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병으로부터 건강을 지키는 최선의 방법은 예방이다. 병으로 앓기 전에 병균이 몸안으로 침투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 제일 좋다는 말이다. 누구나 아는 평범한 얘기지만 이를 실제로 실현시키기는 쉽지 않다. 평소 운동을 열심히 해서 면역력을 키운다 해도 뜻하지 않은 병균으로부터 공격당하는 일이 잦다. 더욱이 막 태어난 아기의 경우 병균에 대한 강한 저항력은 턱없이 약하기 마련이다.
현실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있다. 바로 백신이다.
가짜 병균의 등장
1981년 세계보건기구(WHO)는 “천연두가 지구에서 완전히 사라졌고 소아마비도 조만간 지구에서 자취를 감출 것”이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백신 덕분이다.
백신은 일종의 ‘가짜’ 병균이다. 죽거나 기능이 약해진 병균, 또는 그 몸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병균으로서의 자격은 미달인 셈이다. 하지만 이를 우리 몸에 접종하면 유익한 효과가 발생한다. 몸이 ‘가짜’ 병균을 ‘진짜’로 알고 방어체계를 가동시키기 때문이다. 그 덕에 나중에 ‘진짜’ 병균이 몸에 침투해도 이와 대등하게 맞서 싸울 수 있는 ‘수호군단’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언제부터 백신의 원리를 알았을까. 놀랍게도 그 시기는 2천5백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430년 그리스의 유명한 역사가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전쟁(아테네와 스파르타간의 전쟁) 기록에 따르면 “한번 병에 걸린 사람이 환자를 간호할 수 있다” 라고 서술돼 있다. 전쟁터에서 의사를 두렵게 만드는 것은 환자를 치료하다 자신에게 병이 옮아버리는 일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질병에 걸렸다가 나은 사람을 간호의 적격자로 선택했다. 즉 병에 걸려본 사람은 이미 면역력을 갖췄기 때문에 똑같은 병에 다시 걸리지 않는 현상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면역이란 용어는 라틴어로 ‘면제’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질병으로부터 면제됐다는 뜻이다.
하지만 백신의 개념이 의학에 실제로 적용되기까지 2천여년의 시간이 흘렀다. 15세기 중국과 터키에서는 인위적으로 천연두(온몸에 좁쌀만한 종기와 고열을 발생시키는 질환) 바이러스를 접종시켜 면역반응을 유도하는 종두법이 실행됐다. 환자의 천연두 부스럼딱지를 어린아이의 코나 상처를 낸 곳에 접종시켰을 때 사망하는 확률(0.5-2%)은 천연두가 자연적으로 감염됐을 때보다(12%) 훨씬 적게 나타났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천연두 바이러스는 독성이 강해 비록 부스럼딱지라 해도 다른 사람에게 접종시켰을 때 오히려 멀쩡한 사람도 병에 걸리게 만든 사례가 종종 발생한 것이다. 병균의 기능을 약하게 만드는 합리적인 기술이 없던 당시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소젖 짜는 여인의 비밀
1798년 영국 의사 에드워드 제너는 천연두 바이러스 대신 이보다 독성이 약한 우두 바이러스를 사용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했다. 제너는 우연히 우두에 걸린 소젖짜는 여자들이 천연두에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우두는 원래 소에게 발생하는 질병이며 증상은 천연두와 비슷하다.
제너는 우두 고름을 사람에게 주입하면 그 사람은 천연두에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8세 소년에게 우두 고름을 주입하고 의도적으로 천연두에 감염시켰다. 그러자 제너의 예상대로 그 소년은 천연두에 걸리지 않았다. 이 결과는 무엇보다 다른 바이러스를 이용해 동일한 면역 효과를 유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중요한 업적이었다. 물론 사람에게 의도적으로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감염시키면서 실험을 수행했다는 윤리적인 비난은 피할 수 없었다.
제너의 종두법은 곧바로 전 유럽에 확산돼 실행됐다. 하지만 이 기술이 다른 질병에 적용되기까지 또다시 1백여년의 시간이 흘렀다.
1880년 루이 파스퇴르 박사는 가축에게 콜레라병을 일으키는 박테리아를 배양하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전혀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실험실의 한 연구원이 닭에 접종시키려고 박테리아를 배양했다가, 그만 깜박 잊고 며칠 동안 여름휴가를 다녀온 후에야 박테리아를 닭에 주입했다. 흥미롭게도 이렇게 접종된 닭들은 약간의 아픈 증상을 나타냈을 뿐 조만간 건강을 되찾았다. 며칠 사이에 박테리아에 어떤 이상이 발생했음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이때까지 파스퇴르는 별다른 문제의식을 갖지 못했다.
이후 연구원들은 다시 실험을 수행하기 위해 새로운 닭을 구입했다. 그런데 당시 연구비 사정상 닭이 모자랐기 때문에 이전에 회복된 닭들을 실험용 샘플에 포함시켰다. 놀랍게도 박테리아를 주입하자 새로 구입한 닭은 모두 죽었지만 이전에 회복된 닭은 전혀 병에 걸리지 않았다.
파스퇴르는 배양된 박테리아를 며칠 동안 방치해둔 결과 병균의 독성이 약해졌다는 점을 알아챘다. 그리고 이 약해진 병균을 접종하면 나중에 독성이 있는 병균에 의한 질병을 예방할 수 있다고 가정했다(그림1). 이후 파스퇴르는 이 원리를 다른 가축에게 적용시킨 결과 성공적으로 질병이 예방된다는 점을 증명했다. 면역학과 백신분야가 학문으로 정립되는데 결정적인 촉매제가 된 일이었다.
파스퇴르는 약해진 병균을 ‘백신’(vaccine)이라고 명명했는데, vacca는 라틴어로 소를 뜻한다. 제너의 업적인 우두 접종법을 기념하기 위해서 이름을 붙였다.
노벨상 수상자 25명 배출
1885년 파스퇴르는 처음으로 사람에게 적용되는 백신을 개발했다. 광견병 백신이었다. 그는 미친개에 물린 한 소년에게 백신을 주입했으며, 예측대로 이 소년은 광견병에 걸리지 않았다.
이 소년은 나중에 파스퇴르 연구소의 관리인이 됐다. 1940년 2차 대전 당시 나치군이 프랑스 파리를 점령한 후 파스퇴르 박사의 연구실 열쇠를 달라고 했을 때 그는 목숨을 바쳐서 열쇠를 건네주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파스퇴르 이후 수많은 질병들이 백신접종에 의해 정복돼 왔으며, 매년 수천만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구하고 있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아직 백신이 어떤 원리로 인체의 면역력을 강화시키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메커니즘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의 연구결과로도 1900년대에 관련 분야에서 노벨수상자가 25명이 배출됐다. 즉 백신접종을 비롯해 그 방어 메커니즘을 이해하고자 하는 면역학 분야는 생명현상 자체의 신비를 규명하는데 가장 중요한 연구영역이다.
아직도 해당 백신이 개발되지 않았거나 백신접종을 받지 못해 각종 전염병으로 목숨을 잃는 사람이 매년 1천7백만명에 이르고 있다(그림2). 더욱이 백신 연구는 천문학적인 고부가가치를 낳을 수 있는 유망한 분야다. 미래에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경제적인 이득을 얻을 뿐 아니라 노벨상에도 도전하고 싶은 젊은 생명과학도라면 한번 과감하게 덤벼볼만한 연구 분야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