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3월경 인간게놈프로젝트가 90% 이상 완수돼 '인체설계도'의 초안이 작성될 예정이다. 그리고 2003년 인간게놈프로젝트가 완성된다. 그런데 한국 과학기술부는 2000년 부터 게놈연구에 본격적으로 지원할 계획이다. 외국에서 이미 완성돼가는 사업을 한국에서 조만간 시작한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2003년 과학자들은 인체의 신비를 파악하는 '기초자료'를 모두 모을 뿐이다. 30억개의 염기가 배열된 순서를 알아내는 일이다.
하지만 특정 단백질을 만들어내는데 어떤 염기들이 기능을 발휘하는지에 대한 연구가 남아있다(기능유전체학). 또 단백질이 어떤 과정을 거쳐 복잡한 생리현상을 일으키는지에 대해서도 별도의 연구가 진행돼야 파악할 수 있다. 그래서 선진국에서는 이미 '프로테오믹스'(proteomics)라는 학문 분야가 생겨 단백질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되고 있다. 프로테오믹스는 게놈(genome)에 의해 만들어지는 단백질(protein)의 집합체를 뜻하는 'proteome', 그리고 학문을 의미하는 접미어 'ics'의 합성어다.
단백질 연구가 핵심
인체를 구성하는 단백질은 10만여개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현재까지 9만개 이상의 단백질이 어떤 유전자로부터 만들어지는지, 그리고 이들의 기능이 무엇인지가 밝혀지지 않은 상태다. 인체의 신비를 푸는 열쇠까지 다가서기 위해 아직 중요한 단계들이 많이 남은 셈이다. 현재 과학기술부가 추진하고 있는 '한국형' 게놈연구는 바로 이 새로운 흐름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려는 것이 핵심적 내용이다.
한국은 그동안 인간게놈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선진국의 대열에 합류하지 못했다. 정부 차원에서 게놈연구를 추진하는 사업단이 출범한 것은 1996년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졌다. 사업의 대상은 인간을 포함한 동물, 식물, 그리고 미생물로 범위가 넓었다. 여기서 인간의 경우 위암이나 간암과 같이 한국인에게 잘 발병하는 난치병의 원인유전자 몇가지를 밝히는 것이 주된 연구였다. 인체의 염기서열 전체를 밝히는 인간게놈프로젝트의 규모를 생각하면 극히 부분적인 분야에 한정된 셈이다.
막대한 돈과 시간을 투여하며 고생해온 선진국들이 인간게놈프로젝트의 결과물을 공짜로 제공할 리가 없다. 한국 과학자들이 인간 게놈에 대한 연구를 수행할 때 일일이 돈을 주고 기초자료를 사와야 할 형편이라는 의미다. 특히 질병을 유발하는 유전자를 비롯해 다양한 유전자에 '특허'가 부여되고 있는 추세이기 때문에 난치병을 치료할 때 막대한 '유전자 사용료'를 지불해야 할 상황도 무시할 수 없다(과학동아 99년 11월호 '인간유전자에 특허가 매겨진다' 참조). 한국 정부가 더이상 늦기 전에 인간게놈연구를 서두르려는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올해 9월 14일 과학기술부는 '21세기 프론티어 연구개발사업'의 일환으로 국내 인간게놈연구를 수행할 후보자를 모집했다. '21세기 프론티어 연구개발사업'은 10년 정도의 기간 안에 시제품을 생산해 국가 경쟁력 확보에 크게 기여할 수 있는 기술에 적극적인 지원을 펴는 정부 사업이다. 2010년 안에 선진국 5위권에 진입하는 일이 목표다. 총 20개의 사업이 추진될 예정인데, 올해 시범적으로 운영될 두개의 사업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인간게놈에 대한 연구다. 정식 명칭은 '게놈 기능분석을 이용한 신유전자기술 개발 사업'이다.
11월 중순 현재 후보 7개팀 가운데 3개팀이 추려진 상태에서 마지막 심사가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 1년에 1백억원씩 10년간 총 1천억원이 투여되는 대규모 사업이다. 여기에는 기능유전체학과 프로테오믹스, 그리고 이들이 원활히 진행되도록 도와주는 도구인 DNA칩과 생물정보학 분야들이 포함돼 있다.
그런데 이 '첨단' 분야에 대한 연구인력이 국내에 확보돼 있을까. 사업을 추진하는 한 관계자는 "인력 확보의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대답한다. 인간의 암발병 유전자를 찾고 식물과 미생물의 게놈을 해석하면서 축적된 자체 기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 생명과학 각 분야에 종사하는 전문가들의 수가 웬만큼 확보돼 있다는 평이다. 특히 과학기술부 김호성 사무관에 따르면 "프로테오믹스는 다른 분야에 비해 상대적으로 선진국 수준에 근접해 있기 때문에 단기간 내에 경쟁력 확보가 가능하다"고 한다.
늦은 출발의 대가
하지만 선진국보다 늦게 시작한 '대가'는 분명히 존재한다. 기초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DNA칩을 국내에서 개발해 간암을 진단한다고 생각하자. 기본적으로 갖춰야 하는 것은 칩에 들어갈 10만개 유전자다. 시험 대상자의 간유전자 상태가 어떤지 비교할 대상이다. 그런데 10만개 유전자는 선진국의 손에 쥐어져 있다.
