므로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최선생을 위로했다. 또 과학동아가 그동안 과학교육에 큰 영향을 끼쳤다면서 좀더 쉽게 내용을 소개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나왔다.
“고랑 몰라 봐서 알주”. 정세호연구원은 제주도 말로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 이라면서 이번 탐사가 과학교사들에게 큰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역시 생물을 이해하려면 교실이 아닌 자연으로 뛰어들어 직접 만져보고 관찰하는 것이 최고다.
“생물 다양성이 얼마나 보존되고 있는지가 앞으로 선진국의 지표가 된다. 나비는 환경보존의 지표동물이다. 나비가 많으면 그만큼 식물의 다양성도 보존돼 있다는 말이 된다.” 신교수는 생물 다양성과 그 보존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탐사에 참가한 과학선생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이번 탐사에는 모두 30여종의 나비와 40여종의 나방을 잡았다. 하지만 그러한 성과가 중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이번 탐사의 보람은 과학선생들이 나비채집의 모든 것을 배웠다는데 있다. 또 이번에 배운 분들이 학생과 동료선생들에게 이야기해 줄 것이다.
11일(일) 대원은 남색남방공작나비, 청띠제비나비 등의 추억을 안고 비행기에 탑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