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용공고나 대학의 이공계학과 입학요강에서 '색맹이 아닌자'란 조건을 흔히 볼 수 있다.색을 구별하지 못하므로 아예 색과 관련없는 학과와 직업을 택하라는말.과연 색맹은 차별받을만한 장애일까.
이야기 하나
초등학교 신체검사날. 가슴둘레, 키, 몸무게 측정이 끝난 다음 선생님은 이상한 책을 펼쳤다. “뭐하는 거야?” “숫자 알아맞히기래.” “재밌겠는걸.” 나도 빨리 하고 싶었다. 드디어 나의 차례. 둥근 원에 이상한 점. 그 속에 그냥 보이는 숫자를 읽었다. “안보이니?” “8.” “이건?” “…” “허 참. 이게 안보이나?” 뭔가를 적으시는 선생님. 그때는 그게 무언지 몰랐다. ‘나도 안경을 껴야하나?’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 그 검사로 인해 색맹이란 단어를 평생 지고 가야하는 것을 알게 됐다. 안쓰러워 하시는 선생님은 그래도 양반이고, 심지어 ‘개나 소’처럼 색을 보지 못하므로 아예 농사나 지으라는 심한 말까지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야기 둘
전자통신분야를 전공한 공업계 고등학교 3학년생입니다. 저는 반도체 회사에 면접도 보고 시험도 봐서 합격을 했습니다. 신체검사를 받고 교육을 잘 받고 있던 중 한 3일 정도 지났나 봅니다. 회사사람이 절 부르더니 퇴사조치를 시켰다고 하더군요. 반도체 칩의 색깔을 구분해야하는데 색맹은 그게 안되기 때문이랍니다. 그동안 공부하면서 각종 전자장비의 색을 구별하는데 문제가 없었는데, 교육받고 뭘 해보지도 못하고 퇴사 당했다는 게 너무 억울하고 괴롭습니다. 투자한 시간이 아깝고, 인생을 걸만큼 제겐 중요한 일이었는데 색맹 하나에 이렇게 좌절이라는 쓴맛을 느꼈습니다.
이 두 이야기는 색 구별에 지장이 있는 색각이상자들의 고민을 털어놓는 인터넷 사이트에 실제로 게시된 글이다. 일반인들에게는 약간 신기한 병 정도로 쉽게 지나치는 색각이상이 당사자들에게는 얼마나 커다란 상처인지를 알 수 있다. 과연 색각이상자들은 이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없을까.
색을 보지 못하는 맹인?
색각이상이란 사물의 색깔을 구분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보통 색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란 의미로 색맹으로 부르며 정도가 좀 덜한 경우는 색약이라 한다. 우리나라에서 색각이상에 대한 검사와 취업제한은 일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이때 처음으로 색맹이란 말이 쓰였다.
하지만 의학계에서는 색맹, 색약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고 색각이상으로 부른다. 색맹이나 색약이란 용어는 당사자나 일반인들에게 일종의 장애나 질병이란 인식을 심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노래를 못하는 사람을 음치라 하듯 색치라 부르기도 한다.
사람이 볼 수 있는 색은 적색, 녹색, 청색 세가지 빛이 상이하게 조합돼 만드는 것으로, 사물에서 반사된 빛을 감지하는 역할은 눈의 망막에 있는 시세포가 담당한다. 시세포에는 약 7백만개의 원추세포와 1억3천만개의 간상세포가 있다. 막대 모양의 간상세포로는 물체의 명암을 구별하며 원뿔모양의 원추세포가 사물의 색을 인식한다.
사물에서 반사된 빛이 들어오면 파장의 차이에 따라 해당되는 원추세포가 자극된다. 원추세포에는 파장이 긴 적색을 인식하는 로우(ρ)세포, 녹색이나 황색과 같은 중파장의 빛을 인식하는 감마(γ)세포, 그리고 짧은 파장의 청색을 담당하는 베타(β)세포가 있다. 그런데 유전이나 약물, 사고 등의 후천적 요인으로 원추세포에 손상을 입은 색각이상자는 세가지 빛 전부나 일부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색각이상에는 세가지 원추세포가 모두 손상돼 색을 전혀 보지 못하고 명암만을 인식하는 전색각이상과, 한가지 세포가 손상돼 색 일부를 보지 못하는 적색각이상, 녹색각이상, 청색각이상이 있다. 이중 전색각이상이나 청색각이상은 드물고, 적색각이나 녹색각이상이 색각이상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우리나라 사람에게 가장 흔한 색각이상도 이 두가지. 적록색각이상으로 적색 또는 녹색을 식별하지 못한다. 적록색각이상자들은 우리나라 남자의 5.9%, 여자의 0.4%를 차지해 약 1백30만명이나 된다.
남자에게 색각이상이 더 많은 것은 색각이상이 유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색각이상의 원인이 되는 유전자는 성염색체인 X염색체에 존재한다. 남성은 X염색체와 Y염색체를 가지고 있고, 여성에게는 X염색체 한쌍이 있다. 색각이상 유전자는 열성 유전자로, 여성의 경우 두 X염색체 중 하나라도 정상이라면 색각이상이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남성은 X염색체가 하나뿐이라서 여성보다 색각이상자가 더 많게 된다.
