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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은 스승의 시신을 해부했을까?

 

'동의보감'에 그려진 신형 장부도.인체해부도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단순하다.허준이 인체를 해부하지 않았다는 하나의 증거다.


드라마나 소설은 흥미있고 감동적이기는 하지만 때때로 역사적인 사실을 왜곡하기도 한다.명의 허준이 스승의 시신을 해부하는 장면은 너무나 흥미진진하지만 한의학의 본질을 크게 오해한 것이다.왜 전통 의학에는 해부학이 없었을까.

‘소 설 동의보감’이나 드라마 ‘허준’의 하이라이트는 허준이 스승 유의태가 자신의 시신을 제자의 연구를 위해 내놓는 대목이다. “어떻게 스승의 몸에 칼을 댈 수 있느냐”며 허준이 망설이자, 삼적대사는 “스승의 숭고한 뜻을 그르칠 셈이냐”고 다그친다. 이윽고 유의태의 몸에 칼을 댄 허준의 손이 떨리고, 전신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인체의 내부를 들여다 본 허준은 놀랄만한 깨달음을 얻고, 그것을 그림으로 옮긴다. 이른바 ‘신형장부도’라는 것이 그것이다.

시체 해부는 완전한 ‘뻥’

한마디로 이 스토리는 완전한 ‘뻥’이다. 그것이 역사적 진실인가 여부를 떠나 상식적인 수준에서 생각해봐도 그렇다. 시신 1구를 해부해서 엄청난 의학적 진리를 발견한다? 더 나아가 올바른 병의 원인과 치료법을 얻어낼 수 있다? 여기서 잠시, 우리가 생물학 실험 시간에 현미경을 들여다보던 때를 회상해보자. 세포를 관찰하는 첫시간에는 현미경 속에 보이는 것이 무엇이 무엇인지를 잘 알 수가 없다. 뿌연 것과 약간 뚜렷한 것과 제법 뚜렷한 것이 ‘무질서’하게 엉켜있을 뿐이다. 각각의 물체에 대한 이해는 실습지침서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세포벽이 어떻고, 핵이 어떻고, 미토콘드리아가 어떻고…. 그런데 이 실습지침서란 것이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인가? 선대 과학자들의 무수한 과학적 연구를 토대로 작성된 것이다.

해부학도 마찬가지이다. 병든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 한 부위와 다른 부위의 연결, 표피부분과 심층부위의 연결 따위를 해부학 지침서와 스승의 가르침이 없는 초심자가 한눈에 이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아무리 당대의 명의라 할지라도 해부학 지식이 전무한 허준이 시체 1구 갈라서 신체 내부의 구조와 그것의 생리학, 병리학적 의미를 읽어낸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때문에 해부를 처음 해보는 사람이 단지 시체 1구를 보고 의학적 진리를 밝혀냈다고 하면 그것은 사기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살아있는 신체의 운용 중시

서양 의학이 단지 해부를 했기 때문에 현대의학의 해부학, 병리학, 생리학을 일궈낸 것은 아니다. 뛰어난 의학자들이 수많은 시체를 해부하고, 실험하고, 검증의 과정을 거쳐서 그런 학문의 기초가 세워진 것이다. ‘소설 동의보감’과 드라마 ‘허준’은 이런 기초적인 상식을 철저히 무시하고 있다. 마치 뛰어난 의학 영웅 1인이 단숨에 의학적 진리를 움켜잡은 듯 묘사하고 있다. 이런 측면을 볼 때 그 소설과 드라마를 ‘역사 소설’과 ‘사극’으로 부르는 것도 부적합하다. 오히려 ‘무협지’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허준의 ‘시신 해부’는 역사적 사실에도 부합되지 않는다. 그것은 다음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그 어떤 사료에도 허준이 시신을 해부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둘째 허준의 한의학은 결코 시체 해부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한의학의 발전은 시체를 갈라 병이 위치한 곳을 찾아내어 그곳을 집중해서 공략하는 근대서양의학과 완전히 다른 식으로 이루어졌다. 죽은 시체로부터 어떤 지식을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신체의 운용을 중시했다. 즉 몸 안팎의 균형과 불균형, 각 기관 사이의 유기적 연결에 관심을 둔 것이다. 특히 허준의 경우에는 생명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몸 안의 정(精), 기(氣), 신(神)의 수양에 각별한 신경을 기울였다. 소설과 드라마 속의 시체 해부는 이러한 실제 허준의 작업과 의학적 성취를 크게 왜곡하고 훼손하는 것이다.

허준의 외과 수술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허준의 청년시절에 대해 드라마는 억세고 의협심 강한 인물로 묘사했다.


