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석가모니가 세상을 떠날 때 모든 동물들을 불렀는데, 오로지 열두 동물만이 하직인사를 하기 위해 모였다. 석가는 동물들이 도착한 순서에 따라서 각 해마다 이름을 붙여주었다. 쥐가 가장 먼저 도착했고, 뒤이어 소, 호랑이, 토끼, 용, 뱀, 말, 양, 원숭이, 닭, 개, 돼지 순이었다. 불교 설화로 전해오는 열두 띠가 생기게 된 유래다. 그런데 이 열두 가지 동물 중에서 유독 용만 현실의 동물이 아니다. 용은 과연 어떤 동물일까. 새 천년 첫해 용의 해를 맞아 상상의 동물 용을 지상으로 불러내보자.
잉어 비늘에 매의 발톱
용을 묘사한 기록은 여러 가지지만 중국 문헌상에 가장 정형화된 기록은 이른바 구사설(九似說)로 아홉 가지의 동물을 일부분씩 닮은 모습이다. 낙타의 머리, 사슴의 뿔, 토끼의 눈, 소의 귀, 뱀의 목, 이무기 배, 잉어 비늘, 매의 발톱, 호랑이 발바닥으로 이루어져 있다. 어떤 문헌에는 몸에 81개의 비늘이 있고, 울음소리는 구리쟁반을 울리는 소리와 같으며, 입 주위에는 수염이 있고, 턱밑에 여의주가 있고, 목 아래에는 거꾸로 박힌 비늘(역린 逆鱗)이 있으며, 머리 위에는 박산(博山, 전설상의 산)이 있다고 했다. 특히 역린은 용의 급소로서 이곳을 건드리면 용이 포악해져 엄청난 재앙을 일으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용에 대한 상상은 용 자체에 그치지 않고 용이 낳은 새끼들까지 만들어냈다. 예로부터 구룡자(九龍子)라고 하는 용이 낳은 아홉 마리의 새끼가 알려져 있다. 이들은 무섭고 위압적인 어미 용과 달리 서민들의 생활과 친숙하고 귀여운 모습들이다. 모두들 나름대로 좋아하거나 잘하는 것이 있는데, 생활 주변에서 이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첫째인 비희이다. 비희는 무거운 것을 들기 좋아해서 늘 비석 같은 무거운 돌을 지고 있는 모습이다. 오래된 비석에는 귀부라고 하는 거북이 모양의 받침돌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비희다. 거북이를 닮았지만 실은 용의 새끼인 것이다.
둘째는 이문이다. 먼데 바라보기를 좋아해서 지붕의 마루 끝에 장식하는 동물들이 여기에서 유래했다. 셋째는 포뢰인데 이것은 모습도 용을 닮아 전형적인 새끼 용의 모습이다. 포뢰는 소리지르기를 좋아해서 종의 울림통에 장식을 한다. 또 에밀레종 같은 옛 종에는 종을 매다는 부분에 장식된 작은 용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용의 새끼인 포뢰이다. 넷째는 폐안이다. 모습이 호랑이와 닮은 폐안은 힘이 장사라서 예로부터 범죄인을 가두는 옥문(獄門)에 장식으로 세워놓았다.
다섯째는 도철이다. 음식을 먹고 마시기를 좋아해서 솥뚜껑에 장식했다. 여섯째는 기혈이다. 이 녀석은 물을 좋아해서 다리 기둥에 새겨놓았다. 오래된 돌다리의 기둥에 새겨진 거북이 모양의 동물은 실은 물을 좋아하는 용의 새끼인 기혈이다. 일곱째는 애자이다. 살생하기를 좋아해서 칼 둘레에 새겨놓았다. 여덟째는 산예이다. 태우고 불지르기를 좋아해서 향로에 장식했다. 보통 향로의 다리에는 사자를 닮은 동물이 새겨져 있는데, 이것이 산예이다. 아홉째인 막내는 초도이다. 이 녀석은 가두고 걸어닫기를 좋아해서 문고리에 장식했다. 모습은 소라나 고동을 닮았다고 한다.
