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건대 부채를 휘두르면 바람이 이는데, 바람은 어디로부터 나오는가? 만약 부채에서 나온다면, 부채 속에는 언제부터 바람이 있었단 말인가? 만약 부채에서 바람이 나오지 않는다면, 도대체 바람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허공은 어떻게 스스로 바람을 일으키는 것일까?”
이 글은 화담 서경덕(徐敬德, 1489-1546)이 친구로부터 부채를 선물 받고 이에 감사하는 뜻으로 시를 지어 보내면서 서문으로 붙인 글의 일부다. 이어지는 설명은 이렇다. “바람이란 곧 기(氣)다. 기는 언제나 공간에서 분리되지 않는다. 이 부채를 휘둘러 움직임을 주자마자 기가 밀리고 쫓겨 물결치듯이 바람이 이는 것이다.” 기, 부채, 바람의 관계를 통해 자연현상의 원인을 밝히고 설명하려는 서경덕의 과학적 탐구정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죽음 앞에서도 편안해
서경덕이 생각했던 ‘기’는 허공을 가득 채우고 만물을 만들며 변화를 일으키는 실체다. 기(氣)가 모이면 사물이 되고 기가 흩어지면 사물이 없어진다. 그러므로 사물이 없어지는 것은 뭉쳤던 기가 그냥 흩어지는 것일 뿐이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가 쓴 작은 논문인 ‘귀신사생론’(鬼神死生論)은 귀신의 문제를 기의 모임과 흩어짐으로 설명하려 한 글이며, ‘온천변’(溫泉辨)에서는 온천을 땅 속에 갇힌 양기(陽氣)가 작용해서 따뜻한 온천물이 나오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모든 자연의 변화를 기의 운동으로 보았던 서경덕은 생명 또한 기가 모여있는 것이며 죽음은 모였던 기가 다시 흩어져버리는 것에 불과하므로 죽음에 임해 두려워하거나 슬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생사와 귀신의 문제를 이미 나름대로 이해했기 때문일까, 서경덕은 자신의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도 초연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한 제자가 임종을 앞둔 그에게 “선생님 지금 심정이 어떠하십니까?”라고 묻자, 그는 “삶과 죽음의 이치를 안 지 이미 오래니, 심경은 편안하기만 하다”고 대답했다.
서경덕은 또한 수학적인 논의에 관심이 많았는데, 역법(曆法)과 산학(算學), 음운학(音韻學) 등의 분야에 조예가 깊었다. 그의 문집인 ‘화담집’(花潭集)에 실려있는 ‘성음해’(聲音解)나 ‘황극경세수해’(皇極經世數解), ‘육십사괘방원지도해’(六十四卦方圓之圖解), ‘괘변설’(卦變說) 등이 이러한 논의를 보여주는 글이다.
새는 어떻게 날까
서경덕은 일생동안 자연현상의 탐구에 열중했는데, 이는 그의 유년시절부터 시작된 것이다. 다음의 일화는 그가 어려서부터 자연 속에서 사색하고 궁리하는 일에 집착했음을 잘 보여준다. 어린 시절 집안이 가난했던 서경덕은 들에 나가 나물을 뜯어와야 했다. 하지만 매일 늦게까지 들에 있다가 돌아와도 바구니에는 나물이 조금밖에 들어있지 않았다. 이상하게 여긴 그의 부모가 까닭을 물으니, 어린 서경덕이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저는 나물을 뜯다가 새 새끼가 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첫날은 땅에서 한 치를 날고 다음날은 두 치, 다시 그 다음날은 세 치를 날다가 차차 하늘을 날아다니게 됐습니다. 저는 이 새 새끼의 나는 것을 보고 속으로 그 이치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으나 터득하지 못해 나물도 얼마 못 뜯고 늦게 돌아온 것입니다.”
열 네살 때의 일이다. 서당에서 글을 읽다가, 서경(書經) 첫머리에 나오는 ‘기삼백육십유육일’(朞三百六十有六日)로 시작되는 구절에 이르게 됐다. 그런데 이 구절에 대해 서당의 선생님은 원리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그러자 서경덕은 보름동안 골똘히 사색한 끝에 1년의 길이가 365와 4분의 1일이고, 윤년이 됐을 때 ‘1년은 366일’이라는 원리를 스스로 터득했다고 한다. 또한 열 여덟 살 때는 대학(大學)의 ‘사물을 탐구해서 앎에 이른다’는 대목에서 깨우침을 얻고, 이후에는 자기가 모르는 것을 벽에다 써 붙여 놓고 밤낮으로 그것을 보면서 원리를 깨닫게 될 때까지 궁리했다고 한다.
이렇듯 어려서부터 자연에 대한 사색과 궁리를 즐겼던 서경덕은 평생 개성의 ‘화담’이라는 계곡에서 살면서 사색과 연구에 정진했다. 그의 호 ‘화담’은 여기에서 따온 것이다. 서경덕의 학문과 인격을 알고 있었던 조정에서는 그에게 수 차례 벼슬을 내리면서 정치에 참여할 것을 청했으나, 그는 이를 거절하고 결코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19세기에야 재평가
서경덕에게 있어서 학문의 목적은 자연현상 자체에 대한 탐구를 통해 우주적 이치를 체득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바로 이런 이유로 서경덕의 자연철학은 이후 조선의 성리학자들에 의해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성리학자들은 서경덕과 달리 자연철학에 대한 탐구보다도 도덕철학과 사회적 윤리의 정립을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서경덕의 철학은 조선말에 이르러 새롭게 주목받기 시작했는데,이는 그의 철학이 지닌 과학적 성격을 후세의 학자들이 인식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19세기 중반 최한기가 정립한 기철학 체계는 서경덕의 기철학을 계승,발전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특히 최한기는 당시 전래되던 서양의 근대과학을 수용하는데 적극적이었는데,그런 과정에서 그는 차츰 서양의 과학이 수학을 기초로 자연세계를 이해하려는 체계임을 인식하게 됐다.그리고 최한기는 수백년 전에 이미 자연현상을 수학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한 선배가 조선에 있었음을 강조했는데,그가 바로 서경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