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에서 정이십면체가 변형된 숨은 입체 도형을 찾아보자.꼭 눈으로 보이는 것만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분자세계에서 건축물까지 정이십면체가 어떤 모습으로 등장하는지 알아보자.
우리는 삼차원 공간에 살고있기 때문에, 수학에서 다루는 입체도형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그 중 매우 다양하게 접할 수 있는 것이 정이십면체다. 정이십면체는 정다면체 중에서 면이 가장 많은 많은 것으로 정삼각형인 면이 20개, 꼭지점이 12개, 모서리가 30개 있다. 관심을 갖고 주변을 둘러보자. 정이십면체는 어디에 숨어 있는가.
정이십면체로 축구공 만들기
축구공은 구처럼 보이지만 사실 정오각형과 정육각형의 가죽을 이어 붙인 것이다. 바람을 넣어 부풀리지 않았다면 이것은 분명히 ‘다면체’였을 것이다. 면이 두 가지의 다각형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정다면체는 아니다. 그렇다면 축구공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정답은 “정이십면체로부터 만들 수 있다”이다.
모든 면이 정삼각형만으로 이루어진 정이십면체로부터 정오각형과 정육각형 면을 가진 축구공이 어떻게 만들어질까. 만드는 과정은 매우 간단하다. 정이십면체의 각 모서리를 삼등분하고, 각 꼭지점을 중심으로 잘라내자. 그러면 각 꼭지점에는 5개의 면이 모이므로 꼭지점의 개수만큼 12개의 정오각형 면이 새로 생기고, 원래의 20개의 정삼각형 면은 정육각형이 된다. 이것이 바로 꼭지점이 60개이고 모서리가 90개인 ‘끝이 잘린 정이십면체’다. 가죽으로 이런 다면체를 만들고 바람을 넣으면 축구공이 만들어진다. 두 가지 이상의 정다각형 면으로 이루어지고 구에 내접하는 다면체를 ‘준정다면체’ 또는 ‘아르키메데스의 입체도형’이라고 한다. ‘끝이 잘린 정이십면체’는 13가지의 준정다면체 중 하나이다.
실험실의 축구공 풀러렌
축구공은 운동장만이 아니라 화학 실험실에도 존재한다. 다이아몬드와 흑연 분자는 순수하게 탄소로만 이루어진 것으로 유일한 탄소 분자 형제들이었다.
그런데 1985년 탄소만으로 이루어진 세번째 분자가 실험실에서 합성됐다. 축구공의 60개의 각 꼭지점에 탄소가 위치하는 C60이라는 합성물이 바로 그것이다. 이 합성물을 발견한 리차드 스몰리(Richard Smalley)와 로버트 컬(Robert Curl), 해롤드 크로토(Harold Kroto)는 이 공로로 1996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축구공이 무수히 많은 발길질에도 끄떡없듯이 이 합성물도 대단히 높은 온도와 압력을 견뎌낼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안정된 구조를 갖고 있다. 따라서 윤활제, 공업용 촉매제, 초전도체, 축전지, 약품 전달 매체 등으로 이용될 가능성이 높다. 너무 안정된 구조 때문에 쉽게 이용되기가 어렵다는 주장도 있지만 신물질로의 가능성이 높은 것은 사실이다.
그 뒤 이와 유사한 합성물이 발견됐다. C60과 같이 탄소가 12개의 오각형 및 몇 개의 육각형을 형성하면서 이루어진 합성물들을 통틀어 ‘풀러렌’이라고 한다. 눈에도 보이지 않는 풀러렌이 과학자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축구공과 같은 구조를 갖는다는 친숙함 때문이 아닐까. 한마디로 풀러렌은 실험실의 축구공이다.
적은재료 큰 공간
풀러렌 중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C60을 간단히 ‘축구공’(buckyball)이라고 부르는데, 정식 명칭은 ‘벅민스터풀러렌’(buckminster-fullerene)이다. 이것은 입체도형을 활용해서 멋진 건축 구조물을 고안한 리처드 벅민스터 풀러(Richard Buckminster Fuller, 1895-1983)의 이름을 딴 것이다.
리처드 풀러는 합금, 합판, 플라스틱 등의 자재로 돔을 형성하고 그 아래에 가능한 한 큰 공간을 얻는 건축 양식인 ‘지오데식 돔’(geodesic dome)을 개발해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지오데식 돔은 정다면체와 구, 그리고 건축 사이의 관계를 멋지게 보여준다. 지오데식 돔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이것도 역시 정이십면체에서 출발한다. 커다란 정삼각형을 각 면이 합동인 정삼각형으로 분할하자. 그리고 이것을 구 안에 내접시키고 각 꼭지점을 구면에 투사시키자. 그러면 모든 면이 거의 같고 거의 정삼각형이며 구와 더욱 비슷한 다면체가 된다. 이것이 바로 지오데식 돔의 구조이다.
구는 똑같은 부피를 둘러싸는 입체도형 중에서 겉넓이가 가장 작으므로, 지오데식 돔은 전통적인 건축물보다 훨씬 더 적은 재료를 사용해서 훨씬 더 큰 공간을 얻을 수 있다. 여기에 매우 가볍고 안정되며 견고한 구조까지 제공한다. 이런 지오데식 돔은 엄청나게 큰 건물의 구조가 될 수 있는데, 리처드 풀러는 뉴욕시의 일부를 덮을 수도 있는 지름이 3 km에 달하는 반구 형태의 지오데식 돔을 만들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눈과 비도 피할 수 있고, 햇빛과 공기도 적절하게 조절할 수 있는 지오데식 돔을 말이다.
리처드 벅민스터 풀러의 이런 제안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그의 지오데식 돔은 1967년 몬트리올 만국박람회에서 미국관으로 실현됐고, 그 뒤 실내 체육관, 극장, 온실, 전시회장 등을 만드는데 이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