이렇게 아홉 마리의 새끼까지 낳아 우리 생활 깊숙이 자리한 용은 과연 무엇일까. 상상의 동물이라고 하지만 그 상상이 출발한 곳을 추적해보면 상당히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흔히 ‘천년 묵은 이무기가 용 된다’는 말이 전해온다. 또한 ‘용은 구름을 타고 승천한다’는 이야기가 많다. 민속학자 하효길 선생에 따르면 아직 학계에서 합의된 설은 서 있지 않지만, 이 말들은 용에 대한 상상의 출발이 어디인지를 추적하는 시발점으로 삼을 수 있다. 용의 형상화는 크게 두가지로 요약된다. 뱀에 대한 공포와 숭배에서 비롯됐다는 설과 토네이도 같은 기상현상에서 출발했다는 설이다.
뱀 기원설과 회오리바람설
뱀에 대한 공포로부터 비롯됐다는 설은 인도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세계 어느 민족이나 뱀을 싫어하고 무서워한다는 점에서 뱀 공포설은 인도가 유일한 출발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아무튼 인도에서는 용이 뱀을 신격화한 개념으로 만들어졌다. 용왕에 대한 개념은 코브라 중에서 가장 강한 것으로 알려진 킹코브라의 형상에서 출발했다는 견해도 있다. 코브라는 독이 있어서 인도지방의 원주민들은 일찍부터 이를 뱀신으로 숭배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뱀 숭배 신앙이 오랫동안 불교와 교류하면서 마침내 뱀이 불교를 지키는 호교자로 됐다. 불교에서 말하는 용왕이나 용신은 뱀과 신이 혼합된 모습으로 나타나고 불법을 수호한다.
민속학자인 박계홍 선생은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이러한 불교적 용 관념에서 출발해, 불교가 중국을 거쳐 한국에 들어오면서 원래의 중국적 용 관념과 혼합됐다고 본다. 이로 인해 우리나라에서는 황룡사 구층탑이나, 문무왕의 설화에서처럼 용이 나라를 지켜주는 존재로 나타난다고 한다.
기상현상 유래설은 원래 바닷물이나 호수 물이 회오리바람과 함께 휘감겨 오르는 용오름 현상에서 출발했다는 설이다. 중국 한나라 때의 철학자인 왕충의 책 ‘논형’에는 “용은 지상의 나무나 집에 숨어있는데, 하늘이 용을 승천시키고자 벼락을 쳐, 나무를 꺾고 집을 부수는 것으로 사람들은 알고 있다”고 썼다. 여기에서 서술된 ‘용이 승천할 때 나무를 꺾고 집을 부수는 모습’이 토네이도와 유사하다.
또한 용은 옛 우리말로 ‘미르’이다. 미르의 어근은 ‘밀-’로서 믈(水)과 같다. 때문에 용은 예로부터 물과 관계가 깊은 동물이다. 흔히 큰 호수나 강, 바다와 같은 물 속에 살며, 비와 바람을 몰고 다닌다고 생각돼왔다. 용왕이라는 바다의 신이 우리나라 해안지방에서 숭배되는 이유도 용이 물을 지배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또한 용은 육지에서 비와 구름과 관계가 많다. 이규보는 동국이상국집에서 “용이 기운을 토하여 구름을 만들었으므로, 구름도 신령스럽고 괴이하고, 용은 그 구름을 탐함으로써 신묘함을 부린다”고 했다. 용에 대한 기록들을 보면, 용은 대체로 짙은 안개와 비를 동반하면서 구름에 싸여 움직인다. 또한 바다나 연못 등에서 하늘로 오르내릴 때에는 하늘과 땅이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안개와 구름이 자욱하다. 이것을 보면 용이 기상현상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바닷물이 빨려 올라가는 용오름
일단 용의 존재가 받아들여진 다음 사람들 사이에 퍼진 용을 보았다는 목격담들을 보면, 용이 바다에서 일어나는 용오름 현상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더욱 실감할 수 있다. 또한 용오름 현상은 용의 실재에 대한 증거가 돼 용에 대한 이야기가 더욱 현실감을 더할 수 있게 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세종 때에 제주 안무사가 보고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지나간 병진년 8월에 다섯 용이 바다 속에서 솟아 올라와 네 용은 하늘로 올라갔는데, 운무(雲霧)가 자우룩하여 그 머리는 보지 못하였고, 한 용은 해변에 떨어져 금물두(今勿頭)에서 농목악(弄木岳)까지 뭍으로 갔는데, 풍우가 거세게 일더니 역시 하늘로 올라갔다 하옵고, 이것 외에는 전후에 용의 형체를 본 것이 있지 아니하였습니다.”이 보고에서 용의 승천이 용오름 현상에 대한 묘사와 매우 흡사한 것을 알 수 있다.