현재 인간 유전자 1개 샘플을 미국에서 구입하려면 24달러를 내야 한다. 10만개를 모두 구입하는데 2백40만달러나 든다는 말이다. '다행히' 1만개를 한번에 사면 단가를 6달러로 대폭 낮춰주기 때문에 10만개면 60만달러, 즉 약 8억원 정도가 소요된다. 그렇다면 매년 1백억원을 투여할 계획인 한국 게놈사업에서 그리 큰 액수가 아니다.
하지만 문제가 또 있다. 비록 10만개를 모두 사들인다 해도 이를 병원에서 상업용으로 사용할 수 없도록 계약서에 규정돼 있다. 단지 연구용으로만 사용해야 한다는 전제가 붙었다는 의미다.
더욱이 미국에서 얻은 유전자 샘플은 미국인으로부터 얻은 것이다. 한국인의 질환을 진단하려면 정상적인 한국인의 10만여개 유전자 샘플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샘플을 이용해 실용화시키려면 우선 선진국이 1990년부터 해온 것처럼 막대한 비용을 들이며 게놈사업을 다시 시작해야 할까.
그렇지 않다. 이번 국내 프로젝트에 신청서를 낸 후보팀의 한 관계자는 "10여년 전에 비해 염기서열 분석기계의 성능이 월등해지고 비용이 많이 떨어졌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유전자 한개를 분석하는 비용이 과거 12만원 정도에서 2만5천원 선으로 떨어졌으며, 기간도 몇개월에서 하루로 줄었다고 한다. 앞으로도 이런 추세가 계속 이어질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부담은 선진국이 들인 비용과 기간에 비해 크게 감소할 것이다. 그는 총 사업기간인 10년 중 처음 3년 정도의 시간이면 전부는 아니더라도 한국인 유전자의 중요한 부분을 무난히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과학기술부의 인간게놈 사업에 대해 회의적인 눈길을 보내고 있다. 가장 큰 지적은 선진국이 이미 막대한 비용을 들여 인간게놈을 분석하는 상황에서 과연 한국이 경쟁력을 갖출 수 있겠냐는 점이다. 최근 몇년 사이 선진국의 여러 생명공학회사들은 인간게놈프로젝트와 별도로 연 1조원 이상을 서슴없이 투자하면서 10만개 유전자의 기능을 밝히고 있으며, 실제로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국내에서 내년부터 투자하는 1백억원과 상당한 차이가 나는 액수다. 과연 이런 규모로 선진국과 경쟁할 수 있는 수준의 게놈연구 성과를 얻을 수 있을까.
물론 한국이 인간게놈 연구에 관심을 보이는 일은 필요하다. 하지만 그 범위를 최소화시킬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예를 들어 한국인에게만 존재하는 특수한 유전질환이나 체질적 특성(예를 들어 간에 알코올 분해 효소가 많다는 점 등)에 관여하는 유전자만 '골라서' 연구하자는 말이다. 나머지 부분은 다소 어려움이 따르지만 선진국의 데이터를 사용하는 수밖에 없다. 어차피 우리가 지금 나서도 그들보다 앞서 제대로 된 성과를 얻기 어렵기 때문이다.
"미생물에 오히려 승산 있다" 지적
그렇다면 이렇게 소극적으로만 대응하면 한국의 경쟁력은 낙후되지 않을까. 여기서 게놈연구의 대상을 인간에서 미생물로 옮기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주장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일본은 광합성미생물(cyanobacteria)의 게놈지도를 완성했다. 이 미생물은 태양빛을 받아 탄소에너지를 몸에 저장하고, 수소가스를 발생시키는 특성을 가진다. 그렇다면 이 미생물의 게놈정보를 잘 활용해 필요한 성분을 대량으로 얻어내면 미래의 식량과 에너지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다.
한국의 경우 전통적으로 발효산업 분야에 많은 노하우가 축적돼 있다. 그런데 현재 발효 미생물을 대량으로 기르기 위해서는 당분과 같은 탄소에너지가 적지 않게 필요하다. 만일 탄소에너지 없이도 왕성하게 증식하는 미생물이 있다면 발효산업이 획기적으로 발달할 것이다. 그런데 자연에 존재하는 미생물을 잘 선택해 게놈을 분석하면 이런 일이 가능해진다. 예를 들어 드넓은 바다를 순식간에 붉게 만드는, 즉 적조를 일으키는 조류가 좋은 후보다. 이 조류는 탄소에너지 없이도 왕성하게 증식하는 특성을 가진다. 그렇다면 이 조류의 게놈을 분석해 필요한 부위를 발효미생물에 삽입시키면 문제가 해결된다.
비용도 비교적 저렴하다. 한 개체의 미생물 게놈을 완전히 분석하는데 10억여원 정도면 충분하다. 그렇다면 '상품화'할 수 있는 한국산 미생물을 수십개 선정해 이들의 게놈을 분석한다면 국제경쟁력을 충분히 갖출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현재 국내에서 인간게놈사업을 추진중인 관계자들은 대부분 "미생물의 연구도 중요하지만 기존의 연구비로도 활용할 여지가 충분하다"는 입장을 보인다. 그리고 사업의 대상은 이미 인간으로 확정된 상태다. 하지만 현재 정부의 목표대로 '선진국 5위권 진입'이 무사히 달성될지에 대한 비판적 검토는 프로젝트가 진행된 후에도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한다.