한의학은 해부학에 바탕을 둔 학문은 아니지만 몸에 칼을 대는 전통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외과수술이라 할 수 있는 것이 몇몇 분야에서 존재했다. 종기 치료법, 신체 기형 부위 수술법, 자상(칼과 창 따위에 상해 내장이 밖으로 나온 것)으로 인해 생긴 상처에 대한 수술법 등이 그것이다.

‘발배’(發背) 또는 ‘발저’(發疽)로 부르는 ‘등에 난 종기’는 전통 시대의 불치병 가운데 하나였다. 역사 기록을 보면, 신라의 신무왕, 후백제를 세운 견훤, 고려의 예종과 신종이 이 병으로 죽은 것으로 나와 있다. 조선시대에는 획기적인 외과수술적 종기 치료법이 있었다. 인조 때의 의사 백광현과 그의 문하들은 ‘치종지남’(종기 치료 지침서)이라는 책을 펴냈는데, 여기에는 놀랄만한 외과수술적 방법이 담겨있다. 예리한 수술 도구를 써서 종기를 째고 여러가지 약을 써서 뿌리를 제거하는 각종 방법이 그것이다. 지금의 눈으로 보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유래가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백광현과 그의 문하가 발전시킨 이 같은 종기수술법은 그들보다 몇십년 앞선 인물인 허준의 의학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내용이다.

한의학에는 민간에서 ‘언청이’(입술과 턱 한쪽이 기형적으로 쳐진 증상)라 부르는 선천적 장애에 대한 외과적 수술이 존재했다. 그것은 오늘날의 수술 형식과 거의 똑같은 것이다. 중국에서는 당나라 때의 한 의사가 이런 수술을 10여 차례 성공적으로 치러냈다고 하며, 청나라 때에는 이런 수술법 내용이 의학 서적 안에 자리잡았다. 중국의 경우와 달리 조선에서는 ‘언청이’ 수술에 대한 내용이 알려져 있지 않다. 허준의 ‘동의보감’에도 이에 관한 내용은 없다.

화타의 마취 수술

옛적에도 칼이나 창 등 쇠붙이에 상한 증상이 매우 흔했다. 전투와 싸움의 주된 무기가 이런 쇠붙이였음을 상기하자. 쇠붙이에 상한 여러 증상 중 내장이 바깥으로 튀어나온 경우도 흔했다. 그러나 속수무책으로 당하지는 않았다. 이런 증상을 해결하는 방법에 대해서 아주 오래 전부터 한의학에서도 깊은 관심을 가져왔다. 우리나라에서도 현존하는 최고(最古) 의학서적인 ‘향약구급방’에 이미 밖으로 나온 내장을 안으로 넣고 봉합하는 방법이 실려있다.

허준의 ‘동의보감’에는 그보다 훨씬 세련된 방법이 보인다. 직접 ‘동의보감’의 내용을 보자. “쇠붙이에 상했어도 끊어진 장의 양끝이 다 보일 때는 꿰매는 방법으로 고칠 수 있다. 그 방법은 다음과 같다. 끊어진 장의 양끝이 다 보이면 빨리 바늘과 실로 꿰맨 다음 닭 벼슬의 피를 발라서 기운이 새지 않게 하고 빨리 뱃속으로 밀어 넣어주면 된다.” 이처럼 바늘과 실을 써서 꿰매는 방법은 오늘날 현대의학에서 말하는 봉합술과 그 방법이 크게 다르지 않다.

마지막으로 한의학의 외과수술과 관련해 마불산이라는 마취제의 존재와 화타의 전설적인 수술을 빠뜨릴 수 없다. 소설 삼국지에 나오는 명의 화타는 장을 갈라 몸 내부 장기의 병을 고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때 마취제로 마불산을 사용했다고 한다. 관련 기록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만약 병이 덩어리가 되어 안에 있는데도 침이나 약이 미치지 못하여 마땅히 수술해야만 하는 사람은, 마불산을 마시고 조금 있으면 바로 취하여 죽은 듯이 알지 못한다. 이때 갈라서 꺼낸다. 병이 만약 장 속에 있으면 장을 잘라 씻고서 배를 꿰매고 고약을 바른다. 4-5일이 지나면 아프지 않게 된다.”

마취제를 사용한 화타의 수술법은 한의학의 역사상 가장 본격적인 수술법이었다고 할 수 있으나, 그런 전통은 화타 이후 철저히 무시됐다. 오직 위에서 살핀 것처럼 자상으로 인한 상처의 봉합과 신체적 장애를 바로 잡아 주는 수술, 종기치료술 정도가 존재했을 뿐이다.


한의학에서는 서양의학 같은 내과수술의 전통은 없었지만 종기를 째고 창칼에 베인 상처를 꿰매는 외과수술은 많이 시행됐다.