기상연구소 차은정 연구원에 따르면, 태풍, 토네이도, 용오름, 회오리바람 등은 모두 발생 메커니즘이 같은 현상이다. 다만 시간적 공간적인 규모에서 차이가 난다. 태풍은 큰 규모의 열대성 저기압, 토네이도는 작은 규모, 용오름은 주로 해상에서 발생하는 토네이도를 부르는 이름이다. 주변에서도 가끔 나뭇잎이나 먼지가 소용돌이를 이루며 감겨 올라가는 회오리바람을 볼 수 있다. 이 모두가 주변공기보다 기압이 낮은 원기둥이 생겨나 이곳으로 주변공기가 일시적으로 몰려들어가면서 생기는 소용돌이다. 찬 기류와 더운 기류가 만나면서 접촉부에서 불안정한 지역이 생기고 주변보다 현저히 낮은 기압을 보이는 지역이 만들어질 때 이런 현상이 생긴다.
토네이도 중에는 작은 소용돌이들이 여러 개로 갈라져 생기는 것도 있는데, 조선왕조실록의 기사에서 다섯 마리의 용은 갈라진 토네이도를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토네이도가 주변의 물건들을 빨아올리는 것은 기압차 때문이다. 토네이도 외부의 대기압이 보통 1기압(1013hPa)보다 조금 낮은데 비해 그 내부는 약 50-100hPa밖에 되지 않는다. 이 정도의 기압차이면 나무를 뽑고 지붕을 날려버리는 것은 물론, 수십t 짜리 트레일러도 넘어뜨릴 수 있다.
울릉도 앞바다의 용오름
토네이도 현상이 우리나라에서 그리 드문 현상이 아니라는 점도 용의 승천에 대한 기록들이 토네이도와 관계가 있으리라는 심증을 크게 한다. 지난 1988년 10월 18일에 울릉도 앞바다에서 발생한 용오름은 매스컴을 통해 온 국민이 지켜보았을 정도로 유명하다. 이 외에도 80년대 이후 관측 보고된 용오름만 하더라도 1985년 10월 14일 울릉도 앞바다, 1988년 11월 27일 울릉도 앞바다, 1996년 11월 27일 서귀포 앞바다 등 세차례나 된다.
용오름보다는 조금 더 소규모인 육지의 회오리 바람은 더욱 빈번히 발생한다. 기상청에 보고된 것만 1998년 서귀포, 1997년 서귀포, 1989년 안동, 1985년 충주, 1976년 임실, 1973년 완도, 1973년 영주, 1972년 합천, 1961년 강릉 등이다. 한편 지난 1964년 9월 13일 한강 뚝섬지역에서 발생한 토네이도는 특히 무서웠다. 신사동에서 팔당 부근까지 약 20km를 진행하면서 좌우 약 2백m 지역에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당시 내무부 집계에 따르면 사망 2백39명, 부상 3백46명, 실종 1백65명, 이재민 3만4천여명으로 당시 금액으로 14억여원의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이런 사례들을 보면 용의 승천이 불시에 발생하는 토네이도를 신비화한 것이라는 이론에 더 신뢰가 간다.
조선일보 칼럼니스트 이규태 씨는 ‘삼국사기’에 백제 고이왕 5년에 “벼락이 치더니 관문으로부터 황룡이 날아갔다”는 기록과 조선 명종 9년 진부령 근처에서 “황룡이 승천하는데 큰 나무들이 뽑혀 날아갔다”는 기록을 들어 용과 토네이도의 연관성을 주장했다. 용의 승천에 관한 설명에서 대부분 나무가 뽑힌다든지 안개, 벼락 등의 있었다는 것을 보면 토네이도와의 연관성이 분명하다는 주장이다.