색각이상이 유전된다는 사실은 일반인들로 하여금 색각이상을 혈우병 같은 유전병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색각이상자들은 나쁜 질병유전자를 자식에게 유전시킨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게다가 진학과 취업에서 불이익을 받는 경우가 많아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어려운 질환자란 인식이 더욱 굳어진다.
색 구분은 정상인과 같아
하지만 이러한 인식은 사회적 편견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색각이상자들이 색을 아예 구분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회적 통념이 잘못이며, 색각이상자란 낙인을 찍는 현재의 색각검사방법도 문제가 많다고 주장한다.
적색각이상의 경우 적색 계통, 녹색각이상의 경우 녹색 계통이 흐리게 보인다. 또 적갈색이나 황록색 등 다른 색과 적색(녹색)이 한데 섞여 있는 경우에는 식별이 잘 안된다. 하지만 전문가들에 따르면, 정도가 아주 심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이 색과 저 색이 다르다고 구분하는데 별 어려움을 못느낀다고 한다. 즉 색각이상자라도 사물의 형태나 명암을 식별하는 것은 정상인과 동일하며, 단지 손상된 원추세포가 담당하는 색만 정상인이 보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적록색각이상자 대부분은 정도가 심하지 않은 중등도(中等度)나 약도(弱度) 색각이상자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색각이상자들은 사회생활에서 일종의 장애자로 취급된다. 예를 들어 옷가게에서 자신이 색각이상자임을 밝히고 옷의 색을 설명해달라고 할 때, 점원들은 신기한 듯 이옷저옷의 색을 되묻거나 동정하는 투의 말을 한다. 색감이 떨어지는 대부분의 남성은 셔츠와 바지 색이 어울리는지 점원에게 묻는 경우가 많다. 이 두 경우가 그렇게 다른 것일까.
색각이상이 사회적 문제가 된 것은 약 1백년 전부터다. 1875년 스웨덴의 라겔라 룬다라는 곳에서 열차 충돌사고가 발생해 9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사고에 대한 조사결과 열차 기관사가 색각이상으로 신호등의 색깔을 잘못 본 것이 참사의 원인이었다. 이후 전사회적으로 색각이상자를 가려내기 위한 검사가 실시됐고, 색각이상자에게는 특정직업을 가지지 못하도록 진학과 취업에 제한을 두게 됐다.
직종별 색각 기준 마련 시급
이처럼 색각검사의 원래 취지는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킬만한 완전색각이상자를 가려내는 일이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이 검사가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한 대부분의 색각이상자를 사회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경찰청의 채용공고에는 ‘색맹 또는 색약이 아니어야 함’이라 돼 있지만 그 근거가 된 경찰공무원임용령 시행규칙에는 ‘색맹이 아니어야 한다’는 문구만 있지 색약에 대한 언급은 없다. 의학계에서는 이미 색맹, 색약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있다. 또 색각이상의 정도를 강도, 중등도, 약도 3단계로 구분해 각 단계별 이상 정도를 설명한다. 전문가들은 이 구분을 더욱더 세분화해서 각 직종에 맞는 색각이상의 세부적 기준을 마련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색각이상자에 대한 취업제한 규정은 이러한 현실을 전혀 반영하지 않고 있다.
색각이상자에 대한 제한은 군입대에서도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공군의 신체검사 기준에는 색맹, 색약이 아니어야 한다는 제한사항이 있다. 이 기준은 항공기 부품과 같은 기계류를 많이 다루는 공군의 특성 때문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모든 공군 장병이 기계를 다루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정확한 검사로 각 개인의 색각이상 정도를 정확히 파악해 적절한 임무를 주는 것이 보다 합리적일 것이다. 육군의 경우 공군과 같은 까다로운 색각이상 제한규정이 없다고 한다. 아무리 군의 특성을 감안한다 해도 육군은 모두 가능하고 공군은 아예 안된다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대한안과협회는 1999년 6월 의학협회로 회신한 색각검사에 대한 의견에서 “(대표적 색각검사표인) 이시하라 구판은 그 오류가 많음이 저자에 의하여 밝혀지고 새로운 신판이 1996년에 출간됐으므로 구판에 의한 검사는 빨리 사라지고 신판에 의하도록 제도적으로 노력해야 할 것”이며, 또 이공계 대학진학제한 문제에 대해서는 “선진국에서도 이미 색각이상자의 진학에 제한을 철폐한지 오래됐으므로 우리나라에서도 색각이상자에게 제한을 두는 것을 없애야 한다”고 명시했다. 실제 많은 안과전문가들은 색각이상의 유무를 기준으로 입학이나 취업제한을 하지말고 실제 학업이나 업무 수행에 지장이 있는지 없는지를 조사해 제한 여부를 결정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연세대 의대 안과학교실의 성공제 교수는 공공의 인명이나 재산과 관련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색신표 검사에서 색각이상으로 분류됐어도 간이 신호등 구별 검사에서) 신호등의 색을 정상인처럼 정확히 느끼지 못하더라도 빨간불, 파란불을 구분할 수만 있다면 면허증을 발급하듯이, 은행원은 돈이나 전표를, 그리고 전기기술자는 전선의 색을 잘 구별하는지의 여부를 잘 확인하는 것이 중요한 기준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즉 정확한 색각이상검사를 통해 각 개인별 이상의 정도를 정확히 측정해야 하며, 각 직업별로 요구되는 색 변별력에 대한 기준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몇십년 전에 마련된 색각이상자 취업제한규정이 아직도 많은 기업과 관공서에서 적용되고 있지만, 외국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식민통치 시절 우리나라에 색각이상자 규제조항을 도입한 일본도 대부분의 이과 계통 대학 진학에 대한 제한을 철폐했으며, 색각이상자의 직업적성도 세부적으로 구분해 개인이나 기업이 참조하도록 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기관사, 조종사, 보석감정사, 전기기술자 등 색 구분이 무엇보다 중요한 몇몇 직종을 제외하고는 기본적으로 색각이상자에 대한 취업제한을 두지 않고 있다. 그리고 만약 진학이나 취업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면 대통령 직속 위원회에 바로 연락할 수 있다.