철저했던 검시

전통 사회에서는 의학적 이유라 하더라도 시체에 흠집을 내는 것은 금기에 속했다. 이에 대해 두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첫째는 허준과 동시대의 인물인 전유형에 관한 것이다. 그는 임진왜란 중 뒹구는 시체를 해부하고 장기를 관찰해 오장도를 그렸다는 인물이다. 이런 이야기가 이익의 ‘성호사설’에 전한다. 시체를 해부했기 때문에 놀랄만한 의술을 얻었다는 세간의 풍문과 함께, 이익은 “시체를 갈랐기 때문에 제 명대로 죽지 못했다”는 비난을 같이 실었다. 또 다른 하나는 개항 직후 신사유람단으로 일본 병원을 견학한 송헌빈이란 인물의 견학기이다. 해부도와 해부용 인형 등을 보고 나서 그는 “정말로 끔찍하기 짝이 없다. 이는 인술을 하는 자가 할 짓이 아니다. 고약하고 고약하다”고 서양의 해부술을 비난했다.

이렇듯 조선시대에는 인위적인 시체 해부를 좋게 보지 않았다. 그러나 살해당한 시체의 검시에는 매우 철저했다. 시체에 난 상흔을 분석해 살해 방법과 동기를 추정해내는 ‘과학’을 발달시켰다. 이른바 무원록(살인자를 밝혀내 억울함이 없도록 한다는 뜻) 전통이 그것이다. 세종 때의 ‘신주무원록’과 영조 때의 ‘증수무원록’이 이 전통을 대표한다. 그 성취가 놀라와서 근대 서양의학이 도입된 후에도 한참 동안 이 법의학 지식이 재판에 그대로 활용될 정도였다.

“칼에 찔렸는가 도끼에 찍혔는가? 목매달아 죽은 것인가 죽인 후 목을 매단 것인가? 토막 살인인가 살해 후 토막을 낸 것인가? 독살인가 아닌가?… ” 모든 유형의 살해 방법에 대한 ‘과학적’ 분석이 무원록의 내용을 이룬다. 그것의 과학성은 초기 분석부터 시작한다. 다음은 상흔이 왜곡 없이 드러나도록 한 좋은 예. “시체를 정확히 관찰하려면 시체를 깨끗이 씻어서 상처를 검사해야 한다. 정해진 법에 따라서 술 찌꺼기, 초(醋) 등을 사용해 시체에 씌우고, 사망자의 옷가지로 완전히 덮는다. 그 위에 따뜻한 초와 술을 붓고, 깔 자리로 한 시각 가량 덮어두면, 초와 술의 기운이 스며들어 시체가 부드러워진다. 이를 기다려 덮었던 것을 벗기고 술 찌꺼기와 초를 물로 씻어낸 다음 검시를 한다. 만일 행인의 말을 따라 술과 초로만 슬쩍 씻으면 상처의 흔적이 나타나지 않는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조선시대에도 살인 사건은 매우 엄중히 다루었다. ‘신주무원록’이나 ‘증수무원록’을 편찬하게 된 동기도 혹시라도 잘못 판정해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경우가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실제 살인 사건이 벌어진 경우, 그 지방의 관아에서는 수령이 책임을 지고 시신을 조사하도록 돼 있었고, 그것도 모자라 도 관찰사가 다시 검사해 확인했다. 이를 각기 초검, 재검이라 한다. 사건이 미묘한 경우에는 심지어 3검, 5검까지 행해 ‘억울함’이 없도록 노력했다.


침 놓을 자리를 알려주는 인체경락도.해부학 없이 신체 내부의 흐름을 정리했다는 것은 전통의학의 체계가 서양과 달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로 과거 재단 말아야

‘허준의 시신 해부’가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그것이 엉터리라고 해도 반면 교사로 삼을 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 주제를 통해서 한의학과 서양의학이 어떻게 다르며, 허준 의학의 특징이 무엇인지를 효과적으로 짚어낼 수 있다. 또한 전통 사회에서 시신 해부에 대한 생각이 어떠했으며, 해부학과 어느 정도 유사한 성격을 지닌 외과수술이 어떤 식으로 존재했는지를 살필 수 있다. 이런 고찰을 통해 과거의 의학과 문화가 현재의 그것과 사뭇 다른 것을 깨달을 수 있다. 또한 그렇게 다른 차이를 무시하고 현대적 시각을 과거의 의학 문화에 그대로 적용했을 때 얼마나 심각한 오류가 생기는지를 명확하게 알 수 있다. ‘허준의 스승 해부’는 과거의 문화를 오늘날의 시각으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는 분명한 가르침을 우리들에게 일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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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04월 과학동아 정보

  • 신동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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