서양의 용과 동양의 용
그렇다면 용이 나라의 수호신이나 초자연적인 존재로 자리잡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모습을 정확히 볼 수는 없지만 회오리바람과 자욱한 구름으로 흔적을 나타내는 용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존재였고, 그 신비함만큼이나 숭배해야 할 대상이 됐던 것이다. 때문에 용은 동양문화권에서 항상 최고의 위엄과 권능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제왕의 자리는 용의 자리(용상, 龍床)이요, 제왕의 얼굴은 용의 얼굴(용안, 龍顔)이요, 옷은 용의 옷(용포, 龍袍)으로 불렸다. 용 그림과 문양마저 일반인은 함부로 다룰 수 없는 국왕의 전유물이었다. 고대 중국의 용 문양은 발톱이 3개, 4개, 5개로 일정치 않지만, 북송의 철종은 천자를 상징하는 용 문양을 일반 백성들이 함부로 쓰지 못하게 하고 반드시 머리에 2개의 뿔과 다리에 5개의 발톱을 그리도록 법으로 정했다. 중국에 사대를 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나라는 4개의 발톱을 그리는 것이 상식이 됐다. 하지만 민간에서는 이러한 법식을 따르지 않은 것들도 많았다.
헤르쿨레스는 님프들의 낙원에서 황금사과를 지키던 라돈이라는 괴물 용을 죽이고 황금사과를 훔쳐냈다. 서양의 용은 늘 상상 속의 무시무시한 괴물일 뿐, 의로움을 수호하고 인간에 복을 주는 동양의 용과 다르다. 서양의 용은 커다란 뱀에 날개가 달려있고 날카로운 발톱을 지닌 경우가 많다. 입에서는 불을 뿜기도 한다. 기독교 성화에서는 성모마리아가 용을 발로 밟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용이 악의 화신이기 때문이다. 원래 영어에서 용을 뜻하는 단어 dragon은 용과 뱀을 동시에 나타내는 라틴어 draco에서 유래했다. 뱀이 인간에게 원죄를 가져다준 악의 화신이었듯이 용도 비슷한 존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동양의 용이 날개 없이도 비바람과 구름을 자유자재로 부리는 전능한 존재였다면, 서양의 용은 날기 위해 반드시 날개가 있어야 했던 불완전한 존재였다.
그러나 우리에게 용은 정의의 수호자요, 행운의 전령사다. 고구려 벽화의 사신도에서 용은 동방의 수호자이다. 서방에는 백호, 남방에는 주작, 북방에는 현무가 각각을 맡아 지키고 있다. 그리고 이 청룡은 하늘의 별자리가 돼 우리 민족을 수호하고 있다. 우리나라 전통 별자리인 황도 주변의 28개 별자리 중에서 동쪽의 7개 별자리(각, 항, 저, 방, 심, 미, 기) 전체가 청룡을 이루고 있다. 이 중에서 각(角)자리는 뿔, 항(亢)자리는 목, 심(心)자리는 심장, 미(尾)자리는 꼬리에 해당된다. 별자리의 명칭 자체에 용의 신체부위가 들어있는 셈이다. 또한 우리 민족은 꿈속에 용이 나타나면 다음날 행운이 온다고 믿고 있다. 용은 비록 아홉 가지 동물이 합쳐진 기괴한 모양이지만, 괴물이 아닌 착하고 친근한 동물로 생각하는 것이다.
새해 들어 첫 진일(辰日, 용의 날을 뜻함)을 상진일이라고 한다. 이 날에는 새벽에 주부들이 물동이를 이고 서로 먼저 우물에서 물을 긷기 위해 경쟁한다. 상진일 새벽에 하늘에 사는 용이 내려와 우물 속에 알을 낳는데, 가장 먼저 이 우물물을 떠다 밥을 지으면, 그 해에 운수가 좋고 풍년이 든다고 한다. 올해 경진년은 공교롭게도 음력 1월 1일(양력 2월 4일)의 일진이 임진(壬辰)으로 첫번째 진일이 되고 있다. 이무기나 잉어가 용이 되기 위해 천년의 세월을 기다리듯이 모두가 첫새벽에 물을 긷는 마음으로 등룡(登龍)의 날을 기다려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