다행히 최근 국내대학에서도 입학 제한 규정이 완화됐다. 1993년 연세대학교에서는 신체검사 자체를 없애 모든 장애자들이 본인 스스로의 책임으로 전공 선택을 하도록 했으며 뒤이어 서울대학교도 비슷한 결정을 내린 바 있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대학에서 예전의 규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고, 규제가 완화된 경우에도 최종적으로 입학 여부를 학교 담당자의 판단에 맡기는 등 문제점은 여전하다.
아직까지 색각이상이 진화과정에서 왜 사라지지 않았는지, 사람과 침팬지를 제외한 대부분의 생물들은 색을 인식하지 못하는지에 대한 과학적 설명은 없는 실정이다. 그러므로 섣부르게 색각이상을 질병이나 장애로 취급해서는 안된다. 나와 다르다고 구별하는 것보다는 색 식별이 좀더 쉽게 도로표지판이나 신호등에 형광색을 도입하고, 색각이상자에게 불리하게 만들어진 지도의 색 배합이나 조그만 색스티커로 상품에 표시하는 일을 다시 생각해보는 등 나와 함께 할 수 있도록 하는 배려가 더욱 필요하다.
숫자찾기에서 컴퓨터 검사까지 다양한 측정법 개발
현재 사용되는 색각이상검사에는 어떤 방법들이 있을까.우선 대부분의 학교나 기업체에서 색각검사법인 이시하라식 색신표는 여러가지 색속에 감춰진 25가지의 숫자나 도형을 판별하도록 돼 있다.그러나 판별능력이 개인이나 연령에 따라 오차가 많고 색각이상의 정도를 잘 알 수 없다.서울대 의대 한천석 교수가 만든 한식 색신표도 기본적으로 이시하라식과 동일하다.
100휴검사(100-hue test)는 정상인이 구별가능한 공깃돌 모양의 85개 색패를 색깔 순서대로 배열하게 해 색각이상을 알아내는 방법으로,정확도가 높은 검사지만 검사나 결과분석에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단점이 있다.이를 간략하게 만든 이중 15휴검사(Double-15 hue test)는 15개의 색폐를 이용하기 때문에 좀더 빠르게 검사할 수는 있으나 100휴검사에 비해 정확도가 떨어진다.
그외 1907년 처음 고안된 아노말로스코프(anom-aloscope)법은 렌즈를 통해 피검자가 세가지 색의 빛을 구분이 가능한 데까지 근접시키는 방식으로 색각이상의 정도를 측정한다.색각이상의 분류나 정도 구분을 가장 정확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 안과의사들의 공통된 생각이다.하지만 이 방법도 장비가 비싸고 조작이 복잡하며 검사에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우리나라에선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다.
이렇듯 색각이상을 검사하는 장비는 여러 종류가 있으며 나름대로의 장점과 단점을 지니고 있으나 우리나라의 현실은 거의 모두 이시하라식 색신표만을 사용하고 있다.전공이나 직업에 따라서 색각구별 능력의 필요성은 많은 차이를 보이는데 비해 검사방법은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인 셈이다.
최근에는 이 문제를 컴퓨터를 활용해 해결해보려는 시도도 있다.대한안과학회 전산정보위원장 이태원박사는 이시하라식 색신표와 아노말로스코프법의 장점을 결합해 색신표를 컴퓨터 모니터에 구현시켰다.오차를 최소화하기 위해 중복 검사를 하도록 프로그램돼 있으며 색각이상 정도를 몇%까지 구체적으로 알려준다.이박사는 이 방법으로 다양한 직종의 종사자들을 검사해서 각 직종에 맞는 색각 기준을 만들